강연회

불교페미니즘에 불교의 미래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26. 16:48

 

불교페미니즘에 불교의 미래가

 

 

비대면시대를 실감한다. 처음으로 온라인 줌강연을 듣고 메모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나 있는 일이 이제 보통불자에게도 현실이 된 것이다. 어제 저녁 옥복연 선생의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줌으로 들었다.

 

온라인 비대면 강연임에도 집중이 잘 되었다. 특히 데스크탑 모니터 화면 가득 요약된 문구와 사진이 올라와서 이해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디카로 사진을 찍었다. 어쩌면 현장에 가서 직접 강연 듣는 것 보다 더 집중이 잘 된 것 같다.

 

 

요즘 페미니즘 강좌를 듣고 있다. 모두 5강으로 1118일부터 1216일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동안 열리는 불교, 페미니즘을 말하다.’가 그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 강연이다.

 

페미니즘(feminism)이란

 

불교와 페미니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이다. 다섯 번의 강좌에서 불교와 페미니즘에 대하여 가장 근접한 강좌가 두 번째 강좌가 될 것 같다. 강연 내용은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로 슬로건과 맞아 떨어진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이즘(ism)이 붙어서 주의(主義)가 될 것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또 이즘 또는 주의라고 하면 이데올로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념이 들어가 있어서 또 구호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는 사전을 보아야 한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페미니즘(feminism)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핵심 골자는 모든 생활 영역에서 남성의 권리와 동일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 또는 이론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마디로 모든 성별(젠더)은 평등하다는 이념(이데올로기)을 말한다.

 

페미니즘은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옥복연 선생은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하여 3단계로 설명했다. 1세대 페미니즘, 2세대 페미니즘, 3세대 페미니즘을 말한다. 각 세대는 특징이 있다. 이에 대하여 옥복연 선생은 참정권(1세대), 섹슈얼리티(2세대), 그리고 다양성(3세대)으로 구분했다.

 

사람들은 페미니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페미니즘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본다. 더구나 영어로 페미니즘이라 했을 때 사전을 찾아 보기 전에는 잘 알 수 없다. 차라리 여성주의라고 하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참정권, 여성의 지위 향상 같은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 역사를 보면 이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불교페미니즘은 어떤 것일까?

 

불교페미니즘은

 

옥복연 선생은 불교페미니즘을 설명하기 위하여 페미니즘의 역사부터 말했다. 페미니즘을 알아야 불교적 관점에서 보는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옥복연 선생이 말하는 불교페미니즘은 한마디로 모든 페미니즘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1세대, 2세대, 3세대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페미니즘의 완성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옥복연 선생은 불교페미니즘에 대하여 제3세대 페미니즘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모든 페미니즘 운동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남녀평등과 성적해방추구를 특징으로 하는 섹슈얼리티, 즉 제2세대 페미니즘의 섹슈얼리티를 극복했고, 또한 신자유시대에 있어서 여성내부에서의 차이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제3세대 페미니즘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성상위는 아니고

 

남성들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긴장하게 된다. 특히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를 말하면 반감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옥복연 선생의 말을 들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옥복연 선생은 분명히 여성상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옥복연 선생에 따르면 불교페미니즘에서는 여성상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여성상위를 이야기한 페미니즘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성평등을 넘어서 여성이 상위가 되는 페미니즘이라면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조차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왜 페미니즘이 나오게 되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을 따지면 애초에 남성과 여성으로 성이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분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이분법적 구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가부장적 권위에 따른 남녀차별을 말한다.

 

옥복연 선생이 강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이분법적구조와 가부장제이다. 이 두 가지가 어쩌면 페미니즘의 핵심과제인지 모른다. 특히 이분법 구조에 대하여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나 여자로 태어난 것은 어떨 수 없지만 이분법적 가부장적 제도는 바뀌어져야 함을 말한다.

 

오늘날 가정에서는 가부장제는 사실상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부장제는 소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분법적불평등도 해소되었다고 본다. 더구나 일인가구의 증가에 따라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 남은 것이 있다면 제도권일 것이다.

 

팔경법이 있는데

 

불교에서 가부장적 권위에 따른 이분법적 구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종단에 있을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종단을 보면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의 종단이라 하지만 사실상 비구종단이라고 볼 수 있다.

 

옥복연 선생은 탈이분법극복과 함께 팔경계극복에 대해서도 말했다. 비구니 팔경계에 따라 비구승의 가부장적 권위에 따른 성의 불평등이 초래된 영향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팔경계와 관련하여 책을 하나 찾아보았다. ‘불교와 섹슈얼리티라는 책이다. 옥복연 선생과 전재성 선생이 메인 저자로 되어 있다.

 

 

오늘날 비구니 팔경계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고, 용납될 수도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합리적인 분이다. 팔경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책에서 경전을 근거로 하여 설명했다.

 

팔경계는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A8.51)에서 발견된다. 경에서는 여덟 가지 공경의 원리(aṭṭhagarudhamma: 八敬法)’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비구니가 비구에 대한 공경을 말한다. 요즘 같은 남녀평등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개별항목을 보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비구니 팔경법은 어떤 내용일까? 첫번째 항목을 보면,“수행녀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년이 되어도 방금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응대해야 한다.”(A8.51)라고 되어 있다. 더구나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A8.51)라고 되어 있다. 첫번째 항이 이정도이니 나머지 항은 이에 준하는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옥복연 선생은 강연에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하여 팔경법이 생겨난 원인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첨가설, 방편설, 정치적 타협설을 말한다. 첨가설은 부파불교시대에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교단에서 추가한 것이라 한다. 방편설은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정치적 타협설은 여성출가 반대세력을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니까야(經藏)와 위나야(律藏), 어느 것이 더 권위 있을까?

 

전재성 선생은 비구니 팔경법에 대하여 불교와 섹슈얼리티에서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놀랍게도 팔경법은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에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장소품에도 똑 같은 내용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첨가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첫번째 조항을 설명하면서 율장의 쭐라박가에서도 강조되기 때문에 붓다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135)라고 했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같은 부처님 말씀이라도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여인오장설이 대표적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여자가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A1.278)라고 했다. 여자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따미의 경에서는 뒤집어 진다. 부처님은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흐름에 든 경지나, 한번 돌아오는 경지나, 돌아오지 않은 경지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다.”(A8.51)라고 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서로 상충되었을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 똑같은 내용이 율장에 실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여인오장애설은 율장에 실려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여인오장애설에 대하여 아마도 앙굿따라니까야가 니까야 가운데 남성중심 사상이 팽배했던 비교적 후기에 성립되었고, 그 결과 사회적인 성차별적 이데올로기가 편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20)라고 했다.

 

니까야(經藏)와 위나야(律藏) 중에 어느 것이 더 권위가 있을까? 위나야가 더 권위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세 가지 순서가 율, , 론 순서로 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율장대품 제1장 후렴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이다.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Vin.I.98)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니까야와 아비담마가 없어도 위나야만 있으면 정법이 지속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위나야에 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 상당부분 실려 있기 때문이다.

 

왕족으로서 교만을 제거하게 하기 위하여

 

불교인들은 부처님이 매우 합리적인 분이라고 생각한다. 팔경법이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부처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따미 일인에 한해서 본다면 더욱 가능성 있는 일이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궁궐 여성 출신이라 할지라도 신분 차별이 없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붓다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기 때문이다.”(135)라고 했다.

 

율장소품을 읽어 보면 석가족 왕족들이 줄을 이어 출가했다. 한꺼번에 여섯 명 출가한 것이다. 그 중에는 왕도 있었다. 밧디야라는 왕을 말한다. 밧디야는 사끼야족 왕족들과 함께 출가하고자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우빨리를 만났다.

 

우빨리는 왕족들의 머리를 깍아 주던 이발사였다. 왕족들은 부처님에게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Vin.II.183)라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하인을 먼저 출가시켜 사형으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이는 교단이 평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교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내가 왕인데.”라든가, “나는 왕족인데.”라는 왕족의 자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 양어머니 고따미에게 팔경법을 설한 것은 이와 같은 왕족으로서 교만을 제거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팔경법은 고따미 일인에게만 한정되는 특별한 가르침이 된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따라서 100세가 되더라도 절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고따미가 여성 수행자로서 처음이기 때문에 고따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뜻이다.”(138)라고 했다.

 

팔경법 후속법을 보면

 

옥복연 선생은 팔경법을 극복하자고 했다. 이는 제도권 종단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팔경법이 부처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더구나 왕족출신 고따미 일인에게 적용되는 것임에도 이를 확장하여 비구니 전체를 옭아 매는 것이 된다면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후대 이런 일을 예상 해서일까? 고따미의 경에 이어서 두 개의 경을 더 설했다. 그것은 수행녀의 교계사에 대한 경’(A8.52)고따미에 대한 훈계에 대한 간략한 경’(A8.53)을 말한다.

 

팔경법과 관련하여 단지 고따미의 경만을 인용한다면 이는 하나만 알고 둘, 셋은 모르는 것과 같다. 일부만 알고서 전체에 적용하려 한다면 팔경법은 악법이 되고 만다. 이를 염려 해서일까 부처님은 두 개의 경을 더 설했다. 마치 입법과정에서 권력기관을 서로 견재하는 후속법을 만든 것과 같다.

 

수행녀 교계사와 관련된 경을 보면 아무나 수행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계행을 지키고, 많이 배운 수행승을 말한다. 무엇보다 그의 승납은 이십년이나 이십년 이상이다.”(A8.5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녀 들로부터 존경받는 장로 수행승이 교계사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팔경법을 설한다음에 후속조치를 마련해 놓았다. 사미라 하여 백세비구니를 하인 다루듯이 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같다. 자격조건을 갖춘 장로급 비구가 비구니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권위적 위계적 일방적 지도자가 아니라 비구니 승가를 이해하고 조력하며, 심지어 비구니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여덟 가지 조건을 갖춘 수행승만이 비구니를 지도할 수 있다.”(140)라고 했다. 이는 비구라 하여 아무나 비구니에게 절을 받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불복종할 수 있는 권리

 

팔경법은 후대로 내려 갈수록 악법이 되었다. 비구니를 옭아 매는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는 비구니에 대한 무시로도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에서도 목격이 된다.

 

2016년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백인대중공사가 열렸을 때 일이다. 그때 당시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비구니스님들이 5천명이에요. 비구니스님들이 결집하면 총무원장선거 끝이야. 그것이 장점도 있지만 종단의 균열을 낼 수도 있고 새로운 분규를 시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성도 있다는 것을 멀리멀리 이해하고,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종단의 이익을 길게 봐주시는 안목을 부탁드리겠습니다.(2016-03-01)라고 말했다. 블로그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의 수장이 비구니 보기를 벌레보듯 한 것이다.

 

부처님은 팔경법을 설한 다음 후속 조치 두 가지를 취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여법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복종을 말한다. 비구가 비구니를 교계할 때, 비구의 허물이 발견되었다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비구니를 상대하는 비구에게서 탐욕, 욕망, 게으름을 보았다면 고따미여, 결코 그러한 원리는 가르침이 아니고 계율이 아니고 스승의 교계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오.”(A8.5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구가 비구니를 탐, , 치의 소멸로 이끌지 못한다면 비구니의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팔경법을 잘못해석해서

 

페미니즘은 생소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불교페미니즘은 매우 생소하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강연을 들어 보니 불교페미니즘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미래라고 보여 진다. 이는 불교의 교리에서 이제까지 문제 되었던 가부장적 권위에 따른 이분법적 구조가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복연 선생은 모든 페미니즘을 끌어안을 수 있는 마지막 페미니즘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페미니즘도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설령 불교적 교리에 따라 탈이분법과 가부장적권위가 해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팔경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팔경법을 잘못해석 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팔경법이 왕족출신 고따미 일인에게 교만을 제거해 주기 위해서 설한 것임에도 이를 비구니 전체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더구나 팔경법만 소개되었지 후속조치라 보여지는 두 가지 가르침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재성 선생의 글을 보면 팔경법에 대한 해법이 보인다.

 

 

오늘날까지 승가에서는 팔경계만 소개-강조될 뿐 비구교계사에 대한 엄격한 여덟 가지 조건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불교학자조차 인용하지 않았던 것은 남성 불교학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니까야를 제대로 읽은 불교학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붓다의 가르침에는 비구니가 비구에게 충고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율은 있지만 복종하지 말라는 말은 결코 없다. 비구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비구니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만약 붓다의 가르침에 맞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가르침에서 남녀평등을 넘어 인간 존중을 가르치는 붓다의 숭고한 정신을 알 수 있다.”(불교와 섹슈얼리티, 141)

 

 

한국불교에서 비구니는 차별받고 있다재가불자도 차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비구승 위주로 되어 있는 종단에서 재가불자들은 비구승가의 종속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가부장적 권위에 따른 비구우월주의의 소산이라고 본다. 엄밀히 말하면 비구승의 자만이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는 사라지고 남녀동등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제도권 종단에서 권위는 여전하다. 이는 낡은 전근대적 유산인 가부장적 권위를 말한다. 비구가 비구니를 차별하고, 비구가 재가자를 차별했을 때 이는 반페미니즘에 해당되고 반민주적 행위에 해당된다.

 

남자와 여자의 성 구별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어나보니 남자로 태어났고, 태어나보니 여자로 태어난 것이다. 태생에 따라 차별한다면 이는 반페미니즘에 해당된다. 그래서 옥복연 선생은 강연 말미에서 차이는 있으나 차별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불교페미니즘은 이제까지 모든 페미니즘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불교페미니즘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상충되는 교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큰 맥락으로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이야말로 페미니즘에 부합되는 것이다. 다만 팔경계는 극복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여자라는 존재는 괴로운 것이라고

 

불교페미니즘 강연 두번 째이다. 그 동안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회수가 거듭됨에 따라 점차 이해의 폭을 넓혀 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구에서 사람의 반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머니도 있고 누이도 있고 딸도 있을 것이다.

 

모두 가족이다. 먼 곳에 있는 여성일지라도 가족이나 다름없다.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등 돌고 돌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로서 어머니와 다시 만나고, 어머니로서 아들과 다시 만나고”(D30.21)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 세상 살기가 불리하다는 것이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왜 불리할까? 이는 어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게 사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을 도둑이 도둑질하러 침입하기 쉽듯이,”(A8.51)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자만 살면 여자를 무시할 수 있음을 말한다. 테리가타에서는 여자가 겪는 괴로움에 대하여 이렇게 게송으로 되어 있다.

 

 

여자라는 존재는 괴로운 것이라고

사람을 길들이는 님께서 말했으니,

누군가 남편을 공유하는 것도,

한 번 아이를 낳는 것도 괴로움이다.”(Thig.216)

 

 

여자라는 존재는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는 여성의 재난에 대한 것이다. 재난 두 가지는 처첩과 첫 출산에 대한 것이다.

 

테리가타 성립연대는 부처님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처첩이야기가 나온다. 처첩과 함께 사는 것도 괴로움임을 말한다. 이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여성이 겪는 괴로움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첫 출산에 대한 괴로움이다. 첫 출산의 고통은 참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연약한 존재이다. 아무리 힘이 세도 남자를 당해내지 못한다. 가부장적 위계질서 하에서 연약한 여자들이 목을 자르고, 독약을 복용하기도 한다.”(Thig.217)라고 했다. 또한 살모(殺母)의 아이가 모태로 들어가면 둘 다 죽음을 겪기도 한다.”라고 했다. 잘못 놓여 진 태아로 인하여 둘 다 죽을 수 있음을 말한다.

 

불교페미니즘에 불교의 미래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남자로 태어난 것과 비교하여 불리한 조건임에 틀림없다. 요즘은 핵가족화로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제도권에서 가부장적 권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완전한 성평등을 이룰 수 있는 시대는 언제일까? 아마 욕계에 있는 한 가능하지 않을지 모른다. 욕계를 떠나 색계에 태어난다면 완전한 성평등은 가능할 것이다. 색계는 남성도 여성도 없는 무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 했을 때 가는 곳이다.

 

욕계에 사는한 성의 구별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의 차이가 성의 차별이 되어서는 안된다. 차츰차츰 성평등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제도권에 있어서 성차별은 여전하다. 이를 불교페미니즘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팔경법이라는 걸림돌이 있다. 그러나 팔경법도 제대로 알면 극복할 수 있다.

 

옥복연 선생은 불교페미니즘에 불교의 미래가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종단에서 성평등한 사회를 받아들이지않으면 불교가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불자들이 대다수이고 또한 비구니 스님들이 반을 넘긴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낡아 빠진 가부장적 권위에 의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가치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려 한다면 불교는 쇠퇴하고 말 것이다.

 

페미니즘은 전세계적 추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페미니즘은 불교 페미니즘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진 불교는 어떤 모습일까?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팔경법이 극복된다면 불교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옥복연 선생은 불교페미니즘에 불교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2020-1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