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김정빈선생 유튜브채널을 발견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6. 11:16
김정빈선생 유튜브채널을 발견하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얘기 했지만 확연히 들어 오지 않는다.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유튜브를 보았다. 김정빈교수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https://m.youtube.com/watch?v=LVD4lengs_U&feature=youtu.be)'에 대한 것이다. 머리가 거의 백발로서 온화한 인상이다. 소설 '단'으로 유명한 작가의 이름과 같다. 그런데 얘기를 듣는 도중에 바로 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교수 타이틀이 붙어 있어서 동명이인인줄 알았으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정빈선생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소설로 접했고 기고문으로 접한 것이 전부이다. 유튜브시대에 이렇게 영상으로 접한 것은 시대의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정빈선생의 유튜브채널인 '김정빈교수의 새불교 밝은 불교'채널을 구독했다.

김정빈선생은 깨달음과 관련하여 여덟 가지로 설명했다. 어느 것 하나 공감하지 않은 것이 없다.

깨달음은 비약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이는 아는 차원과 다른 것이다. 아는 것보다 몇 단계 도약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하"라는 말을 동반한다고 했다. "유레카"와 같은 말이다. 어느 한순간에 관통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김정빈선생은 유튜브 영상에서 깨달음과 관련하여 1시간 반동안 설명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그만큼 몰입도 있는 이야기였음을 말한다. 그 중에 깨달은 사람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누구나 아는 말이다. 그 사람의 행위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말한다.

김정빈선생에 따르면 깨달은 자는 깨닫고 나면 얼굴이 변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전과 이후를 보면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딴 사람이 되어 있음을 말한다. 얼굴에 빛이 나고 몸은 위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자신의 깨달음이 맞는지 시험하고자 했다. 주관적으로는 확고했으나 객관적으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 가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외도 수행자 우빠까를 만났다.

우빠까는 부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범상치 않은 모습에 끌렸던 것 같다. 그래서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M26)라고 말을 걸었다. 이제 막 깨달은 부처님의 상호를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부처님의 얼굴은 훤히 빛났을 것이다. 얼굴이 바뀐 것이다. 깨닫기 전과 깨닫고 난 후의 얼굴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얼굴만 변한 것이 아니다. 몸 전체가 변했다. 그래서 위의가 생겨난 것이다. 이는 다섯 명의 수행자가 영접할 때 상황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멀리서 다가올 때 못본 척 하자고 했다. 고행하다 떠난 수행자를 타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바뀌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씻을 물을 가져오고 합장공경 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빛나는 얼굴과 몸의 위의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연기법, 사성제 등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김정빈 선생은 무아를 예로 들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부처님은 무아를 깨달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역사상 이제까지 어떤 성현도 무아를 말한 적이 없다. 부처님만이 유일하게 무아를 설했다. 그럼에도 불교계에서는 참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참나와 무아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참나가 무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김정빈선생은 "참나는 참나이고 무아는 무아이지, 참나가 무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참나를 주장하려거든 불교 바깥에서 하라고 했다. 부처님이 무아를 설했는데 진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아와 무아와는 정반대 개념이다. 진아는 아뜨만에 대한 것으로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전세계적으로도 영혼과 같은 개념의 자아를 믿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참나, 진아, 자아는 없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자아개념을 부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무아로 보기도 한다.

불교계에서 참나를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설령 말을 돌려서 무아와 같은 것이라고 강변해도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은 무아의 가르침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인류역사에 있어서 무아를 설한 사람은 없었다. 부처님이 유일하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을 것이다.

김정빈선생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한다. 다만 도중에 경전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언어가 진리를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열반에 대해서는 "안온하기가 동굴같고 안전하기가 섬같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45년동안 설법했다. 언어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본다면 할이나 방을 하거나 양구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팔만법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청원경(S6.1)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독백식으로 심오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탐욕에 물든 자들은 알아 듣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진리를 설명해도 알아 듣지 못하면 피곤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사함빠띠브라흐마가 나타나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S6.1)라며 청원한다. 부처님은 청원을 받아들여 진리를 설하기로 했다.

부처님이 "진리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라 하여 침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비유로 설하고 근기에 맞게 설했다.

진리의 말씀은 제자들이 암송해서 전승되어 왔다. 후대에는 문자로 기록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경전으로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마(Dhamma)'라고 한다. 이를 '진리'라고도 말한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모두 진리가 된다. 오늘날 경전으로 접할 수 있다. 누구나 경전만 열어 보면 부처님과 접할 수 있다.

경전을 접하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심오한 가르침으로 가득한 것이다. 비록 수행을 해서 체험한 것은 아니지만 경전을 통해서 이해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 차원의 앎도 깨달음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에 대하여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는 놀라운 사람들”(A6.46)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교학을 통해서도 통찰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 양날개로 완성된다.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다거나, 수행만 있고 교학이 없어서는 안된다. 둘 다 있어야 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알고 또한 보는 사람에게서 번뇌가 소멸한다고 말한다.”(S22.10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알고 본다는 것은 냐나(知)와 닷사나(見)를 말한다.

부처님은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ñāṇadassana)하라고 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아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아는 것(知)은 냐나(ñāṇa)에 대한 것으로 ‘바른 지적인 이해’를 뜻한다. 본다는 것(見)은 닷사나(dassana)에 대한 것으로 ‘지혜의 눈으로 진리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몸으로는 체험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있어서 앎(知)과 봄(見)은 동등함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어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신체적으로 체득해야 한다. 이는 언어적 통찰과 신체적 통찰이 동등함을 말한다. 그래서 "알고 또한 보는 사람에게서 번뇌가 소멸한다고 말한다.”(S22.101)라고 했다. 그럼에도 경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본다.

부처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 오늘날 전승된 빠알리경전을 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정신문명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물질문명은 일년이 멀다하고 변하고 있지만 정신문명은 이미 이천오백년전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아의 가르침이다. 미래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미래 신인류가 출현해도 부처님이 깨달은 무아의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변함 없다.

경전을 통해서 진리를 접하고 있다. 경전에서 보는 진리의 말씀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다. 불교인들은 삼귀의 할 때 "담망 사라낭 갓차미"라 하여 법귀의 한다. 이렇게 법귀의 하는 것은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경전을 손가락으로 볼 수 없다. 누군가 가르침을 손가락정도로 본다면 가르침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와 관련된 수많은 유튜브 채널이 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불교를 말하는 것 같지만 무늬만 불교인 것도 많다. 참나를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때 김정빈선생의 유튜브채널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다. 구독했으니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2021-06-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