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출가를 위하여
욕망을 욕망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까?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듯이 쾌락을 쾌락을 통해서 쾌락을 극복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인 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A3.104)
아무리 즐겨도 만족이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경에서는 잠, 취기 있는 것, 섹스를 말한다. 마치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나는 갈애와도 같다.
여기 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욕망에 지배된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노예가 된 것이다.
술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으니 신물이 나도록 마셔서 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을 욕망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욕망은 불선법이다. 불선법을 불선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잘못이 없다’라고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타락한다.”(A3.11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 있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만일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하면 더 걱정만 일어날 뿐이다. 욕심내면 더 욕심만 날 뿐이다.
주식하는 사람이 있다. 심심풀이로 재미삼아 하는 사람이다. 따면 좋을 것이다. 잃으면 초조해질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번 시세를 확인할 것이다.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욕망을 욕망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식할 때 손해나도 손절하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도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지켜보면서 욕망을 욕망으로써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욕망의 세계에서 욕망을 이겨낼 수 없다.
화가 난다고 하여 화를 내면 더 화만 날 뿐이다. 술이 마시고 싶어 술을 마시면 술을 더 마시고 싶어진다. 욕망을 욕망으로 다스릴 수 없다. 근심을 근심한다고 해서 근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불선법을 불선법으로 제어할 수 없다.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있다. 욕망에는 죄가 없다고 보는 사람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술이 고프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타락한다.”(A3.111)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과보는 어떤 것일까? 이는 “나쁜 곳, 지옥에 떨어진다." (A3.111)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욕망을 욕망으로 다스리는 사람도 있다. 하고 싶은 것을 원없이 해 보는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토할 때까지 먹는 것이다. 마치 독을 독으로 제독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극히 위험하다.
의심을 의심해서 의문을 해소하는 방법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큰 의문을 풀고자 “이런 행위를 하는 나는 무엇인가?”라며 작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의심에 의심이 쌓여서 마침내 큰 의문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심은 불선법이다, 불선법을 이용하여 풀리지 않는 의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불선법으로 불선법을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개념화 된 것이다. 언어로 규정된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아무리 나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이런 행위를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찾아보려 하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런 나는 본래 없다. 내가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불선법을 불선법으로 제어할 수 없다. 불선법은 선법으로 제어해야 한다. 이를 쐐기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는 선법으로 제압해야 한다. 탐욕이나 분노와 같은 불선법이 일어났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라고 했다.
쐐기의 비유에 따르면 일상에서의 사띠(sati: 念)는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사띠가 수행에서 삼빠자나(正知)와 함께 쓰이면 알아차림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띠가 일상에서 단독으로 쓰이면 기억의 의미가 크다.
일상에서는 좌선하듯이 대상을 관찰하기 힘들다. 움직임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가르침을 기억하고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오근과 오력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최상의 기억과 분별력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S48.10)라고 했다.
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보아야 하고 교학을 익혀야 한다. 그런데 최상의 기억은 최상의 분별력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띠는 지혜와 결합되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지혜는 어떤 것일까?
불교적 지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 고, 무아임을 아는 것이다. 지금 탐욕이 일어났을 때 이를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불선법이 그렇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집착할 것이 없다.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적 욕망의 산물이다. 부모가 성적으로 결합해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탐욕과 성냄 등 불선법의 뿌리가 있는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욕계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내고 성내는 등 불선행위를 한다.
욕계중생이라 하여 욕망대로 살 수 없다. 욕망대로 살면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또한 가르침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최상의 기억과 최상의 분별력을 갖추면 불선법을 제압할 수 있다. 이를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M20)이라 하여 쐐기의 비유로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불선법으로 불선법을 제어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코 욕망을 욕망으로 다스릴 수 없다. 욕망을 욕망으로 제어하고자 한다면 더욱 더 욕망이 일어나 타락하게 된다. 그 종착지는 악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반드시 죽어서 악처에 가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불선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면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된다.
욕망을 욕망으로, 분노를 분노로, 의심을 의심으로, 근심을 근심으로 제어할 수 없다. 독을 독으로 제독하면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독으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불선업으로 불선업을 제어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욕계에서 욕망으로 사는 존재들이다. 욕망대로 살면 불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자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악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제 유튜브에서 고미숙선생 깅연을 들었다. 감이당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에 대한 강연이다. 제목은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1강’ (https://youtu.be/Om-tCeHpNFs )이다.
강연에서 인상적 말을 들었다. 그것은 “욕망에서 지성으로”와 “중독에서 영성으로”라는 말이다. 이를 세간적 출가로 설명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혁명을 꿈꾼다. 광장에서 혁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자신을 혁명해야 한다. 욕망에너지를 지성으로 돌려야 하고, 중독된 것을 종교적 삶으로 변환해야 함을 말한다. 가장 좋은 것은 글쓰기라고 했다.
매일매일 글쓰기 하고 있다. 고미숙선생이 말한 것을 오래 전부터 실천해 오고 있는 셈이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쓰는 것뿐만 아니라 읽기, 암송, 명상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다.
글쓰기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가장 큰 이점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혁명적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쓰라고 했다. 이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
의식은 언어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의식한다는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무의식에는 언어가 없다. 동물이나 아기는 언어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의식 영역에 있다. 감정적이고 본능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언어가 있어서 번뇌가 일어난다.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는 동물이나 아기에게는 고통은 있지만 번뇌는 없다. 그런데 경전을 읽으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어에 의해서 자신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언어는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언어적인 것으로 말하기, 읽기, 쓰기, 암송하기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글쓰기가 가장 강력하다. 글쓰기는 언어적 사유가 극대화된 것이다. 글쓰기 하면 성찰하는 것도 되기 때문에 인격적 변화도 수반된다. 글쓰기를 습관화 했을 때 자신을 혁명적으로도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글쓰기는 기예가 아니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누구나 쓸 수 있다. 왜 그런가? 인간은 누구나 언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서 나를 바꿀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로 되어 있다. 사대성인의 가르침도 언어로 되어 있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바꿀 수 없다.
욕망의 존재에서 지성의 존재로 바꾸고자 한다면 글을 써야 한다. 중독의 존재에서 영성의 존재로 바꾸고자 한다면 글을 써야 한다. 자기혁명 하고자 한다면 글을 써야 한다. 의식을 바꾸는데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의식은 언어적 사유로 된 것이다. 글쓰기도 언어적 사유에 해당된다. 강력한 언어적 수단으로 자신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최상의 기억과 최상의 분별력으로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출가라고 하여 절에서 사는 출세간 출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지성으로 돌리고, 중독을 영성으로 돌리는 삶을 산다면 세속출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21-06-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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