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잘사는 것과 좋은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0. 16:31

잘사는 것과 좋은 것


청년백수는 이른 아침 도서관으로 향한다.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왜 공부하는가? 공무원고시에 붙기 위해서이다. 말단 공무원이라도 되면 대기업 못지 않은 미래가 보장된다. 아니 그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 고용보장, 신분보장, 연금보장 되는 곳은 공무원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년백수가 아침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은 목적이기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서 공무원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목적이 없다면 힘들게 공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 아침에 도서관에 가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목적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다.

이상론과 현실론이 있다. 이상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우주에 대해 의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현실로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 않을 수 없다.

이상론이 우주론이라면 현실론은 윤리론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는 플라톤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현실론적으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탐, 진, 치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현실론은 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백수가 도서관에 가는 것도 목적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 살아갈까?

대부분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일을 하는 것도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욕을 얻어 먹어 가면서도 직장생활을 감내하는 것은 가족이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따지고 가다 보면 잘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잘사는 것은 삶의 목적이 된다.

흔히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뉘앙스도 있다. 잘 살면 좋은 것이다. 월급 받을 때 반은 욕 먹은 값이고 나머지 반은 자신의 노동의 대가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잘 살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윤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잘 사는 것이 된다.

그 사람의 일생이 있다.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할까? "그 사람 참 아깝다."라고 말한다면 잘 산 것이다. 반면에 "그놈 참 잘 죽었다."라고 말한다면 잘못 산것이 된다. 잘 산다는 것은 일생에 걸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잘사는 것은 좋은 것(goodness)이다. 잘사는 것과 좋은 것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 의자가 있다. 하나는 안락의자이고 또하나는 나무의자이다. 여기서 좋은 의자는 안락의자이다. 안락의자에 앉으면 좋은 것이다. 의자의 기능을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의자의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나쁜의자가 된다. 이처럼 좋다는 것은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떨까?

여기 두 명의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성자이고 또 한사람은 범부이다. 누가 좋은 사람일까? 사람으로서 기능을 잘 수행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덕(arete)으로 설명할 수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다. 덕을 키운 사람은 일생을 잘 산 사람이다. 잘 사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덕과 좋은 것(goodness)은 동의어가 된다. 덕을 키워서 성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을 잘 산 것이 된다. 삶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잘 사는 것에 두어야 한다. 윤리적으로 잘 사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의자의 기능이 좋으면 좋은 의자라고 하듯이, 덕이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강조했다. 사람의 능력을 탁월하게 수행하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 이상이다. 덕을 갖춘 사람이다.

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적인 덕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인 덕이다. 지적인 덕은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이라고 말한다. 이런 것이다. 용기는 비겁함과 만용의 중용이고, 후함은 인색과 방탕의 중용이라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불교의 꾸살라(kusala)가 연상되었다. 불교에서 꾸살라는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번역된다. 또 꾸살라는 능숙함의 뜻도 있다.

여기 성자와 범부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실천하여 성자가 된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반면 범부는 탐, 진, 치로 살아가기 때문에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성자는 십선행을 실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십선행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꾸살라행을 하면 성자의 경지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꾸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과 유사한 개념이 된다.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청년백수가 이른 아침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삶의 목적이 없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볼 수 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으로 산다면 축생과 다를 바 없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는 인간으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잘사는 것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덕이고 또한 꾸살라이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이 글은 유튜브 '5분 뚝딱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https://youtu.be/sVn9JbFTFFA)"을 보고 나름대로 정리하여 견해를 밝힌 것이다.

2021-08-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