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십자가에만 있지 않다
실존, 실존이라고 하는데 실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식인들은 실존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 같다. 글에서나 강연에서나 실존적 인간이라고 말한다. 대체 실존이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튜브는 이제 삶의 일부가 되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유튜브를 본다. 주로 인공지능이 연결시켜 주는 것을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보았던 것도 종종 연결시켜 준다. 이번에 걸려 든 것은 ‘5분 뚝딱 철학’이다.
철학도 대중화될 수 있을까? 유튜브에서 김필영 선생의 ‘5분 뚝딱 철학’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제까지 여러 편의 영상을 보았는데 매우 유익했다. 그 어렵다는 철학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심오한 철학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일 것이다. 이번에 본 것은 ‘야스퍼스 : 한계상황 (feat. 실존주의)’ (https://www.youtube.com/watch?v=MDbTxUbGTH4&t=799s)에 대한 것이다.
“실존, 실존”하는데
어느 지식인은 말끝마다 실존 또는 실존적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실존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실존이라는 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존, 실존”하는 것인지 모른다. 마치 문자 쓰는 것 같다. 실존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기 죽기 쉽다.
실존이라는 말은 실재로 존재함의 뜻이다. 이런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이번에 유뷰브에서 본 야스퍼스의 이론을 보니 실존이 무엇인지 명확하다. 실존이라는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라는 말이 있다. 글을 쓸 때도 존재라는 말을 즐겨 쓴다. 주로 사람이나 중생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존재보다 더 상위 개념인 실존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존재라는 말은 사물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것 자체를 말하지만, 실존은 특별히 사람에게 부여하는 명칭이다. 이렇게 본다면 앞으로 글을 쓸 때 사람이나 중생에 대하여 존재라고 하기 보다는 실존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했을 때 누군가는 “문자 쓰네.”라고 말할지 모른다.
사람을 왜 실존이라고 하는가? 이에 대하여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실존이라고 했다. 참으로 말이 어렵다. 철학은 여러 모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체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을 이성적 존재라고 말한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사람이 의자 등과 같이 다른 존재와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감성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성적 존재이면서도 감성적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다. 사물에도 본질이 있다. 의자의 본질은 무엇일까? 여러 종류의 의자가 있지만 의자의 본질은 앉는 것이다. 그릇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러 그릇이 있지만 그릇의 본질은 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의 본질은 이성적이다. 이성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물이 아니다. 이성만 가진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감성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다 다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개성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에 대하여 실존이라고 한다.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기보다는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이성이 사람의 본질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사람을 이성만으로 볼 수 없는 요인이 있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했을 때 특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인간에게 세 가지 실존방식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자유적 존재, 관계적 존재, 역사적 존재로 설명된다.
인간이 자유적 존재라는 것은 선택적 존재임을 말한다. 자유는 선택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와 선택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고 고독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자유와 관계를 통해서 역사에 참여하기 때문에 역사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세 가지 실존방식에 대한 설명을 보면 불교의 십이연기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유, 관계, 역사 이 세 가지는 연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 발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야스퍼스의 실존론은 불교의 연기법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연기적 존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실존적 존재가 연기적 존재인 것은 한계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실존적 존재를 실존적이게끔 하는 것이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 네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야스퍼스는 실존적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당면할 수밖에 없는 네 가지 한계상황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것은 죽음, 생존경쟁, 고통, 죄를 말한다. 이 네 가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 노, 병, 사와 의미가 같은 것이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데는 적합한 말일지 모르지만 실재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적합한 말은 아니다. 인간은 지금 이순간에도 늘 죽음과 맞닥뜨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죽음을 빼고 논의한다는 것은 희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다. 청정도론 사수념(死隨念)을 보면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립니다.”(Vism.8.15)라고 했다. 지금 고상하게 우아하게 삶을 사는 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지금 고매한 인격을 가진 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벌벌 떨지 모른다.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모든 이론은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이성적이라고 말하지만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쑥 들어가 버린다. 죽음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음문제와 관련이 있다.
좌절을 겪을 때 실존적 자각을
살다보면 희, 로, 애, 락을 겪는다. 어느 것이 더 많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살다보 보면 즐거운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 특히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좌절한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인간은 좌절을 겪을 때 실존적 자각을 하게 된다.”라고 했다.
인간은 좌절을 겪을 때 실존적 자각을 한다고 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철학자들은 같은 말이라도 어렵게 하는 것 같다. 말이 어려우면 심오하게 들린다. 이 말은 결국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말과 같다. 절망에 처했을 때, 비참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스스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에 내몰린 자에게 탈출구는 없을까?
야스퍼스는 기독교적 사상가이지만 불교에도 심취했다고 알려졌다. 야스퍼스가 60년대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때 미륵반가사유상을 보았다고 한다. 미륵반가상의 평온한 미소에서 초월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좌절할 때 자기자신을 자각하게 된다.”라고 했다.
사람은 고통을 겪어 보아야 성장한다. 유행가 가사 중에도 “아픈만큼 성숙해지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매우 철학적이다. 인간은 죽음의 위기에 내몰려 보아야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제거하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대면하게 된다.”라고 했다.
실존이라는 말은 별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실존이다. 우리의 삶은 생, 노, 병, 사에 지배되어 있다. 생, 노, 병, 사는 고성제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고성제는 생, 노, 병, 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성제가 실존이라고 볼 수 있다.
고성제가 왜 실존인가? 이는 초기경전에서 고성제에 대하여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생, 노, 병, 사에 대하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고 했는데 특히 절망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태어남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는 다름 아닌 절망이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도 고성제에 있는 문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가 그대로 적용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죽음이라는 절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동서고금을 막록하고 어느 철학자나 어느 사상가들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로지 부처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환멸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조건소멸하면 결론적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라고 한 것이다. 인간은 좌절을 겪을 때 실존적 자각을 해서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의 한계
요즘 과학의 시대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요즘 사람들은 과학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과학자의 말 한마디가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보다 더 권위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학은 누구에게나 당면해 있는 노, 병, 사의 문제를 해결해 줄까?
과학은 이성적 사유의 산물이다. 과학은 대상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무엇인가? 자연과학이라면 물질이다. 인문과학자들이라면 마음일 것이다.
과학자들은 대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물리학자는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고자 할 것이다. 철학자는 마음을 탐구하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임을 말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도 아니고 이성적 존재도 아니다.
인간이 물질적 존재이긴 하지만 물질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긴 하지만 이성적 존재가 다는 아니다. 인간은 어느 경우에서나 누구에게나 개별적 존재이고 주체적 존재이다.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은 늘 한계상황과 마주한다. 그것은 죽음문제이다.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과 철학에서는 죽음문제를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한다.
과학자에게 죽음은 어떤 것일까? 뇌과학자는 마음에 대하여 두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두뇌에서 나온 것이라면 두뇌가 죽으면 마음도 따라 죽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유물론이다. 오늘날은 과학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 유물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유물론은 옛날에도 있었다. 부처님당시에도 유물론이 있었다. 부처님당시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았다. 사대로 이루어져 있는 몸이 죽으면 사대로 흩어진다고 말했다. 정신은 물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았다. 오늘날 뇌과학자들이 하는 말과 같다.
유물론은 단멸론이고 허무주의이다. 오늘날 과학적 유물론은 결국 단멸론이고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유물론으로는 죽음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한계에 처한 인간에게 유물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학적 유물론의 한계인 것이다.
“네 죽음을 기억생각하라!”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나?”라고 의문하는 것도 인간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망이다.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인간은 겸허하고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실존을 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각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비로소 깨닫는다는 말이다. 무엇을 깨닫는가?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어떤 실존을 말하는가? 불교적으로 말하면 ‘연기적 존재임을 깨닫는다’라는 말과 같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존재는 절망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것이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의 한계이다. 누구도 죽음을 넘어설 수 없다.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그제서야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임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미 늦었다.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은 너무 늦다는 것이다. 이전에 조치했어야 한다.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로마시대 개선장군에게 ‘메멘토 모리’라 하여 “네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일깨워 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며 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가만 있을 수 없다. 죽음을 극복해 내야 한다. 부처님도 늘 ‘죽음에 대한 명상(maranasati)’을 하라고 했다. 이는 사수념(死隨念)이 마흔 가지 사마타명상 주제중의 하나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섬을 말한다. 인식의 지평선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대상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과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걸어서는 세상 끝에 이를 수 없지만
초월적 세계가 있다. 이는 인간이 한계상황에서 좌절할 때 나타나는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야스퍼스는 합리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을 ‘포괄자’라고 했다. 이와 같은 포괄자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존재자체’라고 했다.
존재가 있다. 그런데 인간은 실존적 존재라고 한다. 이제는 포괄자라고 하고 존재자체라고 한다. 존재가 존재자체로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철학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 문자 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좀더 철학을 쉽게 할 수는 없을까?
야스퍼스에 따르면 존재자체는 마치 지평선처럼 무한이기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마치 신의 영역처럼 보인다. 실제로 야스퍼스는 유신론적 실존철학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평선에 도달할 수 있다. 니까야에 이런 게송이 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3, A4.45)
부처님이 로히땃싸 선인에게 한 말이다. 선인은 걸어서 세상 끝까지 이르고자 했다. 지평선이 있다면 지평선 너머까지 가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선인에게는 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땅을 접어서 가듯이 축지법을 쓰면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인은 세상의 끝에 이르지 못했다. 선인이 백년동안 늙어죽을 때까지 걸어 갔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없었다. 마치 오늘날 과학자들이 우주 끝까지 이르고자 하는 욕망을 보는 것 같다.
과학자들은 우주 공간에 수많은 천체가 있음을 밝혀냈다. 허블우주망원경을 이용하여 우주초기까지 밝혀 냈다. 그런데 우주는 밑도 끝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과학자들은 세상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까?
과학자들이 광속에 가까운 우주선을 개발한다고 해도 세상의 끝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물질을 탐구해서는 세상의 끝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로히땃싸 선인처럼 평생을 달려도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그래 보았자 물질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한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을 탐구하면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을 볼 수 있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십자가에만 있지 않다
정신을 탐구하면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다.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세상 끝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세상 끝에 이를 수 있는가? 이는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아닌 사성제를 말한다.
사성제를 알면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한계에 부딪쳐 보아야 한계를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바로 그것이 고성제이다.
고성제는 생, 노, 병, 사가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 겪는 것이다. 이를 고상한 말로 실존적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존적 인간은 반드시 한계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그 끝은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말하지만 죽음의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면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마음은 뇌에서 나왔다고 말하며 이성과 합리를 말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고 물을 수 있다.
누구도 나의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죽음문제는 나에게 당면한 것이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해법이 있다. 그것은 저 멀리 우주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몸과 마음안에 해결방법이 있다. 바로 그것이 부처님의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죽음의 문제를 풀어준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들면 죽음문제는 해결된다. 청정한 삶을 살아 마침내 모든 마음의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스스로 선언하게 된다. 어떤 선언인가? 이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S12.32)라는 아라한선언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실존적 존재에게 있어서 초월이다. 구원은 십자가에만 있지 않다.
2021-08-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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