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존감(自尊感)이 낮은 것은
자존(自尊)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자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영어로는 ‘self respect’이다. 자존심이라는 말도 있다. 자존보다는 좀더 센 것이다.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자존과 자존심은 다른 것이다. 자존은 일반적인 것이라면 자존심은 특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존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이지만 자존심은 특수하고 개인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존은 자기(self)에 대한 것이고 자존심은 자아(ego)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보면 자아는 자기로 향하고 있다. 자아가 자기가 되는 것을 자아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자아가 극복되었을 때 자기가 됨을 말한다. 마치 불교에서 유신견(有身見)이 타파되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민족자존(民族自尊)이라는 말이다. 1987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신문 1면에 '민족자존의 새출발'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야권 패배의 쓰라림 속에서 이 용어를 접한 것이다.
20대 후반 직장인에게 민족자존이라는 말은 생경했다. 지금까지 신문 헤드라인이 남는 것을 보니 민족자존이라는 말이 매우 강렬했음을 의미한다. 자존이라 하여 개인에게만 자존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를 확대하여 민족에게도 자존을 부여한 것이다. 언어의 마술로 보여 진다.
자존이라는 말은 “긍지를 가지고 스스로 존중하며 자기의 품위를 지킴”의 뜻이다. 긍지, 존중, 품위가 키워드이다. 이를 개인에게 적용하면 자존심이 되고 민족에게 적용하면 민족자존이 된다. 노태우 정권이 선거에 이겼을 때 ‘민족자존의 새출발’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국격을 높이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현명한 소비자는 불량품을 사지 않는다. 소비자가 양품을 사는 것은 물건을 보는 안목이 있는 것이다. 물건에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양품을 선택한다. 물건의 가치를 품격이라 말할 수 있다.
물건에 품격이 있으면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다.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다름을 말한다. 사람이라 하여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국가에는 국격이 있다. 나라에도 품격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품격이 상품의 가치를 뜻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람에게 쓰이면 인격과 동의어가 된다. 인격에 가치를 부여하면 품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품격은 또한 자존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유튜브에서 자존감에 대한 영상(https://youtu.be/O4OX6JgKJCU)을 보았다. 심리학자 김태형 선생이 강의한 것을 유심히 새겨들었다. 들은 것을 흘려보낼 수 없어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자존감에는 가짜도 있다고 했다. 가짜가 있으면 진짜도 있기 마련이다. 가짜자존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존감이 있다. 자존심과는 다른 말이다. 자신감과도 다른 말이다. 우리사회는 자존감이 낮다고 말한다. 왜 자존감이 낮은가? 돈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했을 때 사회 구성원의 자존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돈이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세상이 되었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돈이 많은 자를 접하면 나의 자존감은 낮아 지게 되어 있다. 그가 나보다 넓은 평수에 살면 나의 자존감은 떨어진다. 큰 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이 사회에서 가장 부자인 자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자존감이 낮게 된다. 사실상 사회전체가 자존감이 낮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을 때 사람은 물건이 될 수밖에 없다. 물건에 가격을 매기듯이 사람에게도 가격을 매기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보다 돈이 조금이라도 많다면 그는 나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여기 스마트폰이 있다. 스마트폰 가치는 내가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도 내가 평가할 수 있을까? 마치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듯이 그 사람을 내가 평가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 사람은 가격이 매겨져 있는 물건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는 사회가 평가한다. 사회구성원들이 인정했을 때 그 사람의 가치는 올라간다. 재벌이라 하여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졸부보다 민주화유공자를 더 높이 쳐 주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이 평가해 주기 때문이다.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자존감이 달라지는 세상은 각박하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자존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돈으로 자존감을 갖고자 한다면 이는 가짜 자존감이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자존감은 높아진다.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여길 때 자존감은 더욱더 높아진다. 이것이 진짜 자존감이다.
나는 자존감이 있을까? 돈의 가치로 따진다면 하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떼 내어 버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자존감 있는 것이 될지 모른다.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되어 더욱 자존감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자존감은 높아진다. 자존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재벌 부럽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돈은 많다. 연금도 풍족하다. 그러나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는 삶이 무료하고 심심해서인지 주식을 한다. 과연 그는 행복할까?
종종 TV에서 극한직업을 본다. 이른바 3D 업종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족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고된 오전 노동을 끝내고 점심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 하루일과가 끝나고 삼겹살에 소주로 고된 노동의 피로를 푸는 모습은 보기 좋다. 그들에게서 자존과 자존감을 본다.
한때 주식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하루 온종일 주식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에 홈트레이딩 시스템을 깔아 놓고 단타매매를 했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존감도 낮았다. 돈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욕망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식은 15년 전에 주식투자를 손절했다. 여유 돈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는다. 주식을 사 놓은 순간 마음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 사 놓은 종목이 자리 잡고 있을 때 마음은 들떠 있다. 욕망이 똬리를 틀고 떡하니 앉아 있는 것 같다.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 삶의 질은 떨어진다.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했을 때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떠나면 행복하다. 이는 욕망을 떠나는 것과 같다.
늘 가르침과 함께 한다. 가르침에는 ‘욕망을 여읜다’라는 말이 많다. 욕망을 여의는 것이 행복임을 말한다. 그런데 ‘욕망을 여읜다’는 것은 결국 ‘만족한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현재 주어진 조건에 만족한다면 바로 그것이 행복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고 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욕망을 최소화하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과 관계없이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돈, 돈, 돈”하는 사람이다. 재산도 있고 연금도 타는 자가 할 일이 없어서 세상 근심을 모두 안고 있는 것처럼 주식시세판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주식은 욕망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다.
돈이 지배하고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는 불행한 세상이다. 그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행복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존감도 낮다. 설령 그가 조금 이익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짜자존감에 지나지 않는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오는 자존감은 가짜자존감이다. 나 보다 돈 많은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고, 나 보다 명예 있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고, 나 보다 권력있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초라하다. 내가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진짜자존감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것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떠나 있으면 나의 자존감은 회복된다.
내가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길 때 자존감을 갖는다. 이것이 진짜자존감이다. 나는 어떠할까?
늘 가르침과 함께 한다. 그리고 매일 경전을 근거로 글을 쓴다.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다. 이것이 나의 자존이고 이것이 나의 자존감이다.
“이 가르침은 욕심이 없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욕심이 많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A8.30)
2021-08-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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