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존재인가 사건인가?
조금만 방심해도 자만에 빠진다. 자만에는 태생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도 있다.
자만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마나(mana)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내가 있다'는 것에 기반한다. 그래서 대체로 "내가 누군데!"라며 자신을 내세운다. 여기서 우월적 자만이 생겨난다.
우월이 있으면 열등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우월적 자만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열등적 자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잘 되는 자, 잘 나가는 자를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열등적 자만이기 쉽다. 상대방의 성과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성공과 번영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는다. 사무량심에서 '함께 기뻐함'을 뜻하는 무디따(mudita)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자만에는 우월적 자만과 열등적 자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등적 자만도 있다. 모임이나 단체에 속해 있다면 동류의식을 느낄 것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동등적 자만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뷰할 때 "자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자만은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이 세상에서 자만하다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 이순간에도 자만으로 가득찬 자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만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자만은 아라한이 되어서나 없어진다. 자만은 어쩌면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는 "내가 누군데"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만은 필연적으로 갈애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내것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정형구로 나타난다. 각각 갈애, 자만,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자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새벽 컨디션이 좋지 않다. 속이 좋지 않으니 마음에까지 영향을 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속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꿀물을 탔다. 뜨거운 꿀물이 식도를 타고 들어가다 보면 속이 약간은 진정되는 것 같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제 일을 복기해 본다.
지금 겪고 있는 불편한 상태는 어제 자만에 기인한 것이다. 무언가 강한 보상을 원했다. 그것은 막식 형태로 나타났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일시적으로는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다음날 아침에 반드시 과보로 나타나리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자만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자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제 일은 건강의 자만에 따른 것이다. 컨디션만 믿고 폭식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한마디로 음식절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은 감관수호와 음식절제, 깨어있음에 철저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음식절제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음에도 무너진 것은 어떤 요인이 작용한 것일까? 건강의 교만도 크지만 시국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을 염려한 것이다. 이는 지나친 걱정일 수 있다. 그러나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다 보니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폭식과 막식이 된 큰 요인이다.
사람들은 시국에 걱정하는 것 같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마음을 다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리를 두어야 한다.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 하지도 않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제3자의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느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은 죽음이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면 자만이 일어날 수 없다. 왜 그런가? 젊음의 자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의 자만은 질병에 종속되고, 삶의 자만은 죽음에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으면 끝나는 것일까?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를 믿는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불교인 중에도 허무주의자가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최근 유튜브에서 윤회와 관련된 영상시리즈를 듣고 있다. 불광미디어 영상시리즈를 말한다. 그 중에서 김성구 선생이 ‘과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윤회, 윤회에 관한 과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다.
김성구 선생은 물리학자출신이다. 현대물리학을 전공했지만 불교에 관심 있어서 다시 대학에 들어가 별도로 공부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 같다.
대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유물론적 견해를 가지기 쉽다. 그래서 내생이나 윤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학자들의 진정한 태도일지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교학자 중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불교학자가 말하는 것을 실제로 들어 보았다.
불교를 학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윤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 같다. 아마도 과학적 접근방법 때문으로 본다. 이런 태도는 일부 스님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들은 윤회관은 어떤 것일까?
그들은 공통적으로 힌두교 윤회관으로 설명한다. 힌두교 전신인 브라만교에서 사성계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윤회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지 않으셨다고도 말한다. 부처님이 윤회에 대해 말한 것에 대해서는 방편이라고도 보고 있다.
학자들의 말이라고 다 믿어야 할까? 스님 말이라고 하여 추종해야 할까? 이럴 때는 전승되어 온 니까야를 열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전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후대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초기경전을 제대로 읽어 보기나 한 것일까? 어떤 수학과 교수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간난아기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과연 그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물리학자이자 동시에 불교학자인 김성구 선생에 따르면 대부분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유물론자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존재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면 유물론이 될 수밖에 없고, 유물론은 필연적으로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의 생각은 뇌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뇌라는 물질이 있어서 생각이 뇌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유물론이다.
세상을 유물론적으로 보면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것이다. 몸이 무너져 육체가 죽으면 육체에서 파생된 정신도 따라 죽는다고 보는 것이다. 육체가 없으니 정신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허무주의가 되는 것이다.
유물론은 단멸론과 동의어이고 또한 허무주의와 동의어이다. 유물론은 존재론에 기반하기 때문에 누군가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허무주의자가 되면 막행막식하기 쉽다. 늘 취한 상태로 있기 쉽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데 애써 힘들게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늘 술병을 가까이하고 늘 술에 취해서 산다. 좀 더 여유 있다면 마약을 할 것이다. 인생을 원타임으로 보는 것이다.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도덕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다. 당연히 봉사하는 삶을 살 필요도 없다. 심지어 지계하고 보시하는 자를 경멸하기도 할 것이다. 보시하면 공덕이 된다는 말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가로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보면 유물론, 단멸론이 되기 쉽다. 어떤 이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 했을 때 존재론이 되기 쉽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김성구 선생은 ‘사건’으로 보자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인간의 삶을 사건의 연속으로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이는 인간의 삶을 존재론으로 보지 않음을 말한다. 유물론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을 단지 물질로만 보았을 때 정신도 유물론적인 것이 된다. 생각은 뇌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뇌가 기능을 못하면 정신도 기능을 하지 못한다. 뇌사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건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왜 이런 지혜가 필요할까? 이는 나라는 존재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연기적 존재임을 말한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아님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나는 오온의 존재임을 말한다. 나는 물질로도 이루어져 있지만 물질과 별도로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도 이루어진 존재임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 오온만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오온에 집착된 존재만 있을 뿐이다. 오온의 생멸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생명은 반드시 조건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조건에 따라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고 상속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대하여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사건으로 이해하면 모든 것이 풀린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감각접촉에 따라 연기가 회전 되었을 때 사건의 연속이 된다. 이를 윤전 또는 윤회한다고 말한다.
윤회에는 순간윤회도 있고 일생윤회도 있다. 일상에서는 순간윤회가 적용된다.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팔지연기로 설명된다. 순간윤회는 일생윤회가 된다. 순간적 사건이 일생적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십이지연기로 설명된다. 이렇게 인생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다.
지금 나에게 자만이 일어난 것은 연기적 사건에 따른 것이다. 지금 나에게 시국에 대한 걱정이 일어난 것도 역시 연기적 사건에 따른 것이다. 사건은 일어날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사건이 일어날만 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늘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기둥에 자신을 묶어 두는 것이다. 그러면 가르침의 범주 안에서만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띠(sati)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기본은 연기의 가르침이다. 연기는 사건에 대한 것으로 행위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는 인과에 대한 것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말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2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인과법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를 ‘헤뚜(hetu)-빳짜야(paccaya)-팔라(phala)’라고 하여 ‘인(因)-연(緣)-과(果)’라고 말한다. 이는 사건이 연속해서 조건발생함을 말한다.
조건발생하면 조건소멸도 있을까? 연기의 역관을 보면 조건소멸이 있다. 그러나 발생연기에서는 소멸하는 데는 조건은 없다. 손뼉치는 소리로 알 수 있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다만 또다른 조건이 되어 사라진다. 그래서 사건은 조건발생하여 상속된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살다보면 최후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단절될 수도 있다. 죽는다고 끝날까? 삶을 사건의 연속으로 본다면 다음생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른바 무아윤회하는 것이다.
왜 무아윤회인가? 윤회의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건의 연속으로 되었을 때 어느 것이 나인지 알 수 없다. 사건의 연속인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어느 것이 나에 해당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그 무엇이 있다면 존재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있다고 여기면 존재론이 될 수밖에 없다. 존재론은 유물론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허무주의자들이 술나발 부는 이유가 될 것이다
늘 부처님 가르침에서 인생 해법을 찾고자 하는 학인이다. 어제 막식으로 인하여 불음주계를 어겼다. 오늘 새벽 통렬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사띠해도 힘이 없으면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빤냐완따 스님은 사띠와 함께 성찰하는 삶을 살라고 했을 것이다.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삼마상깝뽀를 말한다. 넥깜마상깝뽀, 아브야빠다상깝뽀, 아위힝사상깝뽀 이렇게 세 가지 바른 생각이다. 감각적 욕망을 여읜 사유, 분노를 여읜 사유, 그리고 폭력을 여읜 사유는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어떻게 바른 생각을 지혜로 영역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이는 바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억제, 버림, 노력, 수호로 이루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은 억제해야 하고, 이미 일어난 불선법은 버려야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법은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미 생겨난 선법은 수호해야 한다. 어제 일은 어디에 속할까?
마음을 다 잡기 위해서 경을 외우기로 했다. 상윳따니까야 ‘니다나상윳따’(S12)에 있는 ‘위방가숫따’(S12.2)를 말한다. 이를 ‘십이연기의 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십이연기가 무명에서부터 시작하여 노사에 이르기까지 열 두 고리에 대한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거의 천수경 정도 되는 긴 길이의 경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외우고자 한다. 이런 것도 사띠가 되고 성찰이 될 것이다.
2021-11-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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