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종교는 집단지성 산물이 아니다, K선생의 신대승과 인영사과(人營四科)비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13. 09:43

종교는 집단지성 산물이 아니다, K선생의 신대승과 인영사과(人營四科)비판

 

 

하나의 이론을 세우려면 이전 것을 비판해야 한다. 대승불교가 출현했을 때도 그랬다. 부파불교의 폐해를 지적하며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새로운 불교를 만들었다.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면 이전 왕조는 비판된다. 특히 역성혁명에서 그렇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조직이 개편되면 이전 조직을 문제삼는다. 종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나중에 출현한 종교는 이전종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다. 불교도 그렇다.

 

불교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바라문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종교라고 볼 수 있다. 바라문교의 아뜨만사상을 비판하여 무아를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바라문교의 사성계급을 비판하고 승가에서 계급의 평등을 말했다.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특허와 실용신안 출원도 그렇다.

 

회사 다닐 때 연구원이라면 의무적으로 특허 또는 실용신안을 내야 했다. 방업을 알면 쉽게 낼 수 있다. 어느 날 특허사무소 담당자는 요령을 알려 주었다. 핵심은 이전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실용신안으로서 인정받으려면 이전 것과 비교하여 어떤 점이 개선해야 하는지 비교설명이 있어야 한다. 특허로 인정받으려면 이전 것과 비교하여 없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자신의 이론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론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 것을 비판해야 한다. 이런 모습을 종종 유튜브에서 본다. 중론으로 초기경전을 해석하고 있는 L교수도 그렇다.

 

L교수는 니까야를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로 해석했다. 중론의 논리를 적용하여 중론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주석서와 충돌이 생겼다. 자신의 이론이 논장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대하여 격렬히 비난한다.

 

L교수 이론 계열의 스님들도 있다. L교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비슷한 식으로 이야기한다. 공통적으로 논장을 비판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은 잘못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오던 논장을 비판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자신들이 말하는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년동안 검증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아닌 비난을 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비판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학설을 내놓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기존학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학설의 문제점을 비판하여 성립된 것이 새로운 학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신약에서 구약으로 전개된 것도 이전 것을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경우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되었다.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을 비판하고 성립되었다. 이슬람교 역시 기존종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같은 뿌리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새로운 종교는 늘 출현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종교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대부분 기존 종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다. 마치 오늘날 특허나 실용신안 출원을 하는 것처럼 이전 기술과 비교하여 다른 점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유튜브에서 보고 있는 K선생의 불교관도 이와 다르지 않다.

 

K선생의 신대승론

 

유튜브에서 본 K선생은 달변이다. 그러나 K선생의 불교관을 보면 나가도 너무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성공한다면 아마 교주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K선생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많이 아는 사람이다. 미얀마에서 단기출가하여 비구로 산 적도 있다.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초기불교에 그치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중론, 유식, 여래장, 선불교 등 갖가지 사상을 섭렵한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선생이 신대승불교을 이야기하고 있다.

 

K선생의 신대승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대승에서 더 진일보한 것이다. 기존 대승불교는 2천년전에 일어난 것으로 그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시점에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를 신대승이라고 했다.

 

K선생의 신대승론에 따르면 타종교의 장점도 받아 들이자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좋은 예이다. 기독교는 복음주의를 채택하여 크게 성공했다고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신약을 말한다. 엄격한 율법에 근거한 구약에서 사랑이 넘치는 신약으로 바뀐 것은 복음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K선생이 말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인과법이 무시된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율법시대라고 볼 수 있는 구약의 인과법에서 해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도 신약에서와 같은 복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K선생의 불교복음론에 따르면 초기불교는 마치 구약의 율법시대와 같은 것이다. 대승불교는 신약의 복음시대와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런데 기독교는 성공했고, 불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불교의 복음은 대승의 출현으로 보고 있는데 절반만 성공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 반을 자신이 성공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 신대승불교운동이라고 했다.

 

K선생의 신대승론을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도 비판된다. 불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사성제도 비판이되고, 십이연기도 비판이 된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불교안에서는 진리가 되지만 불교 바깥에서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K선생의 인영사과(人營四科)

 

K선생의 신대승론에 따르면 불교는 반쪽짜리밖에 안된다. 출세간에서나 통용되는 불교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세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인영사과(人營四科)라는 것이다.

 

K선생이 주장하는 인영사과는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르는 것이다. 이를 신대승이라고 했는데, 이 이론이 성공을 거두면 아마 신대승불교의 창시자가 될지 모른다.

 

인영사과는 모두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출세간에 대한 것으로는 수행과 이타과 있고, 세간적인 것으로는 배능과 경인이 있다. 출세간에 대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한 것으로 상구보리(修行)와 하화중생(利他)을 바탕으로 한다. 세간적인 것은 세속법으로서 능력을 배양(倍能)하고 남과의 경쟁(競人)하는 것을 말한다.

 

 

K선생은 자신이 만든 인영사과에 대하여 유튜브를 이용하여 보급하고 있다. 추종자가 많아지면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세력화가 되면 새로운 불교운동이 될지 모른다. 반만 완성된 대승불교에 대하여 출세간과 세간을 아우르는 인영사과를 도입하면 새로운 대승불교운동, 즉 신대승불교운동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K선생은 출세간과 세간을 아우르는 인영사과의 논리로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숙명적인 것인지 모른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면 기존 이론과 상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전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있기 때문이다.

 

K선생은 안과 밖의 불교를 말했다. 부처님은 안의 불교만을 설했다는 것이다. 출세간적 불교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현대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 밖에 불교도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세속법으로서 배능과 경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어서 설명하고 있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K선생에 따르면 세간에서는 세간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처님은 출세간법만 설했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나의 원인으로 돌렸을 때 이를 출세간법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원인이 사회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만 원인으로 돌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이를 취직 못한 젊은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K선생의 세간법에 대한 것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초기경전을 다 읽어 보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출세간법 뿐만 아니라 세간법도 이미 다 설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업과 업보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정견에 대하여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이는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을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른 마흔의 경’(M117)을 보면 출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 사성제라고 했고, 세간적 정견에서는 업이 자신의 주인인 것을 아는 업자성정견을 설했다. 먼저 출세간적 정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마음,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 거룩한 길을 성취한 자에게 거룩한 길을 닦은 결과로서 지혜, 지혜의 능력, 지혜의 힘, 탐구의 깨달음 고리, 올바른 견해가 있는 고귀한 길의 요소가 생겨나는데, 이것들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9)

 

 

부처님이 말씀하신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출세간적 정견의 특징은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출세간적 정견은 번뇌를 소멸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한다. 팔정도 수행을 하여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하면 출세간적 정견이 성취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안만 설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밖에 대해서도 설했다. 부처님은 세간에 사는 재가자들을 위해서도 설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간의 정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는 어떠한 것인가? ‘보시에는 공덕이 있다. 제사의 공덕도 있다. 공양의 공덕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삶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곧바로 알아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착하고 덕 있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상에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8)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간적 정견은 번뇌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하는 삶에서의 정견을 말한다. 그것은 업과 업보에 따른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선인선과와 악인악과에 대한 것이다.

 

세간에서는 철저하게 업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라는 업자성정견(kammassakattā sammādiṭṭhi)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에는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두 가지가 있다.

 

안과 밖을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은 안과 밖을 설했다. 안으로는 사성제를 설했고, 밖으로는 업의 가르침을 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안팍으로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안의 가르침, 즉 출세간적 가르침만 설했다고 말하면서 배능(倍能)’경인(競人)’이라는 세간법을 만들어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할까?

 

K선생의 신대승론에 대하여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초기경전에 대한 무지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출세간법으로서 사성제를 설했고, 세간법으로서 업의 가르침을 설했음에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방대하다. 45년 설법한 것이 팔만사천법문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어쩌면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45년 동안 매일 설법했다면 팔만사천법문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팔만사천법문은 오늘날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로 전승되어 왔다.

 

빙대한 니까야를 다 읽는 것은 원력을 필요로 한다. 몇 년에 걸쳐서 한번 다 읽는 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걸려도 다 익히지 못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 가르침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가르침, 자비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우정의 가르침 등 실로 다양한 가르침도 있다. 병든 자를 위한 환우의 가르침도 있고, 부부간의 가르침도 있고, 심지어 장사나 사업을 잘 하기 위한 사업의 가르침도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출세간적 가르침만 설했다고 단정하면서 세간법을 추가하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은 안팍으로 가르침을 설했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로 하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D16.50)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설법한 것에 대하여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It.121-12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설한 경이나 응송 등 구분교의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임을 말한다. 여기에 더하고 뺄 것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안과 밖의 가르침을 설했다. 부처님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출세간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번뇌있는 삶의 세간적 가르침도 설한 것이다.

인류의 집단지성을 불교에 접목하자는데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이라거나 미완성된 것이라고 하여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내었다. 시대에 따라 새로운 불교가 나온 것이다.

 

새로운 불교가 출현할 때 마다 이전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K선생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주창하는 신대승불교를 위하여 초기불교는 비판대상이 되었다. 반쯤 완성되었다는 대승불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K선생은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맞는 불교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케묵은 듯한 낡은 불교로는 종교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도 도입하고, 공자의 예악도 도입하자고 말한다. 이를 집단지성으로 설명한다.

 

K선생에 따르면 인류역사의 발전에 대하여 집단지성으로 보고 있다. 종교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서 탈피하여 바깥도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다가 기독교의 복음도 집어넣고 또한 예술과 과학도 접목해서 종교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새로운 종교가 생겨나야 함을 역설한다. 인류의 집단지성을 불교에 도입하여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신대승불교라고 했다.

 

K선생의 신대승에 대한 견해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러나 이미 다 설해져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안팍으로 다 설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출세간적 것만 것 아님을 말한다. 그럼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마치 미완성된 것 또는 불완전한 것으로 보아 세간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불교를 만들자는 것은 자만이다.

 

K선생은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 엄연히 업의 가르침이 있다. 이는 세간법에 대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불교를 주장한다면 이는 양심을 속이는 것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완성된 것

 

세상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있을 때 중지를 모으면 해결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집단지성을 불교에 도입하여 새로운 불교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는 멀어진 새로운 불교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시도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 짧게 끝났다. 뒤이어 나온 이론의 비판대상이 되어서 사라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르침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더하고 뺄 것도 없다.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불완전해지고 미완성된 것으로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르침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부처님 당대가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 후대로 갈수록 하나 둘 잊혀져 가거나 새로운 것이 추가되어서 점차 변질되었다. 나중에는 전혀 다른 불교가 되어서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무상, , 무아, 부정에 대하여 상, , , 정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가 아니라 퇴보의 역사가 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불교운동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운동 역시 한때 반짝 인기를 끌다가 어느 때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오늘날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 부처님이 현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부처님의 말씀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으로 완성된 것이다.

 

 

2021-06-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