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어제 저녁부터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시국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시사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덜 가지려고 노력한다. 너무 가까이하지도 않고 너무 멀리 하려 하지도 않으려 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원칙을 고수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시국을 보면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렇게 불안하고 답답하고 근심과 걱정을 하게 하는가? 가만 따져 보니 ‘내뜻대로’ 되고자 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내뜻대로 되어야 하나 그렇게 되지 않아서 불만족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상대진영에 대한 불신과 강한 반감이 깔려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언제나 그렇듯이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작용이 크면 반작용도 크다. 사활을 건 싸움에서 누군가는 승리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배자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다만 옛날과 달리 칼과 총만 들지 않았을뿐이지 사실상 전쟁과도 같다. 과연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추미에 장관 페이스북 글을 다음과 같이 옮겨 보았다.
“검찰 독립성의 핵심은 힘 있는 자가 힘을 부당하게 이용하고도 돈과 조직 또는 정치의 보호막 뒤에 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검찰권 독립과 검찰권 남용을 구분하지 못하고, 검찰권의 독립 수호를 외치면서 검찰권 남용의 상징이 되버렸습니다.
인권침해를 수사해야하는 검찰이 오히려 인권침해를 저지르고, 수사가 진실과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짜맞추기를 해서 법정에서 뒤집힐 염려가 없는 스토리가 진실인양 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혹한 수사를 하고, 미리 수사의 방향과 표적을 정해놓고 수사과정을 언론에 흘려 수사분위기를 유리하게 조성하고 어느 누구도 수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언론의 폭주를 제어하지도 못하고, 이미 혐의자는 법정에 서기도 전에 유죄가 예단되어 만신창이 되는 기막힌 수사활극을 자행해 왔습니다.
그런 가혹한 표적수사를 자행하고도 부패척결, 거악 척결의 상징으로 떠올라 검찰 조직내에서는 승진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검찰 조직 밖으로 나가서도 거액의 수임료를 받고 선임계를 내지 않고 변론을 하는 특혜를 누려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전관과 현직이 서로 챙기며 선배와 후배가 서로 봐주는 특수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스스로 거대한 산성을 구축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서운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직 대통령도, 전직 총리도, 전직 장관도 가혹한 수사활극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무소불위의 대한민국 검찰이 힘 가진 자에 대해서는 꼬리곰탕 한그릇에 무혐의를 선뜻 선물하고, 측근을 감싸기 위해서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하고, 막강한 경제권력과 언론권력을 앞에서는 한없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수사와 기소의 잣대를 고무줄처럼 임의로 자의적으로 쓰면서 어떤 민주적 통제도 거부하는 검찰입니다.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다면서 정치적으로 수사표적을 선정해 여론몰이할 만큼, "검찰당"이라 불릴 만큼 이미 정치세력화된 검찰이 민주적 통제 제도마저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이 백척간두에서 살떨리는 무서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를 혁파하지 못하면 검찰개혁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의 소임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검찰을
인권을 수호하는 검찰로 돌려 놓을 것입니다. 제식구나 감싸고 이익을 함께하는 제 편에게는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자행해 온 검찰권 행사를 차별없이 공정한 법치를 행하는 검찰로 돌려 놓을 것입니다.
흔들림없이 전진할 것입니다. 두려움없이 나아갈 것입니다.
동해 낙산사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님 영전에 올린 저의 간절한 기도이고 마음입니다.”
(추미애 장관, 2020년 12월 3일 페이스북)
시대에는 흐름이 있다.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시대의 흐름에 저항해 보지만 시대의 거센 흐름에 휩쓸려 가고 말 것이다.
승리를 예감한다. 그것도 철저한 승리가 될 것이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드는 승리를 말한다. 이는 반대진영의 처절한 패배를 의미한다. 최근 30-40년 현대사에서 계속 패배하는 역사를 살았지만 그래도 승리한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반작용으로 인하여 일보후퇴를 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보전진의 위치에 와 있다.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할 때
케세라세라(Que sera, sera). 이 말에 대하여 흔히 “될대로 되라.”라고 자포자기의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말은 긍정적인 말이다. 영어로 표현된 구절을 보면 “Whatever will be will be.”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무엇이든 될 대로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시 해석하면 “이루어지게 될 일은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라는 뜻이다.
요즘 흔히 하는 말 중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근심하고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마치 드라마보듯이 지켜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어차피 될 일은 되게 되어 있고,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하고 근심걱정으로 가득할 때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집에서 TV나 인터넷,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더욱더 답답한 마음이 된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걱정을 해서 걱정을 해소한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밖에 나오면 일시적으로 답답한 마음이 해소된다.
이른 아침 밖으로 나오니 세상은 활력이 넘친다. 버스정류장에는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총총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너른 대로에는 자동차들이 손살같이 달린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르고 햇살이 널리 퍼진다. 오랜만에 보는 아침햇살이다.
업의 가르침을 믿는 불교인으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불교인이다. 무엇보다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 불자이다. 또한 내생과 윤회를 믿는 불자이기도 하다.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내생과 윤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금 여기에서 행위가 미래 결과로 나타난다는 엄연한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거부한다.”(A3.135)
부처님은 십이연기, 사성제, 팔정도와 같은 근본가르침만 설한 것이 아니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도 설했다. 이는 세속적인 정견이다. 윤회하는 삶속에서 적용되는 바른 견해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팔정도에서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업의 가르침이 왜 정견일까? 이는 사성제를 두 파트로 나누어 설명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세간적 정견이고, 집성제와 멸성제는 출세간적 정견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세간적 정견은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세속에서 윤회하는 삶속에서 적용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속적인 정견을 적용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삼세제불도 업의 가르침을
놀라운 것은 과거 출현했던 부처님들도 업의 가르침을 설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래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할 것이고”(A3.135)라 하여, 미래불도 업의 가르침을 설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세의 부처님은 어떨까? 경에 따르면 “현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있고”(A3.135)라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업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음을 말했다.
법구경 183번 게송을 보면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라는 게송이 있다. 이 게송은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의 가르침이다.”(Dhp.183)라는 뜻이다. 여기서 ‘모든 깨달은 님(諸佛)’은 삼세제불을 뜻한다.
과거, 미래, 현재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악하고 불건전한 것(papa)’을 짓지 말고 ‘착하고 건전한 것(kusala)’을 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계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흐름의 든 길에서 거룩한 길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오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출세간의 길을 말한다. 사성제에서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삼세제불은 업의 가르침도 설했다. 이는 출세간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세간적 가르침도 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로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는 세간적 가르침과 출세간적 가르침이 합쳐져 있는 것이다.
출세간적 가르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간적 정견을 알아야 한다. 그 세간적 정견은 다름아닌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임(kammassakattā sammādiṭṭhi)을 말한다. 업(kamma)이 자신의 것(sakattā)임을 아는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를 말한다.
업이 자신의 것임을 안다면 함부로 행위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업자성정견을 모른다면 막행막식할 것이다. 행위의 과보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힘이 있다면 힘을 행사하고 싶어질 것이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업의 법칙에 따르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를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서 찬 공기를 쏘이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 밀폐된 방안에서 뉴스를 보고 있는 것 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다음으로 “케세라세라”하는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어차피 될 일은 되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불안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의 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면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고 아는 것이다.
그래도 불안하고 답답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구나 원한 맺힌 사람이라면? 이럴 경우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A5.161)라고 했다.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신경을 끊으면 된다.
그래도 불안하고 답답하고 근심걱정으로 가득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후의 방법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A5.161)
최후의 방법은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고 증오해 보지만 결국 자신만 손해인 것을 알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려 하지 않으려 하지만 여의치 않을 때 최후의 방법은 ‘업이 자기자신의 주인(kammassakattā)’ 임을 아는 것이다.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2020-12-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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