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것은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니라고 한다. 마하야나에서는 불이사상을 말한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승과 속은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적으로 적용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간에는 세간의 진리가 있고, 출세간에는 출세간의 진리가 있다. 이를 용수의 중론에서는 속제와 진제로 구분한다. 니까야에서도 정견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M117)에 따르면, 번뇌가 있는 정견이 있고, 번뇌가 없는 정견이 있다. 전자는 육도를 윤회하는 세간적 삶 속에서 적용되는 정견으로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출세간의 도를 지향하는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으로 번뇌를 소멸하는 삶에 대한 것이다. 번뇌의 유무에 따라 정견도 두 개가 되는 것이다.
세간에서 살고 있다. 이는 재가자로 살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마음은 늘 출세간을 지향한다. 이를 심출가(心出家)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몸은 출가했지만 마음은 늘 세간을 향하고 있다면 몸만 출가한 신출가(身出家)라 해야 할 것이다.
심출가이든 신출가이든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중생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꽃의 비유를 들었다. 연꽃이 물에서 자라지만 흙탕에 물들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살은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말한다. 세상사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법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을 때 방관한다면 악의 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종종 시국과 관련된 글을 쓴다. 이럴 경우 비난받는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해서일 것이다. 이럴 때 듣는 말은 “부처님법을 이야기 하려면 정치이야기 하지 마세요.”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자리이타(自利利他)’에 대한 것이다.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고 타인에게도 이익이 되면 서로 좋은 것이다. 시국이나 시사관련 글을 쓰는 것은 자리이타적 관점에서 쓰는 것이다. 검찰개혁과 공수처설치는 국민들 대다수가 바라는 것이다. 국민들 염원을 담아서 검찰개혁과 공수처설치와 관련된 글을 여러차례 썼다. 이 밖에도 특정정당에 대해서도 썼고 특정정치인에 대해서도 썼다. 큰 틀에서 본다면 자리이타에 대한 것이다. 만일 자리(自利)에 대한 것만 쓴다면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세상에 비난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처님도 비난받았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Dhp.227)
말이 많으면 말이 많다고 비난한다.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비난한다. 정치인들은 욕을 먹는 사람들이다.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르다 보니 비난도 하고 칭찬도 한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심해진다. 그래서 대통령이 욕을 가장 많이 먹는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부처님도 욕을 먹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들이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DhpA.III.325-329)라고 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판한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비난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자는 자리이타행을 한다. 현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행위를 하기 때문에 건전한 비판이 된다. 그래서 “현자나 지혜로운 자가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자는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야 한다.”(DhpA.III.325-329)라고 했다.
2020-12-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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