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19 자비의 식당순례 7탄, 사골떡만두국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도 먹지만, 반대로 먹기 위해서 살기도 한다. 맛에 탐착된 사람들이다. 끼니 때가 되면 “오늘은 뭘 먹어야 할까?”라며 행복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대부분 이렇게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캡슐하나를 주면서 “이것 하나만 먹으면 한끼가 해결됩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대부분 거절할 것이다. 먹는 재미를 빼앗아 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허기지면 먹고, 먹고 나면 포만감으로 행복을 느낀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코로나19직격탄을 맞은 식당
어제 점심 때가 되어서 밖으로 밥 먹으로 나갔다. 사무실 주변 식당을 말한다. 코로나19 시기를 맞이하여 식당순례를 하는 것이다. 원칙이 있다. 한번 간 식당은 다시 가지 않는 것이다. 명학역과 만안구청, 그리고 아트센터를 잇는 삼각벨트안에 있는 식당을 한번씩 가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맛있는 맛집이라 해도 다 돌기 전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를 자비의 식당순례라고 이름해 보았다.
이번에는 떡만두국집에 갔다. 본래 칼국수가 주종목이다. 홀은 무척 넓다. 아마 삼각벨트 안에서 가장 큰 집일 것이다. 테이블이 60개 가까이 되니 200명 이상 동시 식사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부근 보험사나 자동차 판매회사 등에서 단체로 식사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
칼국수집은 코로나19직격탄을 맞았다. 금요일 점심 때 고작 다섯 테이블 정도가 찼을 뿐이다. 점심시간이 대목임에도 12시대 황금타임에 식사하는 사람들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너른 식당에서 평소보다 일이십프로 밖에 식사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태로 올 한해 버텨 왔을 것이다. 앞으로 육개월, 일년 이렇게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떡만두국을 시켰다. 매번 밥 먹는 것에 질려서 색다른 것으로 먹고자 선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사골떡만두국’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먹어 보아서 그 맛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매우 오래 되었다. 2007년 사무실 입주할 때도 있었는다. 육개월 또는 일년이 멀다하고 간판이 바뀌는 시대에 장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맛에 있을 것이다.
칼국수집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자꾸 새로운 종목이 추가되는 것을 보니 칼국수만으로 한계에 직면한 것 같다. 칼국수, 왕만두, 보쌈, 떡만두국, 샤브샤브 등 메뉴가 다영하다. 이렇게 문어발식으로 종목이 많아진다는 것은 미래가 밝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사골떡만두국은 먹을 만하다. 무엇보다 부드럽다. 밥을 먹으면 딱딱한 느낌이어서 부담감이 있다. 술술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여기에 겉절이 김치가 간을 맞추어 준다. 보리밥도 조금 주어서 후식으로 먹을 만하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몸에 대한 공양(供養)
오늘도 내일도 먹는다. 죽는 순간까지 먹어야 할 것이다. 밥숫갈 놓으면 죽음을 의미한다. 죽는 순간까지 숫가락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먹는 것은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살기 위한 생존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먹어야 신체를 지탱한다. 그런데 이 몸은 내 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몸에서 살아 가는 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몸의 세포수만큼이나 또 다른 생명체들이 살고 있음을 말한다. 지금 섭취한 자양분이 나의 신체를 지탱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생명공동체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먹는 행위는 어쩌면 성스러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먹는 것에 대하여 ‘공양(供養)’이라고 말한다. 절에 가면 “공양하셨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이는 물질적 보시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식사를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몸에 대한 공양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공양이기도 하지만 몸을 숙주로 하여 살아 가는 타자생명공동체에게 공양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탐욕으로 먹는다면
먹기 위해서 살기 보다는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먹는 것에 집착하고 먹는 것을 즐긴다면 윤회하는 삶이 된다. 왜 그런가? 욕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탐욕으로 먹는다면 윤회하는 삶이 됨을 말한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탐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집착은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집착하게 되면 업으로서 태어남을 유발하게 된다. 음식에 집착한다면 이는 윤회의 원인이 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S12.11)
부처님의 식사(四食)에 대한 가르침이다. 식사에는 네 가지가 있음을 말한다. 물질의 식사, 접촉의 식사, 의도의 식사, 의식의 식사를 말한다. 오온에서 지각만 빠진 것이다. 오온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식사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사는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서
물질의 식사가 있다. 밥을 먹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면 밥을 왜 먹는가? 신체를 지탱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허기가 지면 밥을 찾는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집착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집착된 존재임을 말한다. 이렇게 여기 있게 된 것은 몸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갈애를 일으킨다.
사람들은 매일 네 가지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매일 물질의 식사, 접촉의 식사, 의도의 식사, 의식의 식사를 할 수밖에 없다. 하루도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하루도 접촉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루도 의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단 하루도 의식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우리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나는 하루도 밥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하루도 접촉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래서 누군과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요즘 같이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에스엔에스(SNS) 시대도 접촉의 식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 식사라고 할 수 있다.
윤회의 땔감 우빠다나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매일 네 가지 식사를 한다. 그런데 네 가지 식사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집착이 되기 때문에,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서 윤회하게 된다. 이때 네 가지 식사는 윤회의 땔감이 된다. 왜 그런가? 식사 또는 자양을 뜻하는 아하라(āhāra)는 말은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upādāna)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집착은 존재를 윤회하게 만든다. 그런데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는 ‘grasping; attachment’이라는 뜻 이외에도 연료를 의미하는 ‘fuel’의 뜻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집착이 윤회의 땔감임을 말한다.
빠알리 사전을 보면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에는 ‘grasping; attachment’이라는 뜻 이외에도 연료를 의미하는 ‘fuel’의 뜻도 있다. 땔감으로서 우빠다나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도 확인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땔감 열 짐, 땔감 스무 짐, 땔감 서른 짐, 땔감 마흔 짐으로 큰 불꽃더미가 타오를 때, 어떤 사람이 때때로 마른 풀들을 던져 넣고 마른 쇠똥을 던져 넣고 마른 나무를 던져 넣으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러한 연료와 땔감을 가진 큰 불꽃더미는 오랜 시간 동안 타오를 것이다.”(S12.52)
여기서 땔감은 윤회의 땔감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큰 불꽃더미는 세 가지 윤회세계[三界]를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한다. 그런데 삼계는 공통적으로 땔감이 있어서 불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불을 지피는 자는 어리석은 범부를 뜻한다.
어리석은 범부는 매일 네 가지 식사를
어리석은 범부는 매일매일 불을 때고 있다. 이는 네 가지 식사에 따른 것이다. 매일매일 물질의 식사, 접촉의 식사, 의도의 식사, 의식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매일매일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인데, 여기서 자양분은 윤회의 땔감임을 말한다. 매일 사식을 한다는 것은 윤회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어리석은 범부는 매일 네 가지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훨훨 타오르는 불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그가 불꽃에 연료를 집어넣는 것은 갈애 때문에 여섯 가지 감역을 통해서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Srp.II.8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가 회전하고 있음을 말한다. 십이연기가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의 삶은 윤회하는 삶이다. 이는 순관적 십이연기를 말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끝없는 순환은 땔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가 끊임없이 갈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취온적 존재는 매일매일 네 가지 식사를 하는데, 이 네 가지 자양분이 윤회의 땔감이 되어서 존재를 끊임없이 윤회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불꽃더미가 증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업을 증가시킴으로서 윤회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생성시키는 것과 같다.”(Srp.II.82)라고 했다.
삼계가 불타고 있는데
법화경 비유품에 삼계화택의 비유가 있다. 운허스님이 엮은 ‘묘법연화경’(동국역경원)을 보면 “이 집은 벌써 맹렬한 불길에 싸여 타고 있으니, 저 자식들이 지금 나오지 아니하면 반드시 불에 타게 되리라.”(78쪽)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은 화택의 비유는 아마도 니까야를 모티브로 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니까야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것에 대하여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집착이라는 윤회의 땔감이 있어서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삼승은 방편이고 일불승만이 진실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로 든 것이다.
불은 땔감이 떨어지면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최초의 연료가 다 떨어져도 다른 것이 채워지지 않는 불꽃더미는 땔감도 없고 연료도 없어 꺼져 버릴 것이다.”(S12.5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수행자가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을 목표로 하는 경지에 드는 때이다.”(Srp.II.82-83)라고 했다.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부처님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하여 그치지 않았다. 만약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그것으로 그쳤다면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 아마도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대안을 제시했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알려 준 것이다. 사식에 대한 것도 그렇다.
물질의 식사(kabaḷikāra-āhāra)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아들고기의 비유’로 알 수 있다. 사막에서 부부부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은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음식을 먹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다섯 가지 감역의 쾌락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알려질 때 그로인한 고귀한 제자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그 결박이 소멸된다.”(S12.63)라고 했다. 이는 오욕락에 대한 것이다.
오욕락의 대상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 즉 안, 이, 비, 설, 신, 의의 대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각이 있다. 혀를 통해서 일어나는 맛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맛에 대한 갈애는 다섯 가지 감관에서 일어나는 갈애와 같다.”(Srp.II.11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먹는 것에 집착했을 때 오욕락으로 먹는 것과 같음을 의미한다.
여기 음식이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접할 때 어떤 마음으로 먹어야 할까? 아무 생각없이 맛에 대한 갈애로 먹으면 연기가 회전되어서 윤회하는 삶이 된다. 그래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발우에 놓인 한 덩어리의 음식과 관련해서 일어난다.”(Srp.II.110)라고 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계율로 먹고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으라고 했다.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먹는 것이 계율로 먹는 것이다. 이 음식이 여기 오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먹는 것이 사마타로 먹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알아차림 하며 먹는 것이 위빠사나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들 때 사띠하고, 음식을 입에 넣을 때 사띠하고, 음식을 씹을 때 사띠하고, 씹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 사띠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수행이다. 물질적 식사는 아들고기의 비유를 먹는 심정으로 하라고 했다.
상처 난 피부가 닿는 느낌으로
접촉의 식사(phassa-āhāra)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상처의 비유’로 알 수 있다. 상처난 부위가 벽에 부딪쳤을 때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 가죽이 찢겨진 소가 의지해서 서 있는 곳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접촉의 자양분은 이와 같이 여겨져야 된다고 나는 말한다.”(12.63)라고 했다.
누구나 접촉의 식사를 하고 있다. 물질적 식사에 만족하지 않고 접촉의 식사를 바란다. 그래서 접촉의 식사를 설명할 때 밥상의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
어느 집에서 일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고 말했다. 접촉의 식사도 식사임을 말한다. 그런데 접촉의 식사를 하면 마치 상처난 부위를 벽에 문지르는 것처럼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금방 잊어버리고 매번 접촉의 식사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접촉의 식사는 피부의 상처가 벽에 닿는 것과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숯불화로로 끌려 가는 것처럼
의도의 식사(manosañcetan-āhāra)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숯불화로의 비유’로 알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힘센 두 남자에 의해 두 손을 잡혀 숯불 가까이 끌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 사람의 의지, 그 사람의 희망, 그 사람의 소원과는 거리가 먼 것일 것이다.”(12.63)라고 했다.
의도는 의지 작용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의도적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하는 것을 말한다. 악행에 대한 과보가 익으면 괴로움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하여 강제로 숯불화로에 데이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의도의 식사는 강제로 숯불화로에 끌려 가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백 개의 창으로 찔리는 것처럼
의식의 식사(viññāṇa-āhāra)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창의 비유’를 들었다. 왕이 흉악한 도둑을 백 개의 창으로 찌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너희들은 가서 아침에 그 사람을 백 개의 창으로 찔러라.”(12.63)라고 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점심 때 백 개의 창으로 찔러도 죽지 않았다. 저녁 때 백 개의 창으로 찔러도 죽지 않았다.
창의 비유는 서서히 죽게 만드는 잔인한 형벌을 말한다. 여기서 왕은 ‘업’을 말하고, 도둑은 ‘범부’를 말한다. 삼백개의 창은 ‘재생의식’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왕이 처벌하는 것은 범부가 업에 의해서 다시 태어남으로 끌려가는 것을 말하고 창에 찔리는 것은 다시 태어나서 겪는 윤회의 고통이다.”(Srp.II.113)라고 했다.
한 개의 창으로 찔려도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하물며 백 개의 창에 찔리면 그 고통은 어떨까? 그것도 아침, 점심, 저녁 때마다 백 개의 창으로 찔리는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의식의 식사’에 대하여 “의식의 자양분이 완전히 알려지면 명색도 완전히 알려진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명색은 의식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함을 말한다. 의식의 식사를 하면 의식을 자양분으로 하여, 즉 의식을 땔감으로 하여 계속 재생하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의식의 식사를 할 때는 항상 창에 찔리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오늘도 먹는다마는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삼시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먹는다면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먹는 것이 몸을 지탱하듯이. 탐욕으로 먹으면 윤회의 땔감이 됨을 말한다. 그런데 윤회의 땔감에는 반드시 물질적 음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접촉의 식사도 있고, 의도의 식사도 있고, 의식의 식사도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 단지 탐욕으로 먹으면 불선업이 된다. 불선업은 불선과보를 받기 때문에 괴로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는 아들고기를 먹는 것처럼 먹으라고 했다. 먹는 것을 즐기지 말라는 말과 같다. 과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흘러간 유행가 중에 “오늘도 걷는다마는”라는 가사가 있다. 이를 패러디하면 “오늘도 먹는다마는”가 될 것이다. 점심 때가 되었으니 먹어야 한다. 배가 고픈 것을 보니 밥을 먹어야 겠다.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할까?
2020-12-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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