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보다 겁나는 소상공인의 한숨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14. 08:37

바이러스보다 겁나는 소상공인의 한숨


오늘 점심약속이 무산되었다. 인천친구와 점심먹기로 했다. 인천 부평에 가서 점심 사주려고 했다. 가는 김에 어머니 드시라고 귤이라도 한박스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의 강력한 권유로 인하여 그만 두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천명이 넘은 상황에서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임에도 사무실에 갔다. 집에만 있으면 게을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무실 활용의 목적이 크다. 하루 이만원 꼴 들어가는 공간을 놀려 둘 수 없다. 일단 가서 앉아 있으면 글이라도 쓴다.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밀린 작업도 할 수 있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명상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일인사업자에게 주말은 없다. 평일과 다름없는 똑같은 일상이다.

컴퓨터 한대로 벌어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늘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컴퓨터는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인식된다. 오래 다루다 보니 능숙해졌다. 그러나 고장나면 올스톱된다. 오늘 아침에 그랬다. 바탕화면이 흑색으로 변하고 문서파일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원인은 윈도우 버전에 있다. 구버전이라 서비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수리기사를 불러야 한다. 출동하면 비용이 든다.

 


인천친구가 생각났다. 컴퓨터 수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이다. 카톡을 보내서 현상을 설명했다. 팀뷰어를 깔으라고 해서 하라는 대로 했다. 친구는 원격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과정에서 전화한통 없이 문자로만 소통했다.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마워서 점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코로나 확진자가 천명이 넘어간 이 시점에서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차도 많지 않다. 차가운 겨울날씨에 코로나까지 절정이어서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듯 고요하다. 도시의 적막은 두렵고 공포스럽다. 본래 도시는 늘 움직이는 것들로 인하여 활력이 넘친다. 그러나 사람들이 집 안에 있을 뿐 밖에 나오지 않으면 유령의 도시처럼 보인다. 이런 날 장사가 될 리 없다. 강력한 거리두기로 인하여 약속이 취소될 정도가 된다면 소상공인들은 직격탄을 맞는다.

과연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천을 찍었으니 전고점을 돌파한 것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도 한번 상승탄력을 받으면 왠만한 악재에서도 계속 치고 올라가려는 속성이 있다. 코로나 확진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으로 일일확진자가 이천명 또는 삼천명이 될지 모른다고 한다. 그 정도가 되면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안전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매월 고정적으로 안정적 수입이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영향받지 않는 계층이다. 장사가 안되서 애태우는 소상공인들과 대비되는 삶이다. 마치 소치는 다니야를 연상케 한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움막의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tn.18)


소치는 다니야는 부호의 아들이다. 우기를 맞이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이다. 오늘날 중산층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더구나 하늘을 향해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라고 말한다. 안락한 집에서 안정적 수입원으로 살아가는 중산층이 코로나여, 올테면 오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 대한민국은 기로에 서 있다. 일일확진자 천명이 되었다. 더 확산될지 꺽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비관적이다. 전고점을 돌파한 추세선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 늘어 나리라고 예상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멈출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코로나19는 예고없이 찾아온 불청객이다. 불청객은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본래 이 세상의 주인은 바이러스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주인행세를 해왔다. 어쩌면 인류는 지구에서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환경을 파고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등 해로운 짓만 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공업(
共業)으로 보아야 한다. 공업이라면 고통을 함께 감내해야 한다. 중산층이 철옹성을 지어 놓고 안락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불만을 사게 될 것이다. 한편에서는 무너져 가고 있는데 무풍지대에서 산다면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를 이겨내는 것도 좋지만 고통도 분담해야 한다. 어떻게 분담하는가?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 한다.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자발적 가난과 자발적 결핍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소상공인들의 한숨이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소상공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어야 한다. 때 되면 꼬박꼬박 월급받는 정규직, 때 되면 또박또박 연금수령하는 고액연금생활자, 그리고 그리고 때 되면 따박따박 임대료 챙기는 건물주는 소상공인들과 함께 고통분담 해야 한다. 공업중생이다. 소상공인들이 무너지면 모두 다 무너진다. 인천친구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2020-1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