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암송하는 즐거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6. 09:21

 

암송하는 즐거움

 

 

암송하는 즐거움이 있다. 애써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송한다. 오늘 아침 어제 외운 빠알리팔정도경을 암송했다. 입으로 나직이 소리내며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암송하면 10분대이다.

 

방에서 거닐면서 암송했다. 이번에는 앉아서 암송했다. 암송하다 보면 한줄이 빠진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토요일임에도 사무실로 나와서 다시 한번 암송했다. 모두 세 번 암송하니 더욱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암송을 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충만된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자존감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취감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나도 이런 어려움을 겪고 해냈다.”라는 강한 성취감을 말한다. 또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따른 충만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부처님의 언어인 빠알리어로 암송한다는 것은 부처님과의 교감을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암송했을 것이다. 불교역사가 시작된 이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입에서 입으로 암송하며 전승해왔다. 현재도 암송하고 있고 미래도 누군가 암송할 것이다. 이렇게 암송된 가르침은 파워가 있기 마련이다.

 

암송하여 천상에 태어난 존재들도 있을 것이다. 천상의 하루는 인간의 백년 보다 많다고 한다. 색계나 무색계의 존재는 겁단위로 살기 때문에 인간의 백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가르침을 암송하면 먼저 암송한 존재들과 공명(共鳴)이 일어날지 모른다. 경전을 독송할 때 원어로 해야 하는 이유라 본다.

 

어제 빠알리팔정도경을 외운 기념으로 글을 썼다. 팔정도 외우기를 권유한 빤냐완따 스님에게도 문자메세지를 보내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스님은 답신을 보내왔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지심귀의 하오며,

장대비가 줄창 내리던 지난 여름,
(
수박 한 통이 들어있는)
여행용 트렁크를 끌면서 찾아온
초면의 거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ㆍㆍㆍ ㆍ

<
팔정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고따마 붓다께서

바라나시
사슴 동산에 앉으시어

다섯 제자들을 위해 설하신
최초의 법문이며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밑
마지막 입멸의 순간

수밧다에게 설해주신
최후의 법문 !

팔정도경은
대자대비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남겨주신
위대한 유산이며

윤회중생들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 !

불멸 2564 11 25
진흙속의 연꽃님이

팔정도경 빨알리어 암송을
선언한 지 꼭 한달 만에

스님과의 암송약속 잊지않고
방금 전 보내온 문자

오늘 빠알리 팔정도경
을 모두 외었습니다.”

환희롭게 빛나는
님의 문자메시지

님의 팔정도경 독송음이
이 고요한 산방에도 들리나니

만일 그때 부처님이
님 곁에 계셨다면

사두 사두 하시며
미소 지으셨을텐데

착하다 착하다 하시며
등 두드려 주셨을텐데

*

장하십니다. 작심하지 않으면
일평생을 불자로 산다 해도
못 다 외울 것을.

일단 외우셨으니
노는 입에 염불하듯
부처님전에 조석예불 모시듯
언제나 어디서나 틈나는대로
뜻과 함께 반복 암송하시길,
8
가지 가르침 하나하나
뼛속에 아로새겨
일상속에서 실천해 나가시길,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메따와 함께
비구 빤냐완따 합장

 

 

빤냐완따 스님은 시인스님이기도 하다. 글을 잘 써서 시와 수필을 모아 책을 만들어 법보시하기도 한다. 스님은 축원의 메시지를 주었다. 이런 찬사를 받아 보는 것은 보통불자로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은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다. 그러나 말씀은 남아 있다. 제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했고, 나중에는 문자로 기록하여 오늘날 빠알리니까야 형태로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처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깨달은 자의 말은 모두 진실된 것이다. 역으로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이는 전승된 니까야에 대하여 후대 편집되거나 삽입된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과연 다 읽어 보고나 하는 소리일까?

 

니까야를 읽어 보면 의심이 일어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진실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연결되어 있다. 이 경에서 짤막하게 설명해 놓은 것은 저 경에 가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식이다. 마치 씨줄과 날줄로 직교하여 정교하고 견고하게 옷감을 짜 놓은 것과 같다. 마치 옛날 시계처럼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니까야를 읽어 보면 가르침에 대한 의심, 의혹, 회의가 일어날 수 없다.

 

진리의 말씀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외울 필요가 있다. 다 외우지 못해도 근본가르침은 외워 놓으면 좋을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 가르침에는 파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힘인가? 그것은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보호한다. (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Thag.303)라고 말 할 수 있다.

 

법은 법을 지키는 자를 보호한다. 신호등이 파란불이면 건너 가고, 빨강불일 때는 멈추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다. 교통신호를 지키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된다. 일상에서도 법을 지키면 보호받는다. 부처님 가르침도 법이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모두 수호경이 된다. 가르침을 따르면 불행하지 않고 고통에 빠지지 않고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팔정도경에서 삼마깜만또(정업)가 있다. 삼만깜만또에 있는 세 가지는 오계에도 있는 것이다. 세 가지는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아딘나다다 웨라마니, 아브라흐마짜리야 웨라마니”(S45.8)로 표현된다, 이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에 대한 것으로 신체적 행위와 관련이 있다. 세 가지 행위를 삼가면 불행에 빠지지 않고 악처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보호받을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보호경 또는 수호경이 된다.

 

 

어렵게 외웠다. 나이가 들어 외기도 쉽지 않다. 예전과 달리 기억력도 떨어지는 것 같고 힘도 딸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도전해 보았다.

 

우려는 기우가 되었다. 외우는데 있어서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고 기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욕심 내지 않고 하루에 딱 한 게송씩만 외다 보면 어느 새 다 외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렵게 외웠으니 이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외워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고 나면 상쾌하다는 것이다. 이를 요즘말로 유쾌, 상쾌, 통쾌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외우면 힘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부처님이 보호해 주는 것 같다. 빤냐완따 스님의 메시지에서 힘을 받는다.

 

 

님의 팔정도경 독송음이
이 고요한 산방에도 들리나니

만일 그때 부처님이
님 곁에 계셨다면

사두 사두 하시며
미소 지으셨을텐데

착하다 착하다 하시며
등 두드려 주셨을텐데…”

 

 

2020-1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