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자타가 수호되는 암송(暗誦)의 행복

담마다사 이병욱 2021. 7. 9. 07:52

자타가 수호되는 암송(暗誦)의 행복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팔정도경(S45.8) 서문에 있는 말이다. 대부분 빠알리경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말로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라는 뜻이다.

 

요즘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하루에 한번 의무적으로 암송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외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경전을 한번 읽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독송하고 더 나아가 외우면 내 것이 된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경전을 열어보지 않고서도 외운 경전을 즉각 가져올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외운 경전은 나의 재산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배움의 재물이다. 일곱 가지 고귀한 정신적 재물 중의 하나이다.

 

 

경전은 늘 가까이하고 있어야 한다. 손 닿는 곳에 가까이 있으면 좋다. 머리맡에 있으면 더 좋다. 언제 어디서나 열어 보아야 한다. 열어 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이다.

 

경전을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했다. 진리의 말씀은 한번 들은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잘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의미를 새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가르침을 잘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배움의 자세가 되어 있음을 말한다. 법문을 했는데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렸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노트도 없고 녹음기도 없던 시절에는 잘 새겨듣고 잘 기억해서 암송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산수를 하기 위해서는 구구단을 외워야 한다. 영어를 잘 하려면 단어를 외워야 한다. 문장을 외우면 더 좋다. 국어시간에 고전은 외웠다. 외우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외우고자 노력했다. 이는 먼저 잘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진리의 말씀은 심오한 것이라서 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우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했다.

 

기억한 가르침을 탐구하라고 했다. 이는 가르침을 관찰하고 고찰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했을 때 그 의미를 파악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대입해 보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사고와 팔고를 고찰했을 때 고성제가 틀림없는 진리임을 알게 된다. 그 결과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책이 없던 시절 제자들은 가르침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머리 속에 기억해 두어야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해체하고 더 나아가 십이처와 십팔계를 설했을 때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이 없던 시절 심오한 가르침을 잘 귀담아듣고 외우는 것은 필수였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다. 어느 정도로 심오할까? 부처님은 아난다가 연기법에 대하여 이해한 것처럼 말하자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라며 나무랐다. 그리고서는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난다여,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와 같이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라고 했다.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하다. 심오한 가르침을 잘 듣고 새겨서 기억하고 고찰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가르침은 이해차원이 아니다. 강력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했다.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실천을 강조했다. 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도 설명된다. 여실지견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야타부따냐나닷사나인데 이는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뜻이다. 여기서 냐나는 앎에 대한 것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닷사나는 봄에 대한 것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교학과 수행이 항상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새는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다. 양쪽에 날개가 있어야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 교학과 수행은 수행자에게 있어서 양날개와도 같다. 교학만 해서도 안되고 수행만 해서도 안된다. 교학만 있다면 증득이 없어서 남의 소 세는 것과 같다. 수행만 있다면 방향을 잡을 수 없어서 엉뚱한 곳에 갈 수 있다.

 

부처님 제자라면 항상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을 읽어야 한다. 오늘날 경전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고전과 같은 것이다. 고전은 언제 읽어도 맛이 나듯이, 경전을 읽으면 매번 새롭다. 이는 다름 아닌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매일 경전을 본다. 경전은 매우 방대하다. 마치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볼 필요는 없다. 필요한 부분만 그때 그때 읽어 보면 된다.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다 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새겨 두고 싶은 가르침이 있다. 그런 경우 경을 외워야 한다.

 

경을 암송하면 힘을 받는다. 그것도 원문으로 외우는 것이 좋다고 한다. 경을 외우면 왜 힘을 받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감응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경을 외웠기 때문에 그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호의 의미가 크다고 본다.

 

경은 수호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보배경, 자애경, 축복경과 같은 경에 대하여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라고 한다. 왜 경은 수호의 의미가 있을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경에 있는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청정해지기 때문에 자신이 수호된다. 동시에 타인도 수호된다. 경전을 독송하고 합송하면 자타가 수호되는 것이다.

 

경을 매일 암송하고 있다. 십년전부터 보배경, 자애경, 축복경, 초전법륜경 등 빠알리 경을 빠알리어로 암송하고 있다. 요즘은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그런데 경을 암송하고 나면 매우 상쾌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이는 경을 단지 읽거나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독송의 행복 또는 암송의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2021-07-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