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떼자사미 스님 공양청(供養請)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17. 19:27

떼자사미 스님 공양청(供養請)

 

 

수행자를 찾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사는 스님이다. 청파동에 있는 담마선원 선원장 떼자사미스님이다.

 

오래 전부터 떼자사미 스님 공양청(供養請)을 하고자 했다. 스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기회가 되지 않아 못하고 있던 차에 B법우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코로나 기간이긴 하지만 5인 이하 모임은 가능하기 때문에 공양청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스님으로 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떼자사미 스님에게 공양하기로 했다. 날자는 117일로 정했다. 담마와나선원 법우이자 수계동기인 K법우도 참가하기로 했다.

 

공양청 할 때는 본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에서 밖에 나가서 식사 대접하는 것이 보통이 된 것 같다. 코로나시기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는 것이 꺼려졌다. 그래서 선원에서 공양청하기로 했다. 각자 가져온 음식으로 공양청 하기로 한 것이다. 117일 오전 1050분 선원에 도착해 보니 이미 두 법우는 한창 음식준비를 하고 있었다.

 

음식준비한 것은 없다. 다만 선원 바로 옆에 있는 유기농빵집에서 빵을 샀다. 그리고 봉투도 하나 준비했다. 보시금이다. 능력껏 준비했다.

 

주방겸 식당에 상이 차려졌다. 스님상은 별도로 차려졌다. 밥과 무우두부국, 연어조림과 오리불고기가 준비되었다. 또한 토마토, , 사과, , 상추, 배추 등 각종 샐러드가 올라왔다. 한상 차려 놓으니 푸짐해 보였다.

 

 

식사는 11시부터 시작되었다. 오후불식이기 때문에 12시 이전에는 식사를 마쳐야 한다. 식사하기 전에 간단한 의식을 행했다.

 

세 명이서 스님 상앞에 앉아 상을 약간 들었다. 스님은 축원을 해 주었다. 스님은 빠알리어로 “상가하 아낫따 닙바나싸 삣세요 호뚜”라고 했다. 재가자들도 따라 했다. 스님은 우리말로 상가에 올리는 보시공덕으로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싸두, 싸두, 싸두하며 테라와다식 삼배를 했다.

 

유유상종 동기의식

 

선원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찾는 이가 없어서 도심에 있지만 산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코로나시기이기 때문에 모임이 금지되고 법회도 취소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적막과 고요는 수행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수행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라고 한다.

 

두 법우가 상을 차려 주어서 밥을 먹었다. 이런 경우 미안할 따름이다. 상차림 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거지만큼은 하겠다고 했다.

 

식사시간은 즐겁다. 아침을 먹지 않아 적당히 배고픈 상태에서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더구나 청정한 공간에서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이다. 최상의 공양시간이다.

 

유유상종이라고 한다. 끼리끼리 모임을 말한다. 어울리는 법우들은 나이가 비슷비슷하다. 나이를 서로 물어 본적이 없지만 비슷한 연령대끼리 모이는 것 같다. 더구나 같은 학번인 것을 알았을 때 동기의식을 갖는다. 수계동기도 있고 학번동기도 있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과 법담을 했다. K법우가 밖에 나가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하기로 약속했으나 스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못하게 되었다. 마치 대접 받으로 간 것 같이 되어서 송구스럽다.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팔정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팔정도를 빠알리어로 외운 바 있어서 팔정도 이야기를 꺼낸 것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내심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스님은 심념처(心念處) 수행처로 잘 알려져 있는 쉐우민 센터에서 오랫동안 수행했기 때문이다.

 

떼자사미 스님은 마음보는 수행, 심념처와 관련하여 핵()을 말했다. 이를 힘 또는 파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반복하여 수행하면 수행의 힘이 생기는데 이를 핵으로 설명했다. 핵은 결정체이다. 강력한 파워를 가진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필력(筆力)과 같은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오랫동안 써 왔다. 십년 넘게 매일 쓰다 보니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또한 여러 단계를 거친 것 같다. 이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필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번 글쓰기 삼매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무리 피곤해도 글을 쓸 때만큼은 힘이 솟아 나는 것 같다. 수행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동을 하면 근육과 근력이 생겨난다. 하루 이틀 해서도 안되고 한두달 해서도 안된다. 최소한 수년은 해야 가시화될 것이다. 만약 십년동안 운동했다면 전혀 운동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탁월한 능력을 보일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고 수행도 그럴 것이다.

 

수행을 오랬동안 한 사람에게는 수행의 힘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근육이 붙어서 남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선원에서 한두달도 아니고 수년동안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을 때 수행력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스님은 핵으로 설명한 것 같다.

 

사띠의 힘을 키우려면

 

수행의 힘이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사띠의 힘도 생겨날 것이다. 일상에서도 사띠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수행의 힘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띠의 힘이 생겨나는데는 조건이 있다고 했다. 가까운 원인으로 삼마와야모(正精進)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삼마사띠는 삼마와야모에서 선법증장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마와야모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불선법(아꾸살라)이면 끊어 버리고, 선법(꾸살라)이면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사띠는 선법에 속하기 때문에 사띠의 힘이 강화된다는 것은 더 이상 불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는 계학과 관련이 있다. 팔정도에서 삼마와짜(正語)와 삼마깜만또(正業), 삼마아지워(正命)가 이에 해당된다.

 

사띠를 유지한다는 것은 계를 지킨다는 말과도 같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오계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생활속에서 오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선원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지켜지게 된다. 선원에서는 오계가 아니라 팔계를 지킨다. 오후불식 등을 추가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계행이 바탕이 되었을 때 사띠의 힘을 강화하는 조건이 된다.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다. 엄밀히 말하면 팔만이천법문이다. 이는 테라가타에서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에게서 팔만이천, 수행승들에게서 이천을 받아 팔만사천 법문을 나는 담지하고 있다.(Thag.1030)라고 읊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법문은 팔정도로 요약된다. 팔정도는 사띠로 포커스가 맞추어 진다. 이렇게 본다면 오로지 사띠라고 볼 수 있다.

 

사띠의 힘을 키우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총동원된다. 만일 사띠의 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정정진도 없고, 정어도 없고, 정업도 없고 정명도 없을 것이다. 또한 정견도 없고, 정사유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정정도 없다. 사띠가 없으면 팔정도가 없는 것이다.

 

마음의 핵()은 고요함의 결정체

 

사띠가 항상 현전할 때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사띠는 그 어떤 것도 쳐부술 수 있다. 이는 단지 대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수행의 힘이 약히면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무참히 깨지고 만다. 탐욕이 생겨나고 성냄이 일어났다면 사띠의 힘이 약한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집중수행할 여력이 없다. 7일 또는 10일짜리 집중수행에 시간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사띠의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경계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오랜 세월 수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새벽시간만큼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고요함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낮이 되어서 무참히 깨지고 말지라도 새벽시간만큼만은 고요함을 누린다. 새벽의 고유함이 낮까지 연장된다면 수행의 힘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띠의 힘이다.

 

떼자사미 스님은 수행의 힘에 대하여 핵으로 설명했다. 이 핵을 고요함의 결정체라고 했다. 이는 수행의 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핵이 점점 커지면 수행의 힘도 커질 것이다. 동시에 사띠의 힘도 커질 것이다. 새벽과 같은 고요가 하루 종일 유지된다면 엄청남 핵을 가진 것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떼자사미 스님은 칠각지로 설명했다.

 

칠각지는 팔정도에서 선법증장과 관련이 있다. 선법을 일으켰다는 것은 칠각지에서염각지택법각지가 작용한 것이다. 다음으로 선법을 유지하고 증장했다면 이는정진각지에 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희열이 일어나면희각지에 대한 것이고,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졌다면경안각지에 해당되고, 삼매에 들면정각지에 해당된다. 마침내 평온에 이르렀다면사각지에 해당된다. 이처럼 정정진에서 선법증장에 대한 게송은 칠각지와 관련이 있다.

 

칠각지에서 경안각지(passaddhisambojjhaga)와 정각지(samādhisambojjhaga)와 사각지(upekkhāsambojjhaga)가 있다. 이 세 가지 각지는 마음의 고요와 관련이 있다. 사띠의 힘이 강할 때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수행의 힘으로 마음의 핵이 커졌을 때 어느 경계에서든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것이다. 이런 단계는 되어야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팔정도의 길로 주욱 나아가면

 

떼자사미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으로는 20191월 미얀마 쉐우민센터에서 본 이후 두 번째이다. 이번 점심공양청을 계기로 하여 스님의 마음보는 수행에 대하여 듣고자 했다. 그러나 수행경력이 짧아서 핵심을 가로 지르는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알려면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집중수행 경험도 없고 수행력도 일천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스님은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경계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띠의 힘을 길러야 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사띠의 힘은 팔정도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가 팔정도이고, 팔정도가 사띠가 된다.

 

매일 빠알리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암송하고 나면 상쾌하다. 그렇다고 팔정도를 몸으로 체득한 것은 아니다. 팔정도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방향은 잡은 것과 같다. 이렇게 팔정도의 길로 주욱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2021-0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