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테라와다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정법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다. 담마와나공덕회에서는 돌아가면서 공양보시를 하기로 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선원 불자들은 조를 짜서 스님의 점심공양을 하기로 한 것이다.
테라와다스님들은 오후에는 먹지 않는다. 하루 한끼만 먹고 산다. 아침 해가 뜰 때 죽 같은 음식을 먹기는 하지만 정오 전에 한끼 먹는 것으로 그친다.
테라와다 스님들은 스스로 밥을 해먹지 않는다. 누군가 공양을 해 주어야 먹을 수 있다. 이는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담마와나선원 밴드에 공양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공양봉사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몇 사람이서 공양하기에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특히 회장불자가 도맡아 하다시피 했는데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한 것이다. 그래서 카톡방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담마와나공덕회’라고 한다.
담마와나공덕회에는 14명이 있다. 대부분 여성불자들이다. 공덕회라는 말이 의미히듯이 스님을 공양하는 모임이다. 스님의 점심공양을 책임지는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공덕회에서는 조를 짰다. 날자별로 담당자를 정했는데 한달 스케줄이 나왔다. 이런 현상을 보고서 어느 불자는 “공양간이 이리 활성화되니 훈훕합니다.”라고 멘트를 날렸다.
담마와나공덕회가 출범됨에 따라 회장 한사람에게 집중되었던 과도한 노고가 해소되었다. 모두 자발적으로 당번이 되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주말에 공양하고, 시간적 여유가 되는 사람은 평일에 공양한다. 여기에 남자불자도 예외가 아니다. 밖에 나가 식당에서 공양을 대접하기도 하는 것이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세상에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어찌 보면 먹는 것은 성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먹는 다는 것은 자신에게 공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몸이 지탱되어야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먹는 행위야 말로 성스러운 행위라 하니 할 수 없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먹는 것이 왜 수행인가?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감관의 수호, 음식절제, 깨어 있음에 철저히 하는 것, 이 세 가지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음식절제를 해야 하는가? 탐욕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음식절제가 되지 않으면 탐욕이 치성하여 도와 과를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계율로 먹고,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으라고 한다. 몸에 기름칠할 정도로 먹고, 음식을 보시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자애의 마음으로 먹고, 음식을 먹을 때는 전 과정을 알아차림 하며 먹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아무 생각없이 먹는 것 같다. 그래서 먹다 보면 탐욕으로 먹고 분노로 먹게 된다. 그리고 아무 때나 먹는다. 그러나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먹지 않는다. 오후에는 먹지 않고 점심 때만 먹는다. 그것도 정오 이전에 식사를 끝낸다. 테라와다스님들이 그렇다.
그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테라와다스님들은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오후에 먹지 않고 하루 한끼만 먹고 살아간다. 이런 수행승을 찬탄하는 게송이 있다. 테리가타 로히니의 경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한다.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만을 구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3)
로히니 장로니가 읊은 게송이다. 이는 장로니가 소녀시절에 아버지가 물은 말에 답한 것이다. 아버지는 “많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수행자들에게 너는 보시한다. 로히니야, 지금 묻는다. 왜, 네게 수행자가 사랑스러운가?”(Thig.272)라고 물었다. 이에 소녀는 수행자가 사랑스러운 이유에 대하여 12개의 게송으로 답한다.
수행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출가할 때 소유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소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세 벌의 옷과 발우로 살아간다. 탁발에 의해서 연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청정한 삶이다. 그래서 로히니는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3)라고 말한 것이다.
한국에서 테라와다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출가자는 비난받기 쉽다. 왜 그런가? 청정한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구족계를 받았다는 것은 청정한 삶을 살기로 약속한 것이 된다. 그래서 출가자의 허물은 크게 보인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네.”(S9.14)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적 현실에서 테라와다스님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미얀마나 태국 등과 같은 테라와다불교국가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불교의 기반이 약하다. 더구나 테라와다불교는 저변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탁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재가자들의 점심공양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 맞추어 살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마치 불교가 서역으로부터 동아시아로 전래되었을 때, 동아시아 환경에 맞게 적응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남방과 달리 기후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불교도 달라졌고 수행자들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더구나 옛날에는 교류도 없어서 전혀 다른 불교가 된 듯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글로벌화됨에 따라 남방에서 계를 받고 온 수행승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에 테라와다불교가 생겨난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이 2009년에 창립되었기 때문에 이제 12년 된 것이다. 그런데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계를 느낀 스님들이나 재가수행자들이 미얀마나 태국, 스리랑카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이다.
수행자들이 차츰 하나 둘 귀국 했을 때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탁발전통이 없는 한국불교에서 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이 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탁발에 의지한다. 비구가 스스로 밥해 먹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는 문제가 가장 크다고 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담마와나선원 불자들은 공덕회를 만들어 스님 점심공양을 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이 살아 가는 것이 눈물겹다. 점심한끼 먹는 문제가 이렇게 큰 것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루 세 끼 먹고, 그것도 모자라 간식을 먹고 또 야식을 먹는 수행승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곡차라 하여 음주도 한다. 그러나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한 수행승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비록 나의 창자가 밖으로 나와 움직이더라도, 목숨을 버릴지언정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리라.”(Vism.1.121)라고 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테라와다 스님들에게는 점심한끼는 눈물겹다. 재가불자들의 헌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재가불자가 공양하지 않으면 굶어야 한다. 그렇다면 테라와다스님들은 왜 이렇게 계를 지키려고 노력할까? 이는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마하 띳싸 장로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그는 기근이 들었을 때 여행을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 피곤하고 허약해졌다. 그는 열매로 뒤덮인 망고나무 아래에 누웠다. 여기저기 많은 망고가 떨어졌다. 주인 없는 망고가 근처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들을 집어서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한 재가신도가 그가 지친 것을 알고 그에게 망고즙을 마시도록 주었다. 그는 그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그 장로는 그에게 설법을 했다. 그리고 그의 등위에 있을 때 앎과 봄을 통해서 길을 따라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빠라맛타만주싸,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306번 각주)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장로는 망고가 옆에 떨어져 있어도 주워 먹지 않았다. 이는 계율을 지켜 내기 위한 것이다. 재가자가 주워서 준다면 먹을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재가자가 주워 주었다. 그러나 오후라면 먹어서는 안된다. 즙을 내서 마시면 가능하다. 그래서 “의무계율을 정화하면서 목숨을 버릴지언정 세상의 수호자가 시설한 계행에 의한 제어를 파괴하지 말라.”(Vism.1.99)라고 했다.
장로의 사대축원
장로는 재가자에 축원을 해 주었다. 이에 대하여 장로는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다. 계행을 지닌 까닭에 그대를 위해 이와 같이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Vism.1.133)라고 했다.
재가자는 재보시하면 출가자는 법보시한다. 재가자는 재보시함으로써 공덕을 짓고, 출가자는 법보시함으로써 역시 공덕을 짓는다. 서로서로 좋은 것이다.
재가자가 재보시 할 때 출가자는 “아유 완노 수캉 발랑”이라며 축원해 준다. 법구경에도 실려 있는 이 말은“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길!”(Dhp.109)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테라와다식 사대축원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이상 훌륭한 축원문은 없을 것이다.
축원문 중에서 “아유(āyu)”가 있다. 이는 장수축원문이다. 왜 장수축원을 해줄까? 이는 “오래 살아서 오래 공덕 지으십시오.”라는 말과 같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지을 기회도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수축원이 가장 앞에 나왔을 것이다.
수행은 절박함이 있어야
장로는 재가자의 등에 업혀 갈 때 아라한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장로는 “외경을 일으켜서 이치에 맞게 사유하니 그대의 등에 업혀 있으면서 거룩한 경지를 이루었다.”(Vism.1.13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절박함을 표현한 것이다. 굶어 죽는 순간에도 이치에 맞게 사유한 것임을 말한다.
흔히 수행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절박함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를 ‘외경’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여기서 외경은 ‘상베가(saṃvega)’를 번역한 말이다.
상베가에 대하여 몇 편의 글을 썼다. 외경에 따른 감동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생명과 관련이 있다. 특히 죽음과 관련이 있다.
한존재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접했을 때 외경이 일어난다. 그런데 가르침을 알면 전율하게 되고, 가르침을 실천하게 되었을 때 감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상베가에 대하여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라고 표현한 바도 있다.
장로도 외경을 일으켰다. 굶어 죽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관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베가에 대하여 주석에서는“세 가지 사실의 특징(三法印) 즉,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외경을 말한다.” (KPTS본 323번 각주)라고 설명했다. 수행은 절박함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담마와나공덕회의 공덕행
한국적 현실에서 테라와다불교스님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한국적 현실에서 테라와다불자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는 먹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매일 밥을 먹는다. 그것도 하루 세 끼 먹는다. 어떤 이는 간식도 먹고 야식도 먹는다. 때로 음주를 하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 먹는 것일까? 먹는 것을 즐긴다면 이는 탐욕으로 먹는 것이 된다. 또한 분노로 먹기도 한다. 그러나 먹는 행위는 가장 성스러운 행위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
먹어야 산다. 먹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것이다. 먹어야 몸을 지탱한다. 몸이 지탱되어야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먹는 행위야말로 신성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먹는 행위는 청정한 삶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무소유로 실현된다. 수행자는 당연히 탁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에서 탁발은 가능하지 않다. 그 대안으로서 재가자들이 공양하는 것이다. 선원에 가서 음식준비를 하는 것이다. 또한 공양청이나 청식으로도 가능하다.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생겨난지 얼마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먹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있다. 조를 짜서 봉사자를 요일별로 할당하는 것이다. 담마와나공덕회에서 공덕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21-05-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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