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보다는 성도, 성도보다는 열반, 2565주년 ‘붓다의 날’에
오늘은 음력 사월 만월(滿月)일이다. 영어로는 풀문데이(Full Moon Day)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 저녁 달이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잔뜩 흐려서 달도 보이지 않고 별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별은 보이지 않더라도 달은 보여야 한다. 아무리 도시의 밤하늘이 밝기로 올해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 보이지 않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동쪽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는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남쪽하늘에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오늘 아침 댓글 본 것이 생각났다. 오늘 저녁 8시부터 개기월식이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 정도 되었다. 한창 개기월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이다. 그래서인지 보름날 달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파동 담마와나 선원으로
오늘 오전 담마와나선원으로 향했다. 안양에서 청파동까지는 승용차로 한시간가량 걸린다. 오전 9시에 출발했다. 도중에 터널을 거쳤다. 길이가 무려 5키로가량 된다. 서울 관악산을 관통하는 강남순환고속도로를 말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터널을 통과하면 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터널은 좁고 어둡고 두려운 곳이다. 그러나 터널만 통과하면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마치 시간 이동한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는 것 같다. 수행도 그렇지 않을까?
수행을 하면 수행하기 전과 후가 다르다. 눈을 감고 한시간 동안 배의 움직임을 관찰했을 때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인내를 필요로 한다. 마음 가짐을 단단하게 가지지 않으면 도중에서 그만 두게 된다. 그럼에도 이겨 내면 마치 터널을 통과한 것처럼 상쾌한 느낌이다.
오전 10시가 넘어서 청파동에 도착했다. 청파2동 주민센터 주차장에 차를 파킹해 놓았다. 담마와나 선원 들어 가기 전에 두 가지를 준비하고자 했다. 하나는 빵을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꽃을 사는 것이다. 오늘은 ‘붓다의 날’인데 빈손으로 갈 수 없다.
담마와나선원 바로 앞에 빵집이 있다. 동네빵집이지만 독특한 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급으로 해서 세 덩이를 샀다. 스님들에게 공양할 음식이다. 다음으로 꽃집으로 갔다. 장미꽃 세 송이를 샀다. 불단에 공양할 것이다.
사월보름날은 트리플데이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두 번 치루고 있다. 지난주 수요일날에는 대승불교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참여했다. 오늘은 테라와다불교 부처님오신날이다. 지난주는 공휴일이었지만 오늘은 평일이다. 평일임에도 자리를 비우고 담마와나 선원에 간 것이다.
오늘은 테라와다 부처님오신날이다. 대승불교와는 일주일 차이가 난다. 음력 사월 만월일날이 테라와다 부처님오신날이다. 그러나 공휴일이 아니다. 평일에 행사를 하면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테라와다불교 사원에서는 일요일 행사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자국의 이주민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본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탄생일만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와 열반도 함께 기념한다. 그래서 음력 사월보름날은 트리플데이가 된다. 이를 삼박자날이라 할 것이다. 삼박자가 갖추어진 날이라 해서 트리플데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담마와나선원 공양간에서
담마와나선원 공양간에 도착했다. 여성법우님 다섯 명이 한창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입장에서 도와줄 것이 별로 없었다. 음식을 상에 날라 주는 역할을 했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오늘 담마와나선원에서 붓다의 날 공식행사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공식행사는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스님들에게 공양은 하기로 했다. 떼자사미 선원장 스님과 빤냐완따 이사장 스님을 비롯하여 두 명의 스님이 초대되어서 네 명의 스님에게 공양 올릴 상을 준비했다.
음식은 정성을 다해서 마련한 것 같다.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것을 한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양간에서는 밥과 국, 부침개만 했다. 여기에 빵을 곁들이니 푸짐해 보였다.
점심공양은 11시에 시작했다. 정오가 되는 12시까지는 식사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대개 11시에 밥을 먹는다. 테라와다에서는 오후에 먹지 않는다. 점심 한끼 먹는다고 보아야 한다. 아침을 먹기는 하지만 죽 등을 가볍게 먹는다.
주지 않는 것은 먹지 않기 때문에
테라와다 스님들은 스스로 차려 먹지 않는다. 상을 차려 주어야 먹는다. 이는 주지 않는 것은 먹지 않는다는 계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신도들이 상을 차려 주어야 한다. 본래 탁발을 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탁발이 가능하지 않아서 청식(請食)형식으로 하는 것이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릴 근사한 상이 차려졌다. 밥과 국, 나물, 샐러드 등 갖가지 반찬이 있다. 고기도 있고 생선도 있다. 한상 가득 차린 상은 보기에도 먹음직 하다.
상차림을 할 때는 하나의 의식을 필요로 한다. 스님들은 주지 않는 것은 먹지 않기 때문에 상을 올리는 의식을 해야 한다. 재가자들이 상을 붙잡고서 스님에게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이때 스님은 축원해준다. 대개 “이 보시공덕으로 도와 과를 이루기 바랍니다.”라는 취지의 축원을 해준다.
밥 먹기 전에 자애관을
선원봉사자들도 식사를 했다. 공양간에 따로 상을 차렸다. 역시 푸짐한 상차림이다. 밥을 먹기 전에 합장을 하고 음식을 먹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진 것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어떤 발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꽤 긴 발원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2019년 1월 미얀마 선원에서 본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밥을 먹기 전에 자애관을 한다. 어떻게 하는가? 미얀마어로 운율에 맞추어 “베이양 낀짜 바세 쎄이 싱예 낀짜 바세 꼬 싱예 낀짜 바세 꼬 쎄이 닛피아 찬 다 스와핀 미미도 칸다윙고 유에사웅 나인짜 바세”라고 합송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시방에 있는 모든 생명들 위험과 해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음의 근심이 사라져 행복하기를! 몸의 고통이 사라져서 건강하기를! 몸과 마음이 모두 평화롭게 자신의 업을 잘 실어 나를 수 있기를!”라는 내용이다.
미얀마에서는 밥 먹기 전에 상을 앞에 두고 자애관을 네 번 합송한다. 왜 네 번인가? 첫번째로는 이 공양을 있게 한 국제선원 원장스님과 상가스님들께 자비의 마음을 낸다. 두번째로는 싸띠빠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비구, 비구니, 띨라신, 남성수행자, 여성수행자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낸다. 세번째로는 오늘 한끼 공양을 올린 공양제자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낸다. 마지막으로는 이 공양을 준비한 선원봉사자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낸다. 그래서 자애관을 네 번 합송하는 것이다.
한국불자들도 밥 먹기 전에 자애관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이 밥이 여기까지 오기 까지 여러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밥을 사마타로 먹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밥을 위빠사나로 먹는 것이다. 먹는 과정을 하나하나 알아차림 하면서 먹는 것이다.
설거지 담당을 했는데
먹었으면 치워야 한다. 설거지 담당을 하기로 했다. 음식 준비하는 것도 큰 일이지만 설거지하는 것도 큰 일이다. 설거지하기로 선언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에 임했다.
설거지를 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남자들도 주방에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접받으려 하는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이다.
절에서 보는 꼴불견이 있다. 그것은 대접받으려는 사람이다. 마치 집이나 직장에서와 같이 대접받으려는 하는 것 같다. 자신의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많이 배운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중에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절에 와서도 대접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절에서 대우나 대접받으려 한다면 이는 자만이다. 사회적 지위와 절에서 위치는 무관한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절에서 대우받고 대접받으려 한다면 목불인견이다. 절에서 대접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절에서는 봉사할 생각을 해야 한다. 설거지를 한다든가 청소를 하는 등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테라와다식 삼배로 물품공양을 하고
오늘 붓다의 날 행사는 공식행사가 아니다. 봉사자들이 스님 공양하는 날로 했다. 그러나 밥만 먹고 갈 수 없다. 스님이 재가불자들을 위하여 법문을 해 주었다.
오후 12시 반에 법당에 모두 모였다. 먼저 네 분의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공양물을 네 분의 스님들에게 올렸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스님들에게는 택배로 물품을 보낼 것이라고 한다.
물품공양을 할 때는 삼배를 한다. 테라와다식 삼배를 말한다. 어떻게 하는가? 무릎 꿇고 앉은 자리에서 두 손을 합장한다. 합장한 두 손을 이마에까지 올리고 그대로 몸을 앞으로 숙인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굽힌다. 이때 두 손바닥은 바닥에 댄다. 손을 뒤집는 것은 하지 않는다.
테라와다식 삼배는 부담이 없다. 일어나서 오체투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어선다는 것은 심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갖는다. 그러나 앉은 자리에서 몸만 숙이는 것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절을 할 때도 알아차려야 한다. 몸을 굽힐 때도 알아차리고, 머리와 두 손이 바닥에 닿을 때도 알아차려야 한다. 절하는 전과정을 알아차림 하며 절한다면 천천히 할 수밖에 없다. 스승은 절하는 모습만 보고서도 수행의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탄생과 성도와 열반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
빤냐완따 스님이 법문했다. 현재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 스님이다. 스님은 부처님의 성도와 열반에 대하여 한시간 동안 법문했다. 스님이 법문할 때 노트를 했다. 미리 준비한 작은 노트에 기록했다. 손바닥만한 노트를 말한다.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키워드라도 적어 놓으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기록을 한다. 늘 노트와 필기구를 가지고 다닌다. 이런 기록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빤냐완따 스님의 붓다의 날에 대한 법문을 들으면서 한가지 생각한 것이 있다. 그것은 붓다의 날에서 세 가지 사건, 즉 탄생과 성도와 열반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식사하면서 법우들에게 물어보았다.
한국불교에서는 탄생의 날과 성도의 날과 열반의 날이 모두 다르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큰 명절은 탄생의 날이다. 그래서 음력 사월초파일에 부처님오신날이라고 하여 가장 크게 행사를 한다. 또한 공휴일로 지정된 날이기도 하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탄생과 성도와 열반이 한날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인지 몹시 궁금했다. 네 명의 법우에게 물어보았다. 탄생이라고 말하는 법우는 없었다. 정각이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말하는 법우는 두 명 있었다. 열반도 두 명 있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탄생보다는 정각(성도)과 열반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교의 정체성은 열반에
부처님의 탄생도 중요하고, 정각도 중요하고, 열반도 중요하다. 그래도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열반이라고 본다. 이는 개인적인 견해이다. 왜 그런가? 불교의 정체성은 열반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기독교의 정체성이 부활에 있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40년동안 팔만사천법문을 설했다. 엄밀히 말하면 팔만이천법문이다. 나머지 이천법문은 제자들이 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많은 법문을 한 것일까? 그것은 열반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열반이라고 볼 수 있다. 열반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만약 부처님이 열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불교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굴러 온 것이다.
열반이 불사(不死)인 것은
열반은 죽는 것이 아니다.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자아개념이 있는 사람에게나 죽음이라는 말이 있게 된다. 자아개념이 없는 무아의 성자에게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아마따(amata: 不死)라고 했다.
열반은 죽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불사라고 한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S6.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사상체계를 놓으라는 것이다.
불사는 죽지 않음을 말한다. 무아의 성자에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에 드는 것을 불사라고 한 것이다. 불사이면 당연히 불생이 된다. 그래서 열반은 불생불사가 되어서 윤회가 끝난다.
아루나(aruṇa)의 여명이 시작될 무렵에
부처님이 가르침을 설한 것은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노력은 부처님 성도과정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빤냐완따 스님은 오늘 붓다의 날을 맞이하여 주로 부처님의 성도와 열반에 대하여 법문했다. 상대적으로 탄생에 대한 법문은 거의 없었다. 특히 정각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빤냐완따 스님은 정각의 순간에 대하여 아루나의 여명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성도의 순간에 대하여 “기원전 598년 음력 사월 보름날 아루나(aruṇa)의 여명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새벽 네 시 무렵의 여명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여명이 밝아 올 때 누진통을 얻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 이는 율장대품과 우다나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은 삼명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명 역시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성도하기까지 목숨을 건 수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빤냐완따 스님이 인용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살이 모두 말라 살갗만 남을지언정.
살이 모두 말라 힘줄만 남을지언정.
살이 모두 말라 뼛골만 남을지언정.
살과 피가 모두 마르고 닳아 없어질지언정.
나는 반드시 이 수행을 성취하고야 말리라.
붓다가 되기 전에는 이 가부좌를 절대 풀지 않으리라.”
이 게송은 어느 경전에 있는 것일까? 찾아보니 상윳따니까야 ‘수행승의 모음’(S21)에서 ‘위대한 용들의 경’(S21.3)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목갈라나가 사리뿟따와의 대화에서 부처님에게 들은 것을 말한 것이다.
목갈라나는 부처님에게 정진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참으로 가죽과 힘줄과 뼈가 바싹 마르고 몸 안의 살과 피가 고갈되리라.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정진력으로 사람의 용맹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정진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S21.3)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정진이 있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것일까?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불퇴전의 각오에 대한 것은 많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몸에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르침도 마르리라.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 더 맑아지고 나는 새김과 지혜, 그리고 삼매에 든다.”(Stn.434)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성도의 과정에서 마라(惡魔)와 싸웠다. 이에 대하여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0)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절박한 심정으로’ 정진해야 성취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했다. 이는 3단계의 10바라밀 수행과 6년 고행, 그리고 낄레사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특히 낄레사의 소멸에 대해서 우리 몸과 마음을 미세하게 관찰하여 깨달았다고 말했다.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통찰수행을 함으로써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다. 마침내 모든 번뇌의 뿌리가 뽑혔을 때가 아루나의 여명이 시작될 무렵이라고 했다.
탄생 보다는 성도, 성도보다는 열반
불교인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당연히 깨달음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접하면 부처님이 누구인지,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한국불자들은 ‘부처님오신날’이 음력 사월초파일날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붓다의 날’은 음력 사월보름날이다. 이는 유엔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매년 음력 사월만월일이 되면 유엔사무총장은 ‘붓다의 날’ 메시지를 발표한다. 그리고 ‘붓다의 날’인 사월보름날은 홀리데이라 하여 크리스마스와 함께 성스러운 날로 간주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사월보름날 ‘붓다의 날’ 행사를 하는 곳은 극히 드물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을 따르는 곳에서는 ‘붓다의 날’ 행사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붓다의 날은 탄생과 성도와 열반이라는 세 가지를 한날에 기념한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 어느 것이 더 비중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판단해 보건데 탄생 보다는 성도이고, 성도보다는 열반인 것 같다. 불기를 부처님이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2021-05-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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