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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지겹지도 않으세요?" 빤냐와로 스님의 윤회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21. 7. 13. 08:05

삶이 지겹지도 않으세요?” 빤냐와로 스님의 윤회법문


어제 자기전에 유튜브로 법문을 들었다. 빤냐와로 스님법문(https://youtu.be/5HL4fPcoU5k )이다. 유튜브가 자동 연결해 준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은 언제 들어도 가슴을 울린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감히 이 시대 최고 법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빤냐와로 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 스님이다. 헌국에서 출가했지만 태국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승랍 30여년 된 마하테로(大長老) 스님이다. 나이는 나와 같지만 나이로 따질 수 없다. 육체적 연령보다 정신적 연령이 우선이다. 법문을 들어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유튜브에서 수많은 법문을 듣는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전달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스승이고 자신이 부처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테라와다 스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르침의 전달자로서 이야기한다. 초기경전에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모두 다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빤냐와로 스님이 법문한 것을 모두 다 기억할 수 없다. 새벽 잠에서 깨어 맑은 정신으로 어제 들었던 법문을 기억해 내고자 했다. 새겨 들을 것이 많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도 잘 새겨 들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신통이나 초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들이다. 부처님이 탄생하여 일곱 걸음 걸은 것에 대한 신화가 있다. 스님도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기들을 축원해 주기 위해서 아기들을 보았을 때 불가사의한 현상도 목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하물며 오랜 세월 바라밀 공덕을 닦은 부처님은 어땠을까?”라고 말 했다.

초기경전에는 수많은 설화, 신화, 초월,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다 쳐 낸다면 몇 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부정하지 말라고 했다. 초기경전은 결집의 산물이기 때문에 다음 결집으로 쳐 내지 않는 한 따라야 함을 말한다.

 

초기경전을 의심하기 보다는 확인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 내용대로 실천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신통에 대해서 못 믿겠거든 신통을 실천해 보라는 것이다. 네 번째 선정에 들어 가면 신통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세와 윤회에 대해서 못 믿겠거든 역시 실천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선정에 들면 전생을 볼 수 있는 숙명통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해 보지도 않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후대 편집된 것이라 말하고 부처님 원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번잡한 부파불교 산물이라고 비난한다. 수행해 보지 않은 사람이 신통과 윤회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의심한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 중에 가장 크게 남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출가자처럼 사십시오.”라는 말이다. 스님은 왜 이 말을 했을까?

스님은 태국에서 계를 받고 비구로서 살았다. 그때 은사 스님은 아라한 처럼 살아라.”라고 말 했다고 한다. 아라한은 아니지만 아라한처럼 산다면 모든 행동거지를 아라한처럼 하게 될 것이다. 걸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최상의 깨달음을 이룬 자처럼 사는 것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라한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재가에서 재가불자로 살지만 출가수행자처럼 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출재가의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재가자라 하여 단지 보시공덕이나 지계공덕의 삶에 그쳐서는 안된다. 출가자차럼 수행공덕의 삶도 살아야 한다. 테라와다 스님이 부처님을 대신하여 가르침을 전하는 이유라고 본다.

잠결에 빤냐와로 스님 법문 들었다. 꿈에서 법문에 대한 꿈을 꾸었다. 잠자기 전의 생각이 꿈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종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소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 공덕의 힘으로 선처에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똑 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매순간 호흡하고 있다. 이 호흡이 멈출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흡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어떤 존재로 태어나서 호흡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삶이 지겹지도 않으세요?”라고 말 했다. 이 말을 듣고서 상윳따니까야 한 구절이 떠 올랐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1


부처님은 이제 윤회를 끝내자고 했다. 쓰라린 윤회의 고통을 안다면 더 이상 윤회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청춘이 아름다운 시절이긴 하지만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항상 현재의 삶을 살며 가르침을 실천하면 윤회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안되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위험하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어느 세계로 떨어질지 모른다.

제아무리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았어도 수다원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안심이다. 절대로 악처에 떨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계와 천상계를 윤회하다가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한다.

 

수다원되기가 쉽지 않다. 이 생에서 준수다원이라도 되어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등 위빠사나 지혜를 증득한다면 한번에 한해서 악처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면 최대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난다고 한다. 불교인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축복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제 지겨운 윤회를 끝내자고 했을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조용히 나직히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듣는 이로 하여금 성찰하게 만든다. 이 시대 최고의 법문이다. 무엇보다 스님으로 부터 법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2018
년 담마와나 선원에서 빤냐와로 스님으로 부터 담마다사(Dhammadasa)’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 말은 법의 거울(
法鏡)’이라는 뜻이다. 글을 쓸 때가르침의 거울이 되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때 아홉 명이 함께 받았다. 과연 나는 법의 거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빤냐와로 스님을 알게 된 것은 이 시대의 행운이다.


2021-07-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