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냐와로 스님이 KTX타고 서울에 온 것은
오늘 오전 청파동에 갔었다. 평일임에도 시간 내었다. 안양에서 청파동까지는 20여키로로 한시간 약간 넘게 걸린다. 9시 반 도착목표로 8시 30분에 출발했다. 도착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주차문제로 인하여 시간을 허비했다.
담마와나선원에 들어 가기 전에 빵을 샀다. 선원 바로 앞에 빵집이 있는데 동네빵집이다. 고급으로 세 개 샀다. 다음으로 꽃을 샀다. 숙대정문 방향에 꽃가게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장미꽃 세 송이 샀다. 개별포장된 것이다. 불, 법, 승 삼보에 공양 올릴 꽃이다.
6월 30일 수요일은 평범한 날이다. 그럼에도 울주에서 빤냐와로 스님이 올라왔다. 아침에 울산에서 KTX타고 온 것이다.
스님은 왜 서울로 올라왔을까? 몸도 불편한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올라온 이유는 무엇일까?
담마와나선원에 공덕회가 있다. 담마와나공덕회라고 한다. 스님 공양 차려 주는 모임이다. 당번을 정해서 매일 점심을 차려 주는 것이다.
테라와다스님들은 주지 않는 것을 먹지 않는다. 조리된 것만 받아먹는다. 또한 오후에는 먹지 않는다. 하루 한끼 식사를 제공하는데 당번을 정해서 시행하는 것이다. 남자 재가자의 경우 식당에서 청식(請食)형식으로 하기도 한다. 대개 여자 재가자들이 집에서 조리된 음식을 제공한다.
담마와나공덕회에서 빤냐와로 스님 공양이야기가 나왔다. 공양도 올리고 법문도 듣는 등 계획을 세웠다. 울주로 가는 날자까지 결정되었다. 그런데 스님이 서울로 올라온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대신 서울에서 공양 올리기로 했다.
스님은 왜 서울로 올라온 것일까? 아마도 재가자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마치 명절날 부모가 서울에 올라오는 것 같다. 빤냐와로 스님도 ‘역귀성’하듯이 올라온 것이다.
재가자들은 공양준비에 바빴다. 각자 가져온 음식을 이용해서 상을 차리는 것이다. 정성 들여 만든 최상의 음식이다. 음식공양이야말로 공덕중의 공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가져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해서 우정도 쌓인다. 수계동기도 보였다. 담마기리님과 수마띠님이 왔다.
점심공양은 11시부터 시작한다. 12시 이전에는 끝내야 한다. 정오가 넘어가면 오후가 되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점심공양에 앞서 법문이 있었다. 빤냐와로 스님이 30분가량 짤막한 법문을 한 것이다.
빤나와로 스님은 ‘행복하기 위한 인과법칙’과 ‘인간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요소’에 대해서 법문했다. 법문한 것을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 듣고 지나가버리면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듣기도 할 수 없다. 잘 새겨듣든가 기록해 놓아야 한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은 들을 만하다. 한마디한마디가 새겨들을 만하다. 아마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 노트한 것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나누어 준 프린트와 대조해 보았다. 건질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이런 이유로 일부로 참석하여 듣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네 가지를 말했다. 계율, 인내, 일관성, 지혜를 말한다.
빤냐와로 스님은 가장 먼저 ‘마음의 인과법칙’을 설명했다. 선한 마음을 내면 선한 영향을 주고 악한 마음을 내면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받을 수 있지만 나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선한 영향을 받고 싶으면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을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 한마디로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 대신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선한 마음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내마음을 깨끗이 한다면 세상이 달라져 보일 것이다. 이는 조건을 바꾸는 것이다. 남편을 내뜻대로 하기 보다는 자신을 온화하게 바꾸면 주위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했다.
빤냐와로 스님은 계행과 관련하여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계는 억지로 지키면 답답하다. 바람이 불어도 시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지혜와 결합된 계행은 시원한 바람과도 같다는 것이다.
살생하지 말라고 했을 때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살생에 대하여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입니다. 그는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에 전념하고 뭇삶에 대한 자비심이 없습니다.”(M41.7)라는 경전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런데 자비는 지혜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지혜가 없으면 자비도 없게 된다.
계행을 잘 지키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살생했을 때 그 과보를 생각한다면 살생할 수 없을 것이다. 도둑질이나 음행도 마찬가지이다.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도 수호되지 않고 타인도 수호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불살생에 대한 지혜는 다름 아닌 평등의 지혜에 해당된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 내가 죽일 권리가 없다.”라는 지혜가 생겨나면 동시에 자비의 마음도 생겨나서 불살생계를 지킬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지혜와 자비는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빤냐와로 스님은 계행을 잘 지키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청량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를 수행과 관련해서도 설명했다. 수행이 잘 되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분명히 드러났을 때 마치 머리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계행은 지혜와 관련이 있고, 지혜는 수행으로 성취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행은 인내가 바탕이 된다는 사실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인내(khanti)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다. 어떤 인내를 말하는가? 고행을 뜻하는 띠띳까(tittika)의 뜻도 있지만 수행과 관련된 인내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대상을 잘 관찰하면 자연스럽게 인내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인내라 하여 반드시 극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대하여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이것도 인내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 있는 말씀을 들어서 “불선업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해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상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을 하면 대상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는 인내로 달성된다. 그렇다면 인내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어디까지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를 들었다. 이를 ‘행사지(行捨智)’ 또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라고 한다. 이 행사지단계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인내의 완성’이라고 했다.
상카루뻭카냐나 단계는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최상의 위빠사나 지혜에 해당된다. 다음 단계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지혜가 된다. 이는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릴 때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 상태를 알면 외부적 대상에 마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평온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최상의 지혜, 상카루뻭카냐나의 단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재미 있는 비유를 했다. 이는 “형성들에 대하여 마치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되고 ‘나’와 ‘나의 것’을 붙잡지 않는다.”(Vism. 21.61)라고 표현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혼한 아내는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다. 나의 아내가 아니므로 남이다. 남이 행위하는 것에 대하여 나의 일처럼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평등의 예로서 이혼한 아내 보듯이 무관심과 중립적인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행사지에 대하여 ‘인내의 완성’이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과거생에 수행자로 살았을 때의 일이다. 왕이 인내에 대해서 물었다. 수행자는 “인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비난하거나 화내거나 때렸다고 해도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인내는 먼저 화내지 않는 것에서 시작 됨을 알 수 있다.
화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 주었을 때 분노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인일 것이다. 탐, 진, 치가 소멸된 아라한 정도는 되어야 분노에서 자유롭다.
성자의 흐름에도 들지 못한 범부는 쉽게 분노한다. 흥분했을 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곳에 싸움 그칠 날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노가 죄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분노가 왜 죄악일까? 이는 분노에 대하여 "그는 ‘이 뭇 삶들은 살해되고 피살되고 도살되고 파멸되어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고 해칠 의도를 갖습니다.”(M41)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분노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화 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칠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악인 것이다.
분노는 인내함으로써 억압된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계는 자동으로 지켜 진다. 계를 지키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게 된다.
지계하는 것은 자타를 수호하는 것이 된다. 살인하는 것은 분노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적개심과 증오심이 극에 달했을 때 살인할 것이다. 오계를 지키는 것은 자신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타인도 수호하는 것이 된다. 그 밑바탕에는 인내가 있다. 그런 인내는 수행으로 완성되는데, 상카루뻭카냐나단계가 인내의 완성단계라고 했다.
법문이 끝나고 점심공양이 있었다. 세 분 스님이 참석했다. 빤냐와로 스님, 빤냐완따 스님, 떼자사미 스님을 말한다. 재가자는 15명 참석했다. 코로나 시기라서 비공식적 모임에도 다들 알아서 참석한 것이다.
자주 보면 익숙하다. 스님 공양으로 인하여 몇 번 참석했더니 선원 봉사자들의 낯이 익다.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마음이 되는 것 같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팔을 걷어 부쳤다. 평소 설거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점심공양이 끝나고 12시부터 1시까지 1시간 동안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평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시간이다. 주로 수행에 대한 것이 많다. 듣기만 했다. 선정단계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출가해서 10년 수행해야 4선정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남았다.
빤냐와로 스님은 어떤 질문이라도 막힘이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수액을 맞아 가면서도 답을 해 준다. 멀리 일부러 찾아와서 법문하고 공양하고 수행점검 해준 것이다. 그리고서는 곧바로 KTX타고 내려 갔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질문에 대답까지 해 준다면 더욱 더 피곤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찾아와서 법문하고 밥을 먹고 점검해 주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21-06-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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