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와나선원

2020 한국테라와다불교 까티나 가사법요식에 참석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 19:43

 

2020 한국테라와다불교 까티나 가사법요식에 참석하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까티나법요식이 담마와나선원에서 열렸다. 지난 75월 안거에 들어간지 4개월만이다. 안거를 마치며 한달이내에 까티나법요식을 해야 한다. 올해의 경우 111일에 열렸다.

 

이주민 공동체의 카티나 축제는

 

까티나법요식을 가사법요식라고 말 할수도 있다. 안거가 끝난 스님들에게 가사를 보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까티나법요식에 참석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018년 의정부시에 열렸던 담마까야까티나법요식이다.

 

담마까야 법요식은 태국불자공동체에서 주관한 것이다. 순수하게 태국식으로 진행되었다. 태국에 가지 않고서도 태국 승가공동체의 삶을 알 수 있게 해 준 일종의 문화체험이었다. 이에 대하여 한국속의 태국불교공동체, 의정부 담마까야(法身寺) 2018 까티나축제’(2018-11-12)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다.

 

이 밖에도 2019년에는 남양주에 있는 스리랑카불교공동체의 마하보디사 까티나축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평소 보시하고 싶은 수행자에게, 2019 양주 마하보디사 까티나축’(2019-10-21)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외국 이주민들이 와서 살고 있다. 그 중에는 불교국가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불교공동체가 대표적이다. 이들 불교국가들의 최대 불교행사 중의 하나가 까티나축제이다. 이름 그대로 축제인 것이다. 이날 하루만큼은 이주민들이 모여서 법문도 듣고 음식도 나누는 등 자신들의 전통대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행사에 객으로 참여하여 문화체험한 것이다.

 

우리나라 까티나법요식은 어떤 것일까? 아직까지 전통이 깊지 않아서인지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가사를 공양하고 법문듣고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번 2020년 담마와나 까티나법요식 역시 예년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패할 염려가 없는 공양물

 

법요식을 앞두고 보시물을 무엇으로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했다. 카티나법요식이 열릴 예정인 111일 당일날 아침에도 결정하지 못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일요일 아침이라 문 여는 곳도 없다.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면도기를 공양물로 보시하는 것이다.

 

면도기는 남자들에게는 필수품이다. 하루에 한번 또는 이틀에 한번 면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면도기는 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두 비구인 승가에서 면도기는 요긴 한 것이다. 절대 실패할 염려가 없는 공양물이다.

 

남영역에서 내렸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서 면도기를 샀다.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은 것이다. 열 개 구입하려 했으나 그렇게 많이 팔지 않는다. 모두 일곱 개를 구입했다. 청파동 담마와나선원 부근에서 빵을 샀다. 스님들에게 공양할 것이므로 고급으로 준비했다. 이렇게 면도기와 빵을 들고 선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탁발행사가 종료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에게 보시했다. 늦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건넨 것이다.

 

 

 

스님들에게 있어서 가사는

 

우리나라 까티나법요식에는 한국사람들만 참석한다. 예년과 달리 법당이 꽉 찼다. 테라와다불교 최대 축제날이기 때문이다. 봄에 열리는 붓다데이와 함께 까티나법요식은 축제날이나 다름없다. 안거가 끝난 스님들에게 가사공양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사는 선원 보시자들이 미리 준비해 놓았다. 이날 참석한 스님들은 모두 11명이다. 본래 자신이 존경하는 스님에게 가사 보시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일부 스님에게만 가사를 보시할 수 없다. 골고루 보시해야 한다.

 

 

스님들에게 있어서 가사는 늘 입는 옷이다. 평시에도 입고 행사때도 입고, 심지어 가사를 입고 자기도 한다. 하루 종일, 일년 내내 가사를 입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사를 보시하는 것은 큰 공덕이다.

 

시인스님이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완따스님을 말한다. 스님의 시집 발바닥에 핀 연꽃가사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스님은 가사는 부처님께서 친히 정해주신 옷이다.”라고 했다. 가사에는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이 깃들어 있고 생사해탈을 향한 출가자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또 스님은 가사는 세상에서 가장 검소한 옷이다.”라고 했다. 세속의 화려한 옷을 벗어 놓고 처음 출가한 날 입은 옷이기 때문이다. 또 시인스님은 가사에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노모의 슬픔이 서려 있고라고 했다. 이 밖에도 가사에는 주머니가 없는 옷이라고 했다. 이런 가사는 출가해서 처음 입는 옷이자 세상과 인연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도 입는 옷이라고 했다.

 

 

빠맛따(pamatta)에 대하여

 

가사공양이 끝나고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법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수행에 대한 것이다. 첫째, 탐진치로 대상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둘째, 쓸데없이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셋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빠맛따(pamatta)에 대한 것이다. 우리말로 게으름이라고 하고 한자어로는 방일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negligent’가 된다.

 

방일을 뜻하는 빠맛따는 수행자라면 피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명상에 있어서 게으름이다.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불선이다. 마음이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을 말한다.

 

빠맛따와 반대되는 말은 압빠마다(appamāda)이다. 한자어로 불방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부처님이 최후로 당부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직전에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라 하여,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이 말에 대하여 새김(sati)을 잃어버리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 라고 풀이한다.

 

대상을 열심히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삼장법사는 대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호흡을 관찰했을 때 호흡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아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반드시 신체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하는 마음도 보아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변화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탐, , 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방일은 탐, , 치와 동의어이다.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지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게으른 수행자라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이어지는 법문에서 빠맛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탐진치로 왜곡할 때

 

첫째, 빠맛따는 대상에 대하여 탐진치로 왜곡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명상주제를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 대상이 변화하고 있는 것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수행자는 ,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행복감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행복한 상태에 머물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탐진치로 대상을 왜곡한다고 보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상수멸정을 제외하고 모두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정에 들어서 삐띠(희열)나 수카(행복)을 느껴도 이는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 나는 행복하다.”라고 하며 앉아 있다면 이는 탐진치로 대상을 왜곡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청정도론을 보면 열 가지 경계가 있다. 잘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만 나타나는 열 가지를 말한다. 이를 통찰의 경계적 오염(vipassanupakkilesa)’ 이라 하는데 빛, , 희열, 안온, 행복, 확신, 분발, 확립, 평정, 욕구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한다. 빤냐와로 스님은 이와 같은 열 가지 경계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게으른 수행자는 열 가지 경계에 빠지기 쉽다. 수행중에 빛을 본다거나 희열, 행복을 느꼈을 때 현재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빛을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어떻게 진리라고 생각하여 흥분에 정신이 사로잡히는가? 1) 무상이라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 빛이 생겨난다. ‘빛은 진리이다.’라고 빛으로 전향한다. 그 때문에 산만해지는 것이 흥분이다. 그 흥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무상으로 확립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괴로움으로 확립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실체가 없음으로 확립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Vism.20.106)

 

 

여기서는 빛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앎, 희열, 안온, 행복 등도 똑 같다. 흥분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은 탐심이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근본적 명상주제를 포기하고 빛만의 유혹에 빠져 앉아 있는 것이다.”(Vism.20.107)라고 했다. 빠냐와로 스님은 이런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부지런한 수행자라면 모든 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을 말한다.

 

수행자가 수행중에 빛을 즐기고 앉아 있다든가, 희열을 즐기며 앉아 있다든가 행복을 즐기며 앉아 있다면, 그는 게으른 수행자일 것이다. 그래서 빤냐와로 스님은 탐진치 없이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 부지런한 수행자라고 했다.

 

 

쓸데없는 판단을 할 때

 

둘째, 빠맛따는 쓸데없는 판단을 하게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할까? 예를 들어, 수행 중에 내가 상카루뻭카냐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닐까?”라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1번째 단계로서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이는 착각이다. 또 망상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사띠를 놓치니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수행점검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승이 해 주는 것이다. 스승에게 수행보고를 했을 때 스승은 제자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어느 단계에 있다고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더욱 더 분발해서 정진하라는 식으로 말해 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망상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는 수행중에 알 수 없다. 수행이 끝난 후에 반조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해탈하면 이어서 해탈지견이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룬 순간에 대하여 그는 실로 나는 이 길로 왔다.’라고 길을 성찰하고, 그 다음에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를 성찰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고 제거된 오염을 성찰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Vism.22.20)라고 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

 

셋째, 빠맛따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삼특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무상, , 무아라는 세 가지 특징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 가지 통찰의 경계적 오염이 일어났을 때 길과 길이 아님(道非道)’을 판별하라고 했다. 예를 들어 수행 중에 빛을 보았다면 나에게 이러한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파괴적인 것이고, 괴멸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고, 소멸되기 마련이다.”(Vism.20.126)라고 이와 같이 지혜로써 판별하고 고찰해야 한다고 했다.

 

열반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무상한 것이다. 빛도 예외가 아니다. 빛에 대하여 유위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는 조작된 것을 말한다. 삼매도 조작된 것임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유위적인 것은 항상한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것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수행중에 빛을 즐기고 있다면 지혜로운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어리석음이 생겨났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견해, 자만, 갈애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빛 등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나의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고, ‘는 자만에 대한 것이고, ‘자아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수행자가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사로 잡혔을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무상, , 무아라는 세 가지 특징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빛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희열이나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수행을 어느 정도 하는 사람에게 열 가지 경계적 오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통찰의 경계적 오염은 진리를 꿰뚫은 고귀한 제자나 삿된 행도를 닦아 명상주제를 놓아 버린 게으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Vism.20.105)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제대로 수행하면 빛, 희열, 행복 등 열 가지 통찰적 경계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다만 대상에 빠져 든다면 탐, , 치에 따른 게으른 수행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수행의 맛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빛도 보이지 않고 희열도 행복도 경험하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이대로 괜찮다고 하여 더 이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둘째, 번뇌가 일어나 감정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다. 셋째, 수행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수행자로 살면 이대로 살 수 없다. 이대로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며 살고자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지 않고 살면 번뇌로 인하여 살 수 없을 것이다. 수행하지 않고 살면 그 어떤 행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수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고통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실천을 강조했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도하라.”라고 말하지만 테라와다에서는 이런 말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실천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당부의 말로서 열심히 공부할거죠?”라고 물었다.

 

축복게송

 

모든 의식은 정해진 식순에 따라 진행되었다. 준비된 프린트물에는 빠알리어와 우리말로 되어 있어서 따라 하면 된다. 그 중에 축복게송이 있다. 장로스님인 빤야와로 스님이 독송했다.

 

 

가득 찬 강물 넓게 뻗어내려 큰 바다를 가득 채우듯이,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가득하기를!

여기 모인 이들에게 바로 공덕이 되듯이,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이 내리기를!

그대가 원하고 바라는 어떤 것이라도 속히 성취되기를!

마치 보름날 둥근달이 떠오르듯,

밝고 찬란하게 빛을 내는 구슬처럼,

그대가 뜻한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참기쁨 누리기를!”

 

 

축복게송을 보면 살아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죽은 자에게도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공덕의 회향이다. 오늘 지은 보시, 지계, 수행 공덕이 돌아 가신 부모와 친지, 조상, 그리고 모든 존재들에게 남김 없이 회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회향게송을 독송할 때 이당 메 뿐냐--강 삽베-삿따 위바-제미(ida me puññabhaga sabbe satta bhājemi)”라고 말한다. 이는 저의 이와 같은 공덕 부분을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합니다.”라는 뜻이다.

 

즐거운 점심공양시간

 

모든 의식이 끝났다. 다음은 점심공양시간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선원에서 식사할 수 없다. 재가불자들은 밖에 나가서 식사했다. 대로 건너편에 있는 중국식당이다. 지난 7월 안거법회 때에도 식사했던 곳이기도 하다. 스님들은 상가회의가 있어서 선원에서 식사했다.

 

중국식당에 모두 모이니 이층이 꽉 찼다. 일곱 테이블이다. 모인 인원이 27명 가량 된다.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짜장면, 짬뽕, 볶음밥 등을 신청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입맛에 맞는 것은 기스면이다.

 

 

전식으로는 탕수욕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만두가 서비스로 제공되었다. 오랜 만에 모여 식사를 하니 여기저기서 이야기 꽃이 피었다. 테라와다불자들은 대승불자들과 달리 모일 기회가 별로 없다. 이른바 비공식활동 모임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 다녀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른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하여 밖에서 식사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대화의 광장이 마련되었다.

 

 

아들을 출가시킨 스님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스님들은 법보시한다. 특히 선원에서 보시하는 재가불자들의 노고가 크다. 테라와다스님들은 오후 불식하기 때문에 점심을 차려 주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선원봉사들이 있다. 이런 노력이 있어서 척박한 한국불교 현실에서도 상가가 유지해 오고 있다고 본다.

 

오늘 까티나축제에는 모두 11명의 스님이 참석했다. 그 중에는 부자지간에 참석한 스님도 있다. 사사나스님과 악가삿또 스님이다. 사사나스님은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공덕이 있을까? 아마 십억, 백억을 보시하는 것 보다 더 수승할 것이다.

 

율장대품에 라훌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지 일년 뒤에 까삘라밧투를 방문했었을 때의 일이다. 라훌라의 어머니 야소다라 왕비는 어린 라훌라에게 말했다. 야소다라는 라훌라야, 이분이 아버지이다. 유산을 달라고 해라.”(Vin.I.82)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일곱 살 정도 되는 라훌라는 부처님에게 가서 수행자여, 제게 유산을 주십시오. 수행자여, 제게 유산을 주십시오.”(Vin.I.82)라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사리뿟따에게 싸리뿟따여, 그렇다면, 그대가 왕자를 출가시켜라.”(Vin.I.82)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유산을 달라는 일곱살 먹은 아들을 출가시켰다. 부처님이 외동아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유산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느 유산보다도 고귀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승가에 부자지간의 스님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아들스님은 프랑스유학파라고 한다. 사사나 스님은 아들에게 물질적 유산을 물려 주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유산을 물려 주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이만한 불사가 없을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사사나 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에 큰공덕을 지었다고 본다.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집과 빤냐완따 스님의 소책자

 

선원에서는 오늘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빤냐와로스님의 법문집과 빤냐완따 스님의 행선에 대한 소책자이다. 특히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집을 보면 그 동안 법문했던 것을 녹취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지만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지 않은 오래 전의 것도 있다.

 

 

도반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부슬비 내리는 일요일 까티나법요식에 참석했다. 이제 매년 있는 일이 되었다. 더구나 테라와다불교 국가 이주민공동체의 까티나행사도 참여한다. 한국의 행사와는 다른 모습이다. 무엇보다 이국적이다. 불교행사이기도 하지만 문화행사도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오랜만에 빤냐와로 스님 법문도 듣고 도반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커피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2020-11-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