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힘들 때 마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주문외듯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31. 15:56

힘들 때 마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주문외듯이

 

 

온라인 줌으로 진행된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두 번째 경을 독송했다. 교재인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동료수행자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지혜도 계발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존중이 없음의 경(dutiyagārava)’(A5.22)이다.

 

도반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동료수행자라 하면 도반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하는 도반은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친구의 경에서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S3.18)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반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수행승이 동료수행자에 대하여 존중이 없고 공경이 없고 화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학인의 규칙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학인의 규칙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행의 다발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계행의 다발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삼매의 다발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삼매의 다발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지혜의 다발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A5.22)

 

 

법수가 다섯 개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열해 보면 1)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 2)학인의 규칙, 3)계행의 다발, 4)삼매의 다발, 5)지혜의 다발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 원문에서 찾아보니 ābhisamācārika dhamma, sekha dhamma, sīlakkhandha, samādhikkhandha, paññākkhandha라고 되어 있다.

 

다섯 가지가 없으면 동료 수행자에 대하여 존중도 없고 공경도 없다고 했다. 청정한 삶에 있어서 도반은 인생의 전부와 같다고 했는데, 동료수행자에 대한 존중과 공경이 없다면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외롭고 힘든 길이 될 것이다.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한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이럴 때는 각주를 보아야 한다.

 

소소계(小小戒)를 지켜야

 

첫번째로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ābhisamācārika dhamma)’이 있다. 이는 주석에 따르면, “수행승이 자신의 친교사와 스승과 장로들에 대한 품행이나 의무를 말한다.”(Mrp.III.228)라고 설명되어 있다. 동료에 대한 존중과 공경이 있으려면 먼저 스승에 대한 존중과 공경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이를 ābhisamācārikasīla’라고 했다.

 

아비사마짜리까실라와 유사한 말이 아비사마짜리까 식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르고 원만한 실천에 대한 배움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배움의 공덕의 경’(A4.243)을 근거로 한다. 부처님이 배움이라 했을 때 이는 계, , 혜 삼학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도 계학에 대한 것이 아비사마짜리까실라이다. 주석에서는 소소한 학습계율(小小戒)를 말한다.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ābhisamācārika dhamma)’라고 한 것은 소소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학습계율의 경에서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에 대한 항목을 보면,“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A3.87)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된다.

 

수행자의 올바른 생계는

 

두번째로, 학인의 규칙(sekha dhamma, sīlakkhandha)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수행승이 식사하거나 가사를 갖추거나 거리를 유행하거나 재가자를 방문하는 등에 대한 학습계율을 말한다.”(Mrp.III.228)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학인은 세카를 번역한 말이다. 빠알리경전에서 세카는 사향사과에서 아라한을 제외한 과위를 가진 제자를 말한다. 모두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제자들이다.

 

세카는 탁발을 해도 부처님의 은혜로 먹는 자에 해당된다. 빚진 자로서 먹지 않음을 말한다. 밥값은 하는 수행승임을 말한다. 그런 학인에게 있어서 외적인 활동에 있어서 규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학인의 규칙은 올바른 생계와 관련이 있다. 수행승에게 올바른 생계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여덟 가지 청정이 있다. 이는 세 가지 신체적 행위, 네 가지 언어적 행위, 이렇게 일곱 가지 청정한 행위에다가 여덟 번째로 올바른 생계를 포함하면 여덟 가지 청정이 있게 된다. 여기서 여덟 번째 올바른 생계에 대하여청정도론에서는 그리고 청정한 삶의 길에서 기반이 되는 것으로 기반적 청정행의 계행”(Vism.1.27)이라고 했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생계의 청정은 학인의 규칙과 같은 말이다. 이는 주석에서 수행승이 식사하거나 가사를 갖추거나 거리를 유행하거나 재가자를 방문하는 등에 대한 학습계율을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탁발할 때와 재가자를 방문할 때에도 청정해야 함을 말하는데, 이는 학인에게 있어서 생계의 청정에 해당된다.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이 있는데

 

세번째로 계행의 다발(sīlakkhandha)에 대한 것이다. 이는 주석에서커다란 계행[大戒: mahāsilānī]”(Mrp.III.228)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청정도론을 인용하여 네 가지 청정한 계행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네 가지 청정한 계행에 대하여 청정도론을 찾아 보았다. 지시한 대로 찾아 보니 이는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에서 인용한 문구에 대한 설명이다. 경에서는 이와 같이 출가해서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지켜서 행동범주를 완성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D2.40)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을 근거로 하여 청정도론에서는네 가지 청정한 계행’(Vism.1.98)이 설명되어 있다. , 1)계율수호적 계행의 성취, 2)감관제어적 계행의 성취, 2)생활청정적 계행의 성취, 3)필수자구적 계행의 성취에 대한 것이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위하여

 

네번째로 삼매의 다발(samādhikkhandha)’이다. 이는 길에서의 집중과 경지에서의 집중이라고 주석이 되어 있다. 단순히 대상에 집중한 상태가 아니라 사향사과와 열반을 얻기 위한 삼매를 말한다. 다섯번째로 지혜의 다발(paññākkhandha)이다. 이 말은 통찰에 의한 올바른 견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빠알리어 ‘vipassanāsammādiṭṭhi’를 풀이한 것이다.

 

부처님은 동료수행자간에 존중과 공경과 화합이 없으면 결코 실현 될 수 없는 것 다섯 가지를 말씀 하셨다. 그것은 소소한 계를 지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수행자의 생계를 올바르게 해야 하고 대계를 지켜야 한다. 여기까지가 계학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계학을 바탕으로 삼매와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목적은 사향사과와 열반이다.

 

경을 독송한 것에 대하여 그 의미를 새겨 보았다. 각주에 실려 있는 주석을 참고하여 글을 쓰다 보니 길어졌다. 이는 경이나 논서에서 인용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용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명확하게 알게 된다.

 

경을 읽고 설명을 듣고 토론하고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은 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또 전재성선생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경을 독송하고 설명을 들으면서 궁금한 것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이다. 주제와 관련된 것으로 한정되고 5분 이내로 짧게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 범주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크게 본다면 모두 가르침과 관련 있는 것이다.

 

J도반이 지식에서 지혜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먼저 분노가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식을 예로 들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다 알고 있다. 자식이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자식 때문에 속썩을 일도 많음을 말한다. 자식이 속 썩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화를 내는 것이다. 심하면 몽둥이까지 들 것이다.

 

자식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심리상담가에 따르면 이는 나중에 성장했을 때 큰 문제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자신의 자식에 대한 예를 들어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

 

전재성 선생의 강연을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 아마 육칠년 된 것 같다. 동국대 정각원에서 강연한 것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그 강연에서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 대목이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니까야강독시간에 이 말을 수 없이 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새롭다. 왜 그럴까?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여기 불행하고 가난한 자가 있다. 지하계단 내려 가는 곳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면 불쌍하게 생각하여 돈이나 빵을 줄지 모른다. 공덕을 짓는 훌륭한 행위이다. 더 좋은 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는 동등한 차원에서 내는 연민을 말한다. 걸인이 불쌍하다고 하여 단지 돈을 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월적인 자만이 될 수 있다.

 

불교에서 자만은 불선업에 속한다. 흔히 내가 누군데!”또는 내가 누군데 감히!”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하면 동등한 위치가 되어 자만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을 가장 부처님 답게 만드는 대답

 

전재성 선생은 틈만 나면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먼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말씀 하시고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

 

 

불교경전에서 이런 말을 보기 힘들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가르침근본부터 갖가지 팔만사천 가지 가르침이 있지만 이런 가르침을 보기 힘들다. 한역 아함경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니까야에서만 보인다. 그것도 상윳따니까에서 볼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은 이 구절에 대하여 부처님을 가장 부처님 답게 만드는 대답입니다.”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니까야를 번역하면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을 접하고 큰 힘을 받았다고 한다. 이 구절 하나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고 한다.

 

부처님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높은 가르침을 펼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추상적일 수 있다. 이럴 때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말이 더 절실하게 다가 올 수 있다.

 

누군가 범아일여와 같은 합일을 말할 수 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그래서 어쩌자구요?”라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하면 공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동등한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다. 놀랍게도 니까야에서는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게도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동등한 마음을 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을 부처님 답게 하는 탁월한 가르침이다.

 

부자도 연민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가?

 

L도반이 질문했다. L 도반은부자에게도 연민이 가능할까요?”라고 질문했다. 가난한 자에게 연민의 마음을 내듯이 부자에게도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연민 보다는 시기와 질투하기 쉬울 것이다.

 

부자는 일반적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가난한자가 부자보다 숫자가 훨씬 더 많은 것도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이유없는 분노를 가지게 된다. 이런 경향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도 이유 없는 반감을 가지는 것도 해당된다.

 

가난한 자에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동등한 연민심을 내듯이, 똑 같은 마음으로 부자에게도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동등한 연민심리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가능하다고 했다. 왜 그런가? 부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예산에 있어서 여유가 있거나 한정이 없을 때 쉽게 쾌락에 빠질 수 있다.

 

부처님은 니까야 도처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하여 재난과 같다고 설했다. 먹는 즐거움을 넘어, 도박, 섹스, 마약에 이르기까지 예산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감각적 쾌락의 늪에 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연민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40여년만의 무죄판결

 

전재성 선생은 한때 운동권이었다. 70년대 유신시절에 대불련 회장을 했는데 그때 감옥에 갔었다. 그때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으로 보고 부자는 분노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득권자에 대한 분노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들을 단지 분노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평생 갈 것이다. 이럴 때 생각을 바꾸어 볼 수 있다.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느 정도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평생 가지도 않을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최근 감옥 간 것에 대하여 무죄판결이 났다고 한다. 무려 40년 넘게 걸려 판결 난 것이다. 그래서 보상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가난한 자와 약자를 위해서 기득권에 분노하여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40년만의 무죄판결은 정의로운 분노에 대한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 부처님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가르침을 접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돌고 도는 것이 윤회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다. 오늘의 나는 내일과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거 전생의 나는 수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부유하고 부자로 산 적도 있었고 불행하고 가난한 자로 산적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았을 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야 한다. 그래야 우월적 자만에 따른 연민이 생겨나지 않는다. 또 행복하고 부유한 자를 보았을 때 역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야 한다. 그래야 열등적 자만에 따른 분노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런 가르침은 부처님에게만 볼 수 있다. 한역 아함경에도 없는 가르침이다.

 

B선생은 심리상담가이다. B선생은 전재성 선생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상담할 때도 이와 유사하게 적용한다고 했다. 상담할 때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월적 자만에 따른 연민을 내려 놓는 것과 같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한때 나도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음을 말한다.

 

힘들 때마다 주문 외듯이

 

세상 살기가 쉽지 않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뜻대로 되지 않고 자식은 더욱 더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뜻대로 하고자 한다. 저 사람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이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분노하면 나만 괴롭다. 세상이 내뜻대로 되지 않을 때, 세상이 괴로울 때 주문처럼 외는 말이 있다. 그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도, 부자에게도, 권력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것 저것 다 겪어 보았고, 할짓 못할 짓 다 해 보았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연민의 마음을 낸 다음 이렇게 하라고 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2)

 

이런 긴 글을 누가

 

이번 금요모임에서 두번째로 독송한 경에 대하여 의미를 파악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이것저것 많은 자료를 참고했다. 이런 글쓰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이번 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의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이야기에 여러 사람들이 공감했다. 삶이 힘들 때 이 말을 주문처럼 왼다면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전재성 선생은 이 문구 하나로 어려움을 헤쳐 왔다고 한다.

 

글이 길어졌다. 금요모임 후기를 작성하면 글이 길어진다. 그것은 인용이 많기 때문이다. 또 들은 것을 회상하며 글로 옮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기를 작성하면 두 번, 세 번 들은 효과가 있다. 또 공유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긴 글을 읽어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간낭비가 아니라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글이 된다면 글 쓴 보람을 느낄 것 같다.

 

 

2021-01-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