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번뇌의 반대가 되는 것이 계행
금요니까야강독모임날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대면과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대면 모임에 참석했다. 5인 이상 집합금지에 따라서 4명까지에 한 한다. 대면 모임에는 3명이 참석했다. 이외 사람들은 온라인 줌으로 참여했다.
2월 넷째주 금요모임에서는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가장 첫번째로 합송한 경은 ‘올바른 견해는 어떻게 계발된 것이고 어떠한 열매를 맺는가?’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계발의 경(Anuggahitasuttaṃ)’(A5.23)이라고 되어 있다. 핵심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올바른 견해는 계행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고, 배움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고, 대화를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고, 멈춤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고, 통찰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다.”(A5.23)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 계행, 배움, 대화, 멈춤, 통찰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를 계발하면 올바른 견해라는 것이다.
올바른 견해를 정견이라고 한다. 흔히 알고 있는 정견은 팔정도에서 정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다. 그러나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정견은 다르다. 계행, 배움, 대화, 멈춤, 통찰을 계발하는 것이 정견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 번역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위빳사나를 통한 바른 견해(vipassana-sammādiṭṭhi)”라고 했다.
팔정도의 절정은 삼마사마디
정견과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커다른 마흔의 경’(M117)을 찾아보았다. 경에 따르면 올바른 삼매와 관련이 있다. 올바른 삼매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것은 팔정도에 있는 정견에서부터 정념까지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의 포커스는 정정에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팔정도경을 매일 암송하고 있다. 작년 12월에 외운 이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치 예불하듯이 암송한다. 암송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팔정도의 절정은 삼마사마디라는 것이다. 그것도 네 번째 선정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우뻭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이다. 이 말은 한자어로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지극히 청정한”(S45.8)의 뜻이 된다.
금강경에서 클라이막스는 아마도 대승정종분일 것이다. 금강경을 암송할 때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변중생 여시멸도무량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 實無衆生得滅度者)” 부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이는 “내가 남김없이 다 부처되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여 이와같이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 없느니라.”라는 뜻이다. 빠알리 팔정도경을 암송할 때 네 번째 선정과 관련된 게송을 암송할 때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에서는 삼매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올바른 집중과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과 그것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M117)라 하여, 정견에서부터 정념까지 일곱 가지를 나열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팔정도가 삼마사마디를 포커스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섯 가지를 계발하면
맛지마니까야 117번 경에 따르면 팔정도에서는 정견이 나머지 일곱 가지를 이끈다. 팔정도에서 정견이 선두에 위치한 이유라고 본다. 그렇다면 정견이 왜 이끈다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형성된 것을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통찰”이고, 또 하나는 “통찰의 결과로 일어나고 번뇌의 근본적인 파괴를 가져오는 길에 대한 올바른 견해”(Pps.IV.131)라고 했다.
올바른 견해는 계행, 배움, 대화, 멈춤, 통찰을 계발하는 것으로 확립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위빠사나를 통한 바른 견해라고 했다. 또 맛지마니까야 117번 경에서는 정견에 대하여 삼법인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섯 가지를 계발하면 출세간적 정견이 됨을 알 수 있다.
계행은 땅과 같은 것
첫째, 올바른 견해는 계행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계행은 땅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계행이 왜 땅과 같은 것일까? 그것은 모든 것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만약 땅을 떠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런 이유로 한시도 계행에서 떠나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계행이 무너지면 존재가 무너집니다.”라고 했다.
여기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 분노하지 말아야 함에도 분노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분노하지 않는 것도 계행을 지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십선행에서는 분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천수경 십악행에서도 “진애중죄금일참회”라고 했다. 그렇다면 분노가 왜 파괴적으로 작용할까? 이는 “그러므로 분노하는 자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파괴를 일삼고 분노에 정복되어 사람은 재산을 잃는다네.”(A7.64)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탐, 진, 치가 파멸로 이끕니다.”라고 했다.
배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둘째, 올바른 견해는 배움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배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재성 선생은 학습이라고도 했다. 또 계, 정, 혜 삼학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배움에 대하여 빠알리 원문을 보니 ‘sutānuggahitā’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sutā’는 ‘learning’의 의미이다. 또한‘Ānuggahitā’는 ‘계속 붙잡는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빠알리 원문 “sutānuggahitā ca hoti”는 “배움을 통해서 계발되고”로 번역되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배움을 통해서 보호되고”로 번역되었다.
배움을 뜻하는 수따(suta)는 본래 ‘듣는다’는 뜻이다. 잘 듣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노트가 없었기 때문에 잘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들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했다.
기억한 것을 사유하고 새겨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기꺼이 설한다.”(A9.82)라고 했다.
가르침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한번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들으나 마나 한 것이 된다. 맛지마니까야 ‘학인의 경’(M53)에서는 고귀한 제자의 일곱가지 성품 중에서 기억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일곱 가지 중에 네 번째 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많이 배웁니다. 그는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저장합니다. 처음도 착하고, 중간도 착하고, 끝도 착하고,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추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청정한 삶을 설하는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많이 배우고 기억하고 언어로 외우고 마음으로 탐구하고 올바른 견해로써 꿰뚫어봅니다.”(M53.11)
배운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가르침을 기억해야 실천도 있다. 가르침을 알아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잘 듣는 것이 잘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잘 들으면 올바른 견해로써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질문과 토론을 강조한 부처님
셋째, 올바른 견해는 대화를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질문과 토론으로 설명했다. 대화는 질문과 토론으로 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담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대화를 강조한 것은 대화를 통해서 지혜를 계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현위치를 점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상윳따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대왕이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는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알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S3.11)
부처님이 빠세나디 왕에게 한 말이다. 경에 따르면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는 토론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현재의 정신적 위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질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알려거든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질문은 개인의 고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알아야 질문할 수 있는 것이다. 체험해야 질문 할 수 있다. 그래서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질문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인터뷰시간이 있다. 자신이 체험한 것을 스승에게 보고 하는 것이다. 스승은 수행보고를 통해서 제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질문 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어느 단계 지혜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음을 말한다.
대화는 상호간 질문에 따라 이루어진다. 질문하는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이다.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 알려면 토론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A4.192)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A4.192) 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잡담을 금지했다. 이는 팔정도경에서 “삼팝빨라빠 웨라마니(samphappalāpā veramaṇī)”(S45.8)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가십, 뒷담화와 같은 잡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담마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토론해도 좋다고 했다. 이는 아누룻다가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M128.2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누룻다여, 훌륭하다. 아누룻다여, 훌륭하다.”라고 하여 칭찬해 주었다.
사마타(samathā), 삼매(samādhi), 선정(jhāna)
넷째, 올바른 견해는 멈춤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멈춤은 사마타(samathā)를 말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멈춤으로 번역된 사마타는 광의의 뜻이라고 했다.
삼매와 관련하여 세 가지 용어가 있다. 그것은 사마타(samathā), 삼매(samādhi), 선정(jhāna)이라는 말이다. 같은 말 같지만 차이가 있다. 가장 광의의 뜻은 사마타이고, 그 다음은 사마디(삼매)이고, 그 다음은 자나(선정)라고 했다. 선정을 뜻하는 자나가 가장 협의적인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마타가 왜 광의적 삼매를 말하는 것일까? 이는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를 보면 알 수 있다. 까시나, 부정관, 각종 수념 등 사마타와 관련된 명상주제는 총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삼마사마디에서 네 가지 선정은 ‘자나’에 대한 것이다. 이는 팔정도경에서 “빠타망 자낭(paṭhamaṃ jhānaṃ)” “듀띠양 자낭(dutiyaṃ jhānaṃ)” “따띠양 자낭(tatiyaṃ jhānaṃ)” “짜뚯탕 자낭(catutthaṃ jhānaṃ)”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 협의의 삼매라 할 수 있다.
삼매는 광의의 삼매에서부터 협의의 삼매에까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사마타라고 하고 좀더 범위를 좁혀서 말하면 삼매가 된다. 가장 범위를 좁혀 말하면 개별적 선정이 된다. 이렇게 사마타(samathā), 삼매(samādhi), 선정(jhāna)은 비슷한 말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에서는 광의적 또는 포괄적 의미로서 사마타를 말했다. 이를 KPTS에서는 ‘멈춤’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찾아보니 ‘사마타’로 번역했다. 원어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위빠사나를 통해서 올바른 견해를
다섯째, 올바른 견해는 통찰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통찰은 위빠사나(vipassana)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원어 그대로 ‘위빳사나’라고 번역했다.
KPTS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멈춤과 통찰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광의의 뜻이고 포괄적인 뜻이다. 더 자세히 세밀하게 들어가면 다른 용어가 사용된다. 이처럼 니까야는 정교하다. 그래서 시스터메틱하다고 했다. 마치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 가는 것처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
경에서 올바른 견해는 위빠사나를 통한 바른 견해라고 했다. 이는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는 “통찰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다. (vipassanānuggahitā ca hoti)”(A5.23)라고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117번경 주석에서 “형성된 것을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통찰과, 통찰의 결과로 일어나고 번뇌의 근본적인 파괴를 가져오는 길에 대한 올바른 견해이다.”(Pps.IV.131)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망고의 비유
가르침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데 있어서 비유만한 것이 없다. 부처님은 수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르침을 설명했다. 경에서 언급된 올바른 견해를 갖추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즉 계행, 배움, 대화, 멈춤, 통찰을 계발하는 것에 대한 비유가 주석에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계발은 망고 나무를 키우는 사람에 비유된다. 통찰에 의한 올바른 견해는 달콤한 망고 씨앗을 심는 것과 같고, 계행에 의한 계발은 경계선을 만드는 것과 같고, 배움에 의한 계발은 물을 주는 것과 같고, 대화에 의한 계발은 나무 밑을 청소하는 것과 같고, 멈춤에 의한 계발은 해충의 제거와 같고, 통찰에 의한 계발은 거미줄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Mrp.III.229)
이와 같은 주석은 KPTS본에서 볼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KPTS에서는 주석을 직접 번역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망고의 비유를 보면 통찰이 두 번 나온다. 그래서 통찰, 계행, 배움, 대화, 멈춤, 통찰순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여섯 단계가 된다.
올바른 견해, 즉 정견을 갖는 것에 대하여 통찰에 의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부터 시작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형성된 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삼법인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만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망고 씨를 심는 것으로 비유했다.
종자는 심으면 발아한다. 물론 조건이 좋아야 한다. 토양도 좋아야 하고 기후도 좋아야 한다. 땅에 수분이 있어야 싹을 잘 틔울 것이다.
싹이 나면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 이후 과정이 경계선을 만드는 것을 계행(sīlā)으로 비유했고, 물을 주는 것을 배움(sutā)으로 비유했고, 나무 밑을 청소하는 것을 대화(sākacchā)로 비유했고, 해충을 제거하는 것을 멈춤(samathā)으로 비유했고, 마지막으로 거미줄을 제거하는 것을 통찰(vipassana)로 비유했다.
스승의 빈주먹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다.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지만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으면 보는 것으로 그치기 쉽다. 그래서 숙고 해야 한다. 여러 번 읽어 보고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주석을 보아야 한다. 다른 번역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언어로 표현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고 있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법이 전승된다는 사자상승을 떠 올리게 한다.
부처님은 가르침에 비밀이 없다고 했다. 이를 ‘사권(師拳)의 비유’로 설명했다. 스승의 꽉 움켜진 주먹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밀의 가르침이 없다는 말과 같다.
스승이 주먹을 움켜 쥐고 있을 때 제자들은 마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죽었을 때 주먹이 펴지게 되는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스승의 빈주먹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한 후대 사람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든 그날 밤에 이르기까지 모두 설했다고 말씀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It.12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이 말을 왜곡했다.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했을까? 이는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능가경 7권, 楞伽經之四)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이 45년 동안 8만4천 장광설을 했지만 열반에 들 때 “나는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왜곡이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설한 가르침에 대하여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사권은 없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깨달은 것에 대하여 언어로서 설명했다. 알아듣기 힘들면 비유로서 설명했다. 니까야를 열어 보면 수많은 비유를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언어로 설명했기 때문에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나는 한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여 주먹을 쥐고 있었다면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번뇌의 반대가 되는 것이 계행
2월 넷째주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은 온라인 줌으로 진행되었다.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지만 원하는 사람들은 대면모임에도 참가할 수 있다. 다만 3명 까지만 가능하다.
금요모임에 대면으로 참여했다. 줌으로 하는 비대면 보다 집중도가 확실히 높았다. 비대면이 편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면과 비교하면 집중도가 떨어진다.
모임이 끝났을 때 이구동성으로 이번 모임은 감명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전재성 선생의 설명이 자신이 처한 현실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은 아마도 계행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모든 번뇌의 반대가 되는 것이 계행입니다.”라고 말한 것도 해당될 것이다.
2021-02-28
담마다사 이병욱
'금요니까야모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0) | 2021.03.18 |
---|---|
무량삼매에 대하여 (0) | 2021.03.03 |
북한산이 병풍처럼 (0) | 2021.02.28 |
힘들 때 마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주문외듯이 (1) | 2021.01.31 |
담마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아기 (0) | 2021.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