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3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온라인 줌으로 열렸다. 참여자는 저조하다. 대면모임에서 보던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온라인 모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지만 한사람만 들어왔다.
금요모임에 제한은 없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다만 취지는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자발적 보시에 대한 것이다. 보시라고 하여 별도로 돈을 걷는 행위는 없다. KPTS번역서 뒷부분에 은행 계좌 세 개가 있는데 자발적으로 능력껏 보시하면 된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려 주면 대부분 오지 않는다. 공부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이번 모임에서는 다섯개의 경을 합송했다. 차례로 나열해 보면, 1) 경행을 하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2) 나는 명성과 관계없고 명성도 나와 관계 없기를!, 3) 보시하는 자와 보시하지 않는 자의 차이는 어떠한가?, 4) 보시의 공덕, 5) 보시하기에 알맞은 때, 이렇게 다섯 개의 경을 합송했다.
어떻게 해야 경행을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경행을 잘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초기경전에서는 경행공덕에 대해서도 설해져 있다. 매우 짤막한 내용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긴 여행을 견디게 하고, 정근을 견디게 하고, 건강해지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A5.29)
경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행한다고 하여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좌선과 경행을 병행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부처님은 경행을 하면 위와 같이 다섯 가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앉아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앉아만 있으면 병이 날 수 있음을 말했다. 허리가 뒤틀리는 등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행을 하여 풀어주어야 함을 말한다. 경행은 일종의 스트레칭이라고도 볼 수 있다.
좌선을 내공으로 본다면 경행은 외공으로 볼 수 있다. 수행은 내공과 외공이 조화를 이루어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행주좌와가 골고루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일상이 수행이다
행주좌와 어느 것도 수행 아닌 것이 없다. 이는 몸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는 대념처경(D22)에서는 몸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호흡새김 뿐만 아니라 네 가지 행동양식의 관찰에 대해서도 같은 비중으로 언급해 놓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서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 있으면 앉아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 있으면 누워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분명히 안다.”(D22.5)
사념처에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이 있다. 이 중에서 몸관찰에는 좌선과 관련된 것으로 호흡새김이 있다. 그러나 몸관찰에는 좌선뿐만 아니라 행주좌와가 모두 관찰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일상에서 생활도 관찰대상이 된다. 이는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드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D22.6)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옷을 입는 것도 관찰대상이다. 당연히 밥을 먹는 것도 관찰대상이 된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라고 했다. 밥 먹는 것도 수행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는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자는 일거수 일투족을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림을 놓치면 열반을 놓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좌선만이 수행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경행도 수행이고 일상이 수행이다.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 알아차림이 끊이지 않아야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경행하면 집중이 오래 지속된다
경행을 하면 다섯 가지 이점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 다섯 번째 항을 보면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caṅkamādhigato samādhi ciraṭṭhitiko hoti)”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앉아 있으면, 서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누우면,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경행하면,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즉,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수행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오분 앉아 있기도 쉽지 않다. 매일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집중될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 좌선하려 한다면 쉽게 집중되지 않는다. 하물며 경행에서는 어떠할까?
좌선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집중이 잘 될 수 있다.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면 달라진다. 경행한다고 하여 10미터 거리를 왕복할 때 집중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왜 행선(行禪)이라고 하는가?
좌선하면 집중이 잘 되어서 니밋따(表象 또는 印象)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좌선에서 일어나면 니밋따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좌선에서 경행으로 바꿀 때 집중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표상이 사라짐을 말한다. 그러나 경행에서 잡은 표상은 서 있거나 앉아서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경행에 몰두하는 자는 움직이는 대상을 표상으로 잡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어떻게 포착하여 표상으로 잡을 수 있을까? 이는 천천히 경행하면 가능한 것이다. 참선후에 몸을 푸는 포행과는 다른 것이다. 다리를 들어서 놓기까지 여러 단계를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천히 할 수밖에 없다.
경행하면 보통 6단계 행선을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그 다음에 한걸음 보행하는 경우에 1)들어 올림, 2)앞나아감, 3)성큼옮김, 4)아래내림, 5)내려디딤, 6)바닥누름의 여섯 부분으로 나눈다.”(Vism.20.62)라고 하여 6단계 행선이 소개되어 있다.
경행을 행성(行禪)이라고도 한다. 이는 경행을 뜻하는 빠알리어 짱까마(caṅkama)가 영어로는 ‘walking up and down’의 뜻이지만 수행처에서는 ‘walking meditation’이라고 한다. 보수행(步修行)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경행이라는 말보다는 행선(行禪)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순간삼매(khaṇika samādhi)에 대하여
걷는 것도 수행이다. 앉아서 하는 좌선만 수행이라고 볼 수 없다. 걸을 때 발의 움직임에 집중했을 때 순간적으로 집중할 수 있어서 행선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상태에서도 집중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순간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카니까사마디(khaṇika samādhi: 瞬間三昧)’라고 한다.
순간삼매는 행선할 때 가능하다.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집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간삼매는 근거가 있다. 청정도론에서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삼매라는 것이 네 가지 선정과 같은 근본삼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세 가지 삼매를 말했다. 찰나삼매, 근접삼매, 본삼매를 말한다. 여기서 찰나삼매는 행선으로 성취된다. 놀랍게도 청정도론에서는 순간삼매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청정도론 제20장 ‘길과 길 아님에 관한 앎과 봄의 청정(道非道知見淸淨)’을 보면 행선 6단계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그 중에 발을 ‘들어 올림’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들어올림’에서 생겨난 세계들과 거기서 파생된 물질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앞나아감’에 도달하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소멸한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65)
6단계 행선에서 발을 ‘들어올림’에 대한 것이다. 발을 들어올림의 순간을 관찰하면 순간집중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삼매에 들어 가는 것이다. 그 순간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찰나생찰나멸을 본다고 했다. 그 찰나생찰나멸은 어떤 것일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통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
행선을 하여 순간삼매에 들면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법들은 공통적으로 무상, 고, 무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행선을 하여 발을 ‘들어올림’순간에 포착된 것이다. 그 다음 순간은 어떨까? 발을 들어올림 다음에는 ‘앞으로나감’이 될 것이다. 그런데 들어올림과 앞으로나감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들어올림은 거기서 소멸하고 앞으로나감이 생겨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법이 생멸하는 것이다.
행선을 하여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생멸로 나타난다. 6단계 발의 움직임을 통하여 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6단계 움직임이 생성과 소멸로 반복되는 것이다. 들어올림이 생성되어서 즉시 소멸되고, 이어서 앞으로나감이 생성되어서 즉시 소멸된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 법이다. 6단계 경행에서 같은찰나생찰나멸을 본다.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그때그때의 경우에 생겨난 것들이 각각의 다른 부분에 도달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경우에 각 마디, 각 결절, 각 구획에서 마치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형성들이 부수어진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65)라고 했다.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미얀마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을 매우 중요시하게 여긴다. 마하시계통의 선원에서는 대개 한시간 좌선하면 한시간 행선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는 짝수시간에는 좌선을 했고, 홀수시간에는 행선을 했다. 이렇게 좌선과 행선을 번갈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최근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 빤냐완따 스님의 행선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는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소책자를 말한다. 스님은 글에서 “돌이켜보면, 이승은 출가 초기부터 좌선수행보다는 걷는수행을 많이 해온 편입니다. 좌선보다는 주로 걷는수행을 통해 삼매의 근력을 길렀고, 걷는수행을 통해 더 많은 법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3쪽)라고 했다.
빤냐완따 스님은 행선을 예찬했다. 자연스럽게 좌선에 치우쳤을 때 문제점도 지적했다. 이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좌선일변도로 갔을 때 첫째는 무릎이 망가지고, 둘째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혈액순환의 장애가 나타나고, 셋째는 초심자들의 경우 온갖 망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좌선의 문제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행선이라고 했다.
깊은 삼매를 계발하는데 있어서 좌선은 매우 유용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고요한 숲으로 들어가서 선정을 닦으라고 했다. 그러나 좌선만으로는 완전한 삼매와 통찰지혜를 계발할 수 없다. 그래서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도 항상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A3.1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빤냐완따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좌선만으로는 부동의 삼매를 계발할 수 없습니다. 좌선만으로만 얻어진 삼매는 온실의 화초 같아서 햇빛을 받으면(밖으로 나가면)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여지없이 깨져 버립니다. 그러나 ‘걷는 수행(행선)’을 통해 얻은 삼매를 바탕으로 한 좌선삼매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좌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계속 강한 삼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29쪽)
빤냐완따 스님은 좌선일변도의 수행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좌선만 해서는 통찰지를 계발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무엇보다 좌선에서 얻은 삼매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일어서는 순간 깨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선으로 삼매를 계발했을 때는 오래 감을 말했다.
빤냐완따 스님이 위와 같이 언급한 것은 경과 주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경에서는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고 했다. 주석에서는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했다.
법은 매순간 일어난다
삼매에는 좌선에서의 삼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선에서의 삼매도 있다. 이를 순간삼매라고 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고정된 대상은 법을 보기 힘들지만 움직이는 대상은 법을 보기 쉽다. 순간포착하듯이 움직이는 대상에 순간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인다. 무엇이 보이는가? 법이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 보인다.
찰나생찰나멸은 발의 움직임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수행자가 행선할 때 ‘앞나아감’ 또는 ‘들어올림’ 등 하나하나 구분을 통하여 법의 생성과 소멸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작은 실 두께 크기씩에서 불꽃이 각각 다른 것에 도달하지 않고 소멸한다.”(Vism.20.67)라고 하여 불꽃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경행은 천천히 하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하면 움직임을 포착하기 힘들다. 달리기 할 때 순간삼매에 들기 힘들다. 그래서 발을 들어서 올리고 나아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등 각 단계를 알아차림 하며 경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집중하기 때문에 순간삼매라고 한다. 그래서 경행이라고 하기 보다는 행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삼매는 결국 찰나생찰나멸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생멸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이러한 사실들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까닭에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Vism.20.104)라고 했다. 법은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다.
법은 생성되자 마자 소멸한다
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생성되자 마자 소멸한다. 생성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만 소멸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생성될 때는 조건에 따르지만 소멸될 때는 조건과 무관하게 사라질 뿐이다. 마치 두 개의 돌맹이를 부딪치면 순간적으로 불빛이 보이고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다.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환술, 아지랑이, 꿈, 선화륜, 신기루, 파초 등으로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4)
행선을 하는 목적은 법을 보기 위해서이다. 조건 발생하는 법이 찰나생찰나멸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박수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고, 쇠붙이를 쇠망치로 치면 불꽃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소리와 빛은 온데 간데없다. 다만 찰나생찰나멸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법의 성품에 대하여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오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자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5)
2021-03-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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