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세간의 행복과 출세간의 행복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2. 10:25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세간의 행복과 출세간의 행복

 

 

부처님 팔만사천법문은 잘 짜여진 양탄자와 같습니다.” 이 말은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한말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씨줄과 날줄이 서로 교차하여 옷감을 짜는 것처럼 정교함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마치 톱니바뀌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같다. 이를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하는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가르침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이라는 말로 초기경전에서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른바 성자라는 사람들의 가르침은 처음에는 훌륭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도 마지막도 휼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용두사미임을 말한다.

 

힌두교 성자의 가르침이 있다. 처음에는 화려하게 시작한다. 때로 매우 감동받는다. 그러나 중간으로 갈수록 마지막으로 갈수록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형식도 갖추고 있어서 차별화된다.

 

바라문들이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이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친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부처님이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한 가르침을 설할 뿐만 아니라 형식도 내용도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뵙고자 한 것이다. 이를 부처님의 시자 나기따에게 알렸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공양할 음식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그들은 크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시자 나기따에게 어떤 사람들이 크게 떠들고 시끄럽게 소리치는가? 어부들이 물고기를 팔려고 내놓은 것 같구나.”(A5.30)라고 말했다.

 

재래시장에 가면 시끌벅적하다. 호객행위를 하고 흥정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수행자들이 있는 처소는 늘 고요하다.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음식을 싸들고 와서는 마치 시장통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왁자지껄 했던 것이다.

 

외도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웃고 떠들고 왁자지껄한다는 것이다. 이는 외도들이 공개토론장에서 왁자지껄하며 떠드는 것과 같다. 이는 그 무렵 유행자 뽓따빠다는 많은 유행자의 무리와 함께 앉아서 시끄럽게 왁자지껄 큰 소리로 떠들며 여러가지 잡담, 예를 들어 왕에 대한 이야기,…”(D9.3)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외도들에게 부처님은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 졌을까? 이는 외도들이 벗들이여, 조용히 하라. 벗들이여, 소리를 내지 말라. 바로 수행자 고따마가 온다. 이 존자는 고요함을 좋아하고, 고요함에 길들여져 있고, 고요함을 칭찬한다.”(D9.4)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고요함을 좋아한다고 했다. 당연히 부처님 제자들도 고요함을 좋아할 것이다. 웃고 떠들며 잡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이 고요한 것은 아마도 명상주제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명상주제를 잡아 명상에 전념하고 있을 때 이를 고귀한 침묵(ariyo vā tuhī bhāvo)’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웃고 떠들고 잡담하는 바라문들을 마치 저자거리의 물고기를 파는 상인처럼 보았다.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는 명성과 관계가 없고, 나도 명성도 나와 관계가 없기를 바란다.”(A5.30)라고 말했다.

 

세간의 행복과 출세간의 행복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단지 명성만 듣고 찾아온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따위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유명하다길레 맛있는 음식을 들며 서로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라문들 만나기를 간청하는 나기따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기따여, 나는 명성과 관계가 없고, 명성도 나와 관계가 없기를 바란다. 나기따여, 그러한 여읨의 행복, 떠남의 행복, 고요의 행복, 깨달음의 행복을 원하는 대로 얻고, 애쓰지 않고 얻고, 어려움 없이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더러운 행복, 나태한 행복, 이득과 명예와 칭송의 행복을 받아들이겠지만, 이러한 여읨의 행복, 떠남의 행복, 고요의 행복, 깨달음의 행복을 원하는 대로 얻었고, 애쓰지 않고 얻었고, 어려움 없이 얻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되겠는가?”(A5.30)

 

 

부처님은 여읨, 떠남, 고요, 깨달음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 네 가지 행복을 원하는 대로, 애쓰지 않고, 어려움 없이 얻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네 가지 행복을 얻는 것이 가능함을 말한다. 만일 네 가지 행복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굳이 애써서 수행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감각적 행복을 얻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세속적인 행복이다. 더러운 행복, 나태한 행복, 이득과 명예와 칭송의 행복을 말한다.

 

부처님은 출세간의 행복과 세간의 행복에 대해서 말했다. 출세간의 행복은 여읨의 행복(nekkhammasukhassa), 떠남의 행복(pavivekasukhassa), 고요의 행복(upasamasukhassa), 깨달음의 행복(sambodhasukhassa)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세속적 행복은 더러운 행복(mīhasukha), 나태한 행복(middhasukha), 이득과 명예와 칭송의 행복(lābhasakkārasilokasukha)을 말한다.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부처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의 행복은 출세간적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바라문들의 행복은 세간적 행복과 같아서 감각적이고 저속한 행복과도 같다고 했다. 이는 바라문들이 먹을 것을 잔뜩 들고 와서 친견하기를 바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들 바라문들의 행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기따여, 먹고 마시고 씹고 맛 본 것이야말로 똥과 오줌으로 끝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나기따여, 사랑스러운 것이 변화되고 다른 것이 되는 것 때문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나기따여, 부정의 인상에 대한 명상을 하는 자에게 매혹적인 인상에 대한 혐오가 정립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나기따여, 여섯 가지 접촉의 영역에서 무상을 관찰하는 자에게 접촉에 대한 혐오가 정립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나기따여, 다섯 가지 집착의 다발에서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집착에 대한 혐오가 정립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A5.30)

 

 

잘 짜여진 양탄자를 보는 것 같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하고 내용과 형식을 갖춘 부처님 법문이다. 이는 똥의 비유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똥에 대해서 말씀했다. 아무리 맛 있는 것도 똥으로 나옴을 말한다. 이른바 똥의 법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똥과 관련하여 많은 법문을 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똥처럼 말을 하는 사람, 꽃처럼 말을 하는 사람, 꿀처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A3.28)라고 했다. 여기서 똥처럼 말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를 말한다.

 

부처님은 똥과 관련하여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아주 소량만 있어도 똥은 악취를 풍긴다.”(A1.348) `라고 했다. 이는 존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손가락 튕기는 동안 존속하여 소량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존재에 대하여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A1.348) 라고 했다. 존재를 똥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부처님의 똥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는 “어떤 똥벌레가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똥벌레는 ‘나는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내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똥벌레들을 무시한다. (S17.5)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오로지 돈만 밝히는 사람에 대해서 똥벌레와 같다고 본 것이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진리를 비유로 설명해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법문했다. 똥의 비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똥으로 나온다. 아무리 비싼 와인을 마셔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오줌으로 나온다. 바라문들이 단지 부처님의 명성만을 듣고서 음식을 잔뜩 싸 가지고 온 것에 대해서 똥의 비유로 말했다.

 

황제식도 먹으면 똥이 되고 고급와인도 마시면 오줌이 된다. 먹고 마시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면 이는 똥과 같은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나면 허기가 져서 또 먹어 보지만 목구멍을 넘길 때까지 행복을 맛본다. 이런 행복은 감각적 행복이다. 오감이 총동원된 행복을 말한다.

 

오늘날 먹방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먹는 방송이 나온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도 먹거리에 대한 것을 쓰면 관심 받는다. 이는 사람들이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단지 미각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시각으로도 먹고 청각으로도 먹고 후각으로도 먹고 촉각으로도 먹는다. 오감이 총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하지 않다. 목구멍을 넘길 때 까지만 행복한 것이다.

 

부정관, 무상관, 생멸관으로

 

부처님은 바라문들을 만나 주지 않았다. 바라문들이 웃고 떠들고 잡담하는 것을 보고서 만나 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바라문들은 단지 부처님의 명성만 듣고서 친견하고자 했다. 부처님이 설한 고요에 이르는 가르침은 관심 없었던 것 같다. 오로지 먹고 마시는 등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바라문들에게 고요함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속적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출세간적 가르침이다. 세속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감각적 행복이 아니라, 감각적 행복을 떠나는 행복을 설하였기 때문에 바라문들이 싸 들고 온 음식을 거부하고 만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바라문들의 행복에 대하여 부처님은 더러운 행복, 나태한 행복, 이득과 명예와 칭송의 행복이라고 했다.

 

감각적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래 가지 않아서 불만족이다. 음식도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랑스러운 것이 변화되고 다른 것이 되는 것 때문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이 생겨난다.” (A5.30)라고 했다. 이를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화에 따른 괴로움은 음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그렇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에 따른 괴로움을 말한다. 자신의 몸이 늙어 병들어 갔을 때도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이라 하여 다섯 가지로 표현했다. 이 말은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복합어로 표현된다.

 

감각적 행복은 세속적 행복이다. 출세간적 행복은 감각적 행복을 초월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정관, 무상관, 생멸관으로 설명했다. 매혹적인 대상에서는 부정관을 하고, 여섯 감역에 대해서는 무상관을 하고, 오온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생멸을 관찰하라고 했다.

 

멀리 여읨에서 오는 행복

 

부처님은 멀리 여읨에서 오는 행복을 말했다. 이는 매혹적인 형상에 대한 행복에 대해서는 부정관으로 부수었다. 여섯 감역의 접촉에서 오는 행복은 무상관으로 부수었다. 오온의 집착에서 오는 행복은 생멸을 관찰함으로서 부수었다. 세상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이다.

 

 

“형상, 소리, 냄새,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

 

개체가 소멸하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는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모든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것은

거룩한 님에게 그와는 정반대가 되네.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

 

 

2021-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