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생멸의 가르침은 복음이자 사회변혁의 메시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9. 10:43

생멸의 가르침은 복음이자 사회변혁의 메시지

 

 

여전히 줌모임에 서툴다. 마이크를 켜고 말을 해야 하나 끈 상태로 말을 하니 못알아 듣는 것이다. 스마트폰 화면에 마이크 아이콘에 붉은 선으로 빗금이 그어져 있는 것은 마이크가 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모르고 말을 했으니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326일 저녁에 열렸다. 늘 그렇듯이 줌으로 열린 것이다. 코로나팬데믹 시대에 이제 줌이 대세가 된 듯하다. 이대로 몇 년 간다면 온라인 모임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 같다.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모두 17명 들어왔는데 네 명 보였다. 그 중에 두 명은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 나가버렸다. 어느 경로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나머지 두 명은 금요모임 취지문에 동의하여 들어왔다.

 

온라인모임은 장점도 단점도 있다. 멀리 있는 사람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집중이 되기 힘들다. 더구나 교류가 없어서 모임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장점 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 이상 대안은 없다.

 

3월 두 번째 강독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하나는 참다운 재물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A5.47)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섯 가지 장애는 과도하게 성장한 정신이자 약화되어 허약한 지혜이다’(A5.51)에 대한 것이다.

 

믿음의 재물(saddhādhana)

 

이 세상에 다섯 가지 재물이 있다. 이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다섯 가지 재물의 경(pañcadhanasutta)’(A5.47)에 실려 있다. 먼저 믿음의 재물(saddhādhana)이란 무엇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다.’라고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A5.47)

 

 

믿음의 재물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덕성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열 가지 덕성이 있다. 이는 십수념 중에서 불수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라한에 대해서는 어원적으로 가치가 있는 님이라고 했다. 빠알리어 PCED194로 찾아보니 아라항(araha)에 대하여 ‘A venerable person’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거룩한 님으로 번역해 놓았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라한[應供]’이라 하여 원어와 한자어를 병기해 놓았다.

 

아라한은 가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어떤 가치를 말할까? 이는 사향사과의 최종단계에 이른 사람을 의미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 더 이상 닦을 것도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는 무학의 경지에 이른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은 공덕의 밭이 되는 성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라한에 대하여 가치 있는 사람, 성스러운 사람, 고귀한 사람이라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아라한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이는 멀리 여읜 까닭에, 적을 쳐부순 까닭에, 윤회의 수레바퀴를 부순 까닭에, 필수자구 등이 가치 있는 까닭에,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Vism.7.4)아라한이라고 했다. 여기서 다섯 번째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라는 말은 가치 있는 님에 대한 유사언어학적 해석으로 보고 있다.

 

여래십호에서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明行足)’에서 명지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사성제를 들어 설명했다. 명지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고 명지와 반대 되는 말은 무명이다. 전재성 선생은 무명에 대하여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십이연기 무명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S12.2)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세상이 괴롭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사성제가 괴로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고성제를 설했다. 이는 세상이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세상에 행복도 있지만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말기 때문에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고성제에 대하여 사고와 팔고로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天人師)’에 대한 설명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절대적 의미에서 신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브라흐마와 같은 창조신을 말한다. 그러나 무수한 신들은 있다고 했다. 화엄경에 나오는 화엄신장과 같은 신은 있는 것임을 말한다.

 

욕계천상에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색계에도 무색계에도 무수한 신들이 있다. 그런데 신은 천상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어둠의 세계를 말하면서 귀신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야차 등 비인간이 등장하는데 이를 귀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행의 재물(sīladhana)

 

계행도 재물이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계행도 재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계행의 재물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곳을 빼앗지 않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을 삼가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간다.”(A5.47)

 

 

계행의 재물(sīladhana)은 오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오계만 잘 지켜도 세상의 많은 문제는 없어집니다.”라고 말했다.

 

오계가 왜 재물일까? 이는 오계를 지키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계를 어긴다는 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의미도 있다. 이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살인을 했을 때 이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된다. 그 과보는 자신이 받게 되어 있다. 상대방에게 신체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살생에 해당된다. 그러나 살생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보호되고 동시에 자신도 보호된다. 이는 도둑질과 음행도 해당된다.

 

오계 중에서 신체적 행위와 관련된 것은 살생, 도둑질, 음행이다. 이 세 가지는 신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오계를 지키면 상대방도 보호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도 보호되기 때문에 오계를 지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지키는 것이 된다.

 

오계는 지키기 어렵다. 불과 다섯 가지 항목이지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짓는 업과 관련되어서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오계가 없는 삶이라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짐승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 오계이다.

 

오계를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지키지 않는다면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오계는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방향을 맞추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오계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먼저 방향을 잡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방향 잡는 것에 대하여 방향을 두면 계행을 어겼을 때 고쳐 나가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오계가 학습계율이기 때문이다.

 

오계는 명령이 아니다. 오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정언명령이 아니다. 이는 오계가 삼가한다.”라는 뜻이 있어서 학습계율인 것을 말한다. 오계는 절대적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계는 어기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이러기를 반복하다고 보면 학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계는 평생에 걸쳐 완성된다. 불음주계 지키기 어렵다고 하지만 평생학습한다면 언젠가는 지키게 될 것이다.

 

배움의 재물(sutadhana)

 

배움도 재물이 된다. 배움을 어떻게 재물이라 볼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배움의 재물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모아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하고 거룩한 삶을 실현시키는 그 가르침을 자주 듣고, 기억하고, 언어로써 외우고, 정신으로 성찰하고, 바른 견해로 꿰뚫는다. 수행승들이여, 배움의 재물이란 이와 같다.”(A5.47)

 

 

부처님이 말씀하신배움의 재물(sutadhana)’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을 남에게 알려 주고, 또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한 것이다. 더구나 형식과 내용을 갖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승되어 왔다. 이는 잘 들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하신 것을 잘 귀담아듣고, 들은 것을 새기고 기억한 것이다. 이렇게 배움의 재물은 잘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부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는 있다. 번역되어 나온 경전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사구게 하나라도 외우면 자신의 것이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재물이다. 그러나 진정한 배움의 재물은 바른 견해로 꿰뚫는 것이라고 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사향사과와 열반을 실현해야 함을 말한다.

 

보시의 재물(cāgadhana)

 

부처님은 보시도 재물이라고 했다. 왜 보시가 재물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보시의 재물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고귀한 제자는 마음속에 인색의 때를 제거하여 관대하게 주고 아낌없이 주고 기부를 즐기고 요구에 응하고 베풀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며 집에서 사는 것이다.”(A5.47)

 

 

보시는 기본적으로 베풀고 나누는 것이다. 주는 것(dāna)만 보시가 아니다. 나누는 것(savibhaga)도 보시에 해당된다. 이렇게 베풀고 나누는 삶에 대하여 보시의 재물(cāgadhana)’이라고 했다. 어쩌면 나누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이는 경에서 나눈다 뜻을 가진 삼비바가(savibhaga)가 가장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이다.

 

삼비바가는 영어로 ‘dividing; sharing’의 뜻이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 보다 나누는 것이 더 수승한 것으로 보인다. 준다는 의미의 다나(dāna)는 마치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하도 걸인에게 돈이나 먹을 것을 주는 것 같은 뉘앙스도 있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도 다나에 해당될 것이다.

 

나누고 공유한다는 의미를 가진 삼비바가는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는 사회운동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빚 없음의 경에서 “나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A4.62)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향유의 행복을 말씀하셨다. 근면한 노력으로 정당한 원리로 번 재산에 대하여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부의 사회환원을 말한다.

 

그가 부자인 것은 그의 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사회가 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와 사회구성원들이 없다면 막대한 부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일까 깨인 부자들은 이를 운으로 돌리고 있다. 부자가 된 것에 대하여 실력이나 능력보다는 단지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부호들은 통 큰 기부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그런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정당한 원리로 형성된 재산에 대하여 베풀고 나누며 살 것을 강조했다. 부처님은 이미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부의 사회환원을 주장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보편적 복지의 토대가 되는 가르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혜의 재물(paññādhana)

 

마지막으로 지혜의 재물이 있다. 지혜의 재물이란 무엇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지혜의 재물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어 고귀한 꿰뚫음으로 올바로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끄는 지혜를 지닌다.” (A5.47)

 

 

지혜의 재물(paññādhana) 키워드는 생성과 소멸이다. 생성과 소멸을 꿰뚫는 것에 대하여 지혜를 재물을 갖춘 것으로 설명했다. 이를 생성과 소멸의 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가 왜 중요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생겨난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S56.11)라는 가르침을 인용했다. 이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 말로 기록되어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는 복음의 메시지와 같다고 했다. 왜 그런가?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는 고통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네 가지 계급으로 고착되어 있어서 한번 노예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았다. 그런데 부처님은 생겨난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라는 놀라운 선언을 한 것이다.

 

사성계급에서 한번 브라만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브라만으로 살았다. 한번 노예로 태어나면 평생 노예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다. 아무리 불평등한 사회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계급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얽매이게 하는 것은 폭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생겨난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라며 사회시스템에 도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사회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라고 했다.

 

부처님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혁명적인 말이나 다름 없다. 사회체제 근간을 흔드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서 절망은 사라진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어떤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당대에 복음의 메세지였다. 이런 메시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변화하기 때문에 희망을 갖는 것이다. 만일 변화가 없이 이대로 주욱 있다면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생멸의 지혜를 하는 것도 재물이 된다.

 

부처님 말씀에서 희망을

 

부처님 가르침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믿음도 재물이 되고, 계행도 재물이 되고, 배움도 재물이 되고, 보시도 재물이 되고, 지혜도 재물이 된다는 가르침은 전 세계적으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재물이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아 간다. 행복을 부의 척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21억원을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죽어서는 가져 가지 못한다.

 

죽어서도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는 정신적 재물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를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이라고 했다. 이는 측량할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재물이다. 그래서 성스럽고 고귀한 재물이 된다. 오성재(五聖財)라 해야 할 것이다.

 

칠성재가 있다. 오성재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재물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을 더한 것이다. 오성재와 칠성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재물은 아마도 지혜의 재물일 것이다. 생성과 소멸을 아는 지혜야말로 재물 중의 재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3월 두 번째 금요모임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생겨난 모든 것들은 소멸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2021-03-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