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수행도 힘이 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0. 10:32

수행도 힘이 있을 때

 

 

여전히 줌에 익숙하지 않다. 줌모임 때가 되면 매번 긴장한다. 모임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접속했을 때 접속이 원활하지 않다. 혼자서 문제가 해결하기 힘들다. 다시 메시지가 온다. 새로운 주소를 알려 주는 것이다. 클릭만 하면 들어 가는 것이다.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이번에는 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다.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스마트폰 좌측하단 마이크 아이콘을 터치해 보지만 소용없다. 망연자실하여 여기저기 눌러 보지만 되지를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터진다. 원인을 알 수 없다.

 

첨단기기나 첨단기능에 약하다. 명색이 전자공학과 출신이고 과거 개발도 했었고 지금도 회로패턴설계관련 일을 하고 있어서 잘 다루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저 관행대로 흘러가는 옛날이 좋은 것이다.

 

지금은 팬데믹 시대이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매번 긴장하는 것은 아마도 스마트폰인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줌강연은 노트북에 맞게 세팅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두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한 스마트폰에도 잘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번 소리문제는 스마트폰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무색무취의 무미건조한

 

4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줌으로 열렸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줌모임이 이제 서서히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 들어 갈 때 긴장되긴 하지만 집중하다 보면 대면모임 못지 않다. 한마디로 편한 것이 장점이다. 그 먼 거리를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이제 아득한 것 같다.

 

사무실에서 줌모임에 접속했다. 모두 16명 참여했다. 주로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처음 본 사람도 있다. 호기심으로 왔다가 한두 번 왔다가 그만 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모임이 무색무취이고 무미건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매번 들어온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은 감각으로 느끼는 재미를 찾아볼 수 없다. 경전을 읽고 경전을 해석하는 설명을 듣고 종종 질의응답하는 것이 고작이다. 감각적 즐거움에 맛들여진 사람들은 견딜 수 없어 할 것 같다.

 

모두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번째 경은 수행정진하기에 알맞은 시기를 놓치지 말라’(A5.54)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 경은 청정한 삶을 감동적으로 살아가려면’(A5.56)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경은 명상과 학습의 차이점은 무엇인가?’(A5.73)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로 합송한 경은 수행정진하기에 알맞은 시기를 놓치지 말라라는 제목의 경이다. 어떤 내용일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알맞지 않은 시기와 알맞은 시기의 경(asamayasamayasutta)’(A5.54)을 말한다.

 

경에서는 수행하기 좋지 않은 시기와 수행하기에 좋은 시기에 대하여 다섯 가지 예를 들고 있다. 이는 늙음, 질병, 기근, 야만인, 승가분열 이렇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수행도 힘이 있을 때

 

첫째, 수행하기 어려운 때는 늙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세상에 수행승이 늙어서 늙음에 정복당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첫번째 정근하기에 알맞지 않은 시기이다.”(A5.54)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기력이 약해진다. 기능도 약화되어서 오래 앉아 있을 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총명을 얻기가 어렵다. 위의를 갖추기가 어렵다. 박학하기가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하기가 어렵다.(A5.59)라고 했다.

 

부처님은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총명, 위의, 박학, 설법, 계율의 어려움을 예로 들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는 젊었을 때 유리한 것이다. 젊었을 때가 정진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젊어서,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젊음을 지니고 나이어린 청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첫번째 정근하기에 좋은 시기이다.”(A5.54)라고 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도 힘이 있을 때 해야 한다. 기력이 빠진 상태에서는 앉아 있기도 힘들다. 그러나 꽃다운 청춘 시절에는 즐기기에 바쁘다. 그래서 수행하기에 좋은 시기를 놓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늙었다고 하여 수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 나이 든 수행자의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여든 살의 나이에 아라한이 된 노령의 여인

 

테리가타에 노령출가자를 볼 수 있다. 쏘나장로니를 말한다. 쏘나장로니는 아들과 딸을 열명 낳았다. 그래서 아이를 많이 낳는 여인이라는 뜻으로 바후뿌띠까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재산을 아들딸들에게 모두 물려주었을 때 버림 받았다.

 

바후뿌띠까는 갈 곳이 없어서 늦은 나이에 부처님의 비구니 교단에 들어 갔다. 거의 80살이 다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수행을 할 수 있을까?

 

테리가타를 보면 쏘나 장로니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노령에 출가한 여인은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 출가했으니,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Thig.A.93)라며 밤새도록 수행했다. 너무 나이가 들어 걸음 힘도 없었지만 경행을 할 때는 난간을 잡고 경행했다. 마침내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싯구를 남겼다.

 

 

이러한 집적의 몸으로

열 명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 후 허약하고 늙어서

나는 수행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존재의 다발과 감각의 영역과

인식의 세계에 대하여

그 가르침을 듣고

머리를 깍고 나는 출가했다.

 

그러한 내가 정학녀였을 때에

하늘눈이 청정해졌고,

예전에 내가 살았던

전생의 삶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마음을 통일하고 잘 정립하여

인상을 여읨을 닦고

나는 즉시의 해탈을 얻었으니,

집착 없이 적멸에 들었다.

 

실로 다섯 존재의 다발들은

완전히 알려졌고 뿌리째 뽑혔다.

비참한 노령의 그대여, 부끄럽다.

그러나,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Thig.102-106, 쏘나 장로니)

 

 

노년출가는 쉽지 않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노년출가자의 경2’에서도 확인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노년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하기 어렵다.”(A5.60)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힘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수행해야

 

조금이라도 젊을 때 수행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수행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 있다. 지침서에서는 연령별 정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다.

 

 

“20대에서 40대에 올바른 수행을 한다면, 한 달 안에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 50대에서 60대가 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시기에는 지혜를 완성하는데 두 달이 걸린다. 어떤 이는 그렇게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지혜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70대를 넘어 80대가 되면, 인내심을 가지고 수행하더라도 분명하게 법을 이해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수행은 어렵고 노력을 해도 성과가 없다. 늦게 수행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80세가 넘으면 수행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75-276)

 

 

수행지침서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은 우 쿤달라 비왐사가 지은 것이다. 십일집중수행에서 법문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 쿤달라 비왐사는 마하시 사야도 직계제자 중의 하나이다.

 

책을 보면 수행은 젊어서 해야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간과 관련된 것이다. 수행은 확실히 20대에서 40대에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50대와 60대는 늦다고 볼 수 없다. 20대와 40대에 비하여 두 배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행할 수 있는 나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70대 이상이라는 것이다.

 

70대 이상 되면 수행을 해도 효과가 별로 없다고 했다. 이는 노년 출가의 경에서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A5.60)라는 가르침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80대 이상 노령이 되면 수행을 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이는 청정도론에서는 노망적 십년(81-90)’이라 하여 그는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 (Vism.20.51)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후뿌띠까는 80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노령을 극복하고 아라한이 되었다.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으로 인하여

 

둘째, 수행하기 어려운 때는 질병에 대한 것이다. 수행하기에 알맞지 않은 시기는 늙음뿐만 아니라 질병도 있다. 병이 들면 수행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병들어서 질병에 정복당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두번째 정근하기에 알맞지 않은 시기이다.”(A5.54)라고 했다.

 

건강할 때 정진하기 좋다. 그러나 건강할 때 수행시기를 놓쳐 버린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건강할 때는 괴로움을 모릅니다. 이는 수행동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건강할 때는 천년만년 건강할 것처럼 착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건강은 질병에 정복당하고 만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건강한 시절에 건강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그가 그 사실을 관찰하면, 건강한 시절의 교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버려지거나 약해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이유로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자주 관찰해야 한다.(A5.57)라고 말씀하셨다.

 

젊을 때는 젊음의 교만이 일어나고, 건강할 때는 건강의 교만이 생겨난다. 그 결과 즐기는 삶을 살게 되는데 결국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다. 건강을 잃었을 때 그제서야 건강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수행하고자 한다. 이는 법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는 질병이 오기 전에 빨리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좋다. 병이 오고 나면 고통이 나를 지배하여 집중을 하기가 어렵다. 힘을 잃고 고통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더 이상 수행을 할 수 없을 것이다.”(281)라고 했다.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병이 들었다고 해서 수행할 수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수행하기에 오히려 더 알맞은 시기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이 들어야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고, 병들어야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고, 가난해야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나꿀라삐따 장자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나꿀라삐따 장자가 있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중병에 걸렸다. 노령에 병을 도저히 이겨낼 힘이 없었다. 이에 부처님에게 친견을 요청하고 법문을 들었다. 부처님은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꿀라삐따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밝아 졌다. 그러나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에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법문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때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라고 본다는 것이다.

 

몸에 병이 걸리면 마음도 병에 걸린 것처럼 아프다. 범부들은 몸이 아프면 정신도 아픈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정신과 물질에 대하여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몸이 아파도 정신은 아프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나꿀라삐따에게물질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S22.1)라고 알려 준다. 이른 바 20가지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사리뿟따는 나꿀라삐따에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정신-물질 작용으로 이해하면 질병이 들어 육체적으로 고통받지만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온을 바로 알지 못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온을 로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몸이 아플 때 마음도 아픈 것이다.

 

수행은 노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무엇이든지 시기가 있다. 공부도 시기가 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도 시기가 있다. 비교적 젊을 때 건강할 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젊음의 교만과 건강으로 교만으로 인하여 시기를 놓쳐 버린다.

 

어떤 이는 젊었을 때는 오욕락을 즐기는 삶을 살고 수행은 노년이 되어서 늦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다. 기녀가 젊은 수행자를 유혹할 때도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테라가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 (Thag.461)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Thag.462)

 

 

젊은 수행자는 기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젊은 수행자는 합장하며 애원하는 기녀를 보고서는 장식하고 좋은 옷을 입었으나, 마치 죽음의 왕의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 (Thag.463)라고 했다. 이어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464)라고 했다.

 

늙고 병들었을 때 오히려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수행하기에 좋지 않은 시기는 늙음과 질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근이 들어서 탁발이 어려울 때도 좋지 않은 때이고, 야만인들의 침범으로 피난을 해야 할 때도 좋지 않은 때이다. 또한 승가가 분열하여 서로 다투고 싸울 때도 수행하기에 좋지 않은 때에 해당된다.

 

수행하기에 좋은 시기는 젊고, 건강하고, 풍요롭고, 전쟁이 없고, 승가가 화합했을 때 최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항상 이런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항상 조건이 바뀐다.

 

수행환경이 좋다고 하여 수행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오욕락을 즐기기에 바쁘다. 수행하기에 좋은 조건이긴 하지만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수행동기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수행하기에 좋지 않은 때에 수행이 더 잘 될 수도 있다.

 

전재성 선생은 늙고 병들었을 때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수행동기를 찾기 쉽기 때문이다. 늙어 감을 보고서 괴롭다고 인식했을 때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역설적으로 나이가 들어야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병들어야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가난해야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음을 말한다.

 

 

2021-04-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