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왜 부정관 수행이 으뜸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3. 12:55

왜 부정관 수행이 으뜸인가?

 

 

사무실에 작은 명상공간이 있다. 칸막이로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작년 1월 사무실을 혼자 쓰게 되었을 때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앉아 있었다. 최소한 한시간은 앉아 있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지부지 되었다. 책상 바로 옆에 있음에도 30분 앉아 있을 여유도 없는 것이다.

 

 

세번째로 합송한 경은

 

4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명상과 관련된 경을 합송했다. 세번째 합송한 경은명상과 학습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의 경1(Pahamadhammavihārīsutta)’(A5.73)을 말한다.

 

경에서는 명상의 중요성을 말했다. 이는 경의 말미에 수행승이여,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A5.7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선정을 닦으라고 했다. 여기서 선정을 뜻하는 자야띠(jhāyati)‘meditates or contemplates’의 뜻으로 명상하다또는 집중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토록 선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로 알 수 있다.

 

 

수행승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가르침들, 즉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쟁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을 학습한다. 그는 그 가르침을 학습하면서 하루를 다 보낸다. 그런데 그는 그 밖에 지혜로써 그 목표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그는 많이 학습한 자이지,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는 아닌 것이다.”(A5.74)

 

오늘날 부처님의 말씀은 경전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는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쟁담, 미증유법, 교리문답 형태로 되어 있다. 이를 구분교라고 한다. 아홉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 가르침을 말한다. 이와 같은 구분교에 대해서 전재성 선생은 하나하나 설명했다.

 

수행은 금생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분교 중에 감흥어가 있다. 이를 우다나(udāna)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이 흥에 겨워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설한 법문이라고 했다. 대개 법문은 요청했을 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분교 중에서 전생담(jataka)이 있다. 전생담은 어떤 것일 것일까? 전재성 선생은 현재 자따까를 번역중에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전생담은 본래 인도의 동화나 우화를 불교적으로 가공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생담을 보면 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많다는 것이다.

 

전생담을 한번도 접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전생담이 출간되지 않은 이유가 크다. 그런데 전생담에서 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놀랍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수행은 금생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 했다.

 

윤회하는 삶에서 이번 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금생은 과거와 미래생을 연결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부처님의 전생의 삶에서 수많은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생담은 보시나 지계 등 바라밀을 중심으로 설해진 것이라고 했다.

 

전생담은 십바라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은 선생은 바라밀을 뜻하는 빠라미(paramī)에 대하여 현세초월이고 자기초월이라고 했다. 그래서 빠라미에 대하여 초월의 길로 번역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자기를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는 천상에 태어남과 열반의 듦에 대한 것입니다. 자따까는 신비스러운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수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수행을 강조한 이유는

 

부처님은 왜 수행을 강조했을까? 이는 경에서 지혜(paññā)’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구분교의 가르침으로 학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지혜를 얻을 수 없음을 말한다. 만일 학습만 하면서 하루해를 다 보낸다면 그는 학습하는 자이지 명상하는 자가 아니라고 했다.

 

지혜를 계발하려면 명상을 해야 한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확인된다. 그래서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Paññā natthi ajhāyato)”(Dhp.372)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이는 주석을 보면 그의 마음은 통일되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본다.”(DhpA.IV.110)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선정에서 지혜가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어적 개념을 초월한 것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언어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팔정도경 두 번째 선정에서도 알 수 있다.

 

팔정도경 두 번째 선정에 대한 것을 보면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Vitakka-vicārāna vūpasamā ajjhatta sampasādana cetaso ekodibhāva)”(S45.8)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첫번째 선정에서는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ā)에 따른 것이지만, 두 번째 선정부터는 언어적 형성을 초월한 것이다. 그래서 사유와 숙고를 멈추어지고 내적인 마음의 통일을 이룬다고 했다. 이는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이 한곳에 집중됨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현상을 관찰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의 생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언어적 개념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불교적 지혜는 무상, , 무아를 통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꿰뚫어 본다는 의미로 빤냐(paññā)라고 한다. 이런 지혜는 마음을 집중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르침을 학습하는 것만으로 그치고, 가르침을 남에게 전하는 것만으로 그치고, 가르침을 암송하는 것만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두 도반 수행승과 관련된 이야기(dvesahayakabhikkhuvatthu)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믿는 사람도 있다. 소원성취를 위해서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목적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믿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공부만 할 뿐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형제출가이야기를 해 주었다.

 

형제출가이야기는 동생이 먼저 깨달음에 이른 것을 말한다. 경전공부만 하는 형과 비교하여 동생은 수행에만 전념하여 깨달았기 때문이다. 법구경 인연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찾아보니 법구경 19번과 20번 게송에 유사한 인연담이 있다. 이는 두 도반 수행승과 관련된 이야기(dvesahayakabhikkhuvatthu)’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사밧티 시에 훌륭한 가문의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부처님 설법을 듣고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삼장만을 공부했다. 그러나 또 한친구는 수행에 전념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삼장만 공부한 친구는 아사리가 되었다.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아 누구 물어보든지 막힘이 없었다. 수행에만 전념한 친구는 삼장을 자세하게 몰라도 법에 대해 통찰을 할 수 있었다. 부처님은 누구를 칭찬해 주었을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아사리는 나의 가르침에서 고용되어 소를 돌보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나의 아들은 자신의 향유를 위해서 다섯 가지 유제품을 즐기는 소의 주인과 같다.”(DhpA.I.154-157)

 

 

부처님은 삼장에 통달한 법사에 대해서 고용자와 같다고 했다. 소를 세는 고용인을 말한다. 반면 수행에 전념하여 지혜가 생겨난 제자에 대하서는 나의 아들과 같다고 했다. 소의 주인으로 사는 자와 같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수행하는 제자를 칭찬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아,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 경전을 외우지 못하더라도, 가르침에 맞게 여법하게 행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로 알고 잘 마음을 해탈하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집착을 여의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리.”(Dhp.19-20)라며 게송을 읊었다.

 

수행은 혼자서 하는 것

 

전재성 선생은 금요모임에서 수행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경을 보면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M10.5)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수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럿이 할 수도 있다. 오늘날 명상센터에 가보면 커다란 홀에서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히 홀로 하라고 했다. 숲속이나 나무밑, 빈집, 동굴 등에서 홀로 수행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강당은 부처님 법문을 듣는 곳이다. 강당에서 집단으로 모여 수행한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수행승들은 법문이 끝나면 흩어져서 각자 처소에서 홀로 수행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함께 모여 수행하는 것도 이점이 있을 것이다.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사로에게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수행은 홀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홀로 수행해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누군가 대신 깨달아 주는 것도 아니고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병아리 부화의 비유로도 알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있다. 데미안을 보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헤르만 헤세가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말한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암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의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M16)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올 때 자신의 힘으로 깨고 나온다. 어미 닭이 밖에서 부리로 조아서 깨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을 보면 어미닭은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며 염려만 해 준다.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동기 (啄同機)는 아닌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를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는 것으로 비유했다. 그런데 알껍질은 병아리가 깨고 나온다는 사실이다. 남이 깨 주지 않는 것이다. 어미닭도 깨 주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홀로 수행하라고 한 것 같다.

 

부정관의 중요성에 대하여

 

금요모임 시간에 수행과 관련하여 많은 질문이 있었다. 전재성 선생은 부정관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했다. 이른바 불교에 사대수행이라 하여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이 있지만 이 중에서 으뜸은 부정관이라고 했다.

 

부정관이 왜 으뜸 수행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체가 썩어 가는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정관이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진다고 했다.

 

기독교에 십자가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 못박혀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끔찍한 모습이다. 기독교에서는 왜 이렇게 끔찍한 형상을 숭배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예수의 십자가는 일종의 부정관과 같다고 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강한 것은 피 흘리는 예수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늘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 또는 시체가 썩어 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극복했을 때 강력한 파워가 나온 다는 사실이다.

 

불교에 사대수행이 있는데

 

수행은 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이 맞아야 한다. 이는 우다나에서 메기야의 경’(Ud.34)을 보면 알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수행자가 홀로 숲속에 있을 때 위험이 따를 수 있음을 말한다.

 

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커다란 명상홀에서 함께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좋은 도반과 사귀어야 한다. 그리고 계행을 갖추고 가르침을 학습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아닌 교학의 중요성을 말한다.

 

교학을 모르고서 수행할 수 없다. 이는 메기야의 경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도반과 사귀며 계행을 지키며 사성제와 같은 가르침에 대한 지혜를 갖추었을 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수행을 하라고 했다.

 

 

탐욕의 제거를 위해서 부정을 닦아야 한다. 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 사유의 제거를 위해서 호흡에 대한 새김을 닦아야 한다. ‘내가 있다는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야 한다.”(Ud.40)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대수행에 대한 것이다. 탐욕의 제거를 위해서 부정관을 닦고, 성냄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관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언어적 사유를 제거를 위해서는 호흡관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는 무상관이 좋다고 했다.

 

왜 부정관을 해야 하는가?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이와 같은 네 가지 수행에서 으뜸은 부정관이라고 했다. 이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정관은 조작이나 허위가 없습니다. 부정관을 하면 엄청난 파워가 생깁니다.”라고 말했다.

 

시체가 썩어 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은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된 것이다. 그런데 부정관이 으뜸인 것은 아무래도 탐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모든 불선법 중에서 탐욕이 으뜸이다. 우리가 이렇게 욕계에 사는 것도 탐욕 때문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도 탐욕에 기인한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의 제거야말로 가장 큰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탐욕의 제거는 부정관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부정관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열 가지 시체가 썩어 가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몸을 32가지 기관으로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도 부정관에 해당된다. 이는 몸에 대한 혐오를 일으켜 감각적 욕망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일까 탐욕의 제거를 위한 부정관 수행이 모든 수행중에서 으뜸이라고 했을 것이다.

 

부정관에서 호흡관으로 바뀐 것은

 

오늘날 부정관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부처님 당시 부정관 수행을 하던 수행승들이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베쌀리의 경’(S54.9)을 보면 부처님은 부정관 대신에 호흡관을 말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닦고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S54.9)

 

 

부처님은 시체를 관하는 등 부정관 대신에 호흡관을 할 것을 말씀했다. 이는 16단계 호흡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호흡을 관찰하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라고 했다.

 

사대명상 중에서 부정관이 으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을 혐오하여 자살자가 속출했을 때 호흡관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부정에 관해 찬탄을 하시고 부정에 관한 수행에 대하여 찬탄하셨다.”(S54.9)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정관이야말로 수행중의 수행이고 탐욕을 확실히 제거하게 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불교인들은 가르침을 알고자 한다. 그래서 경전을 보고 교학을 공부한다. 아비담마 논장을 공부하여 체계를 잡기도 한다. 그러나 공부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학습만 하는 자에게 대하여 그는 많이 학습한 자이지,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가 아니다.”(A5.73)라고 했다.

 

가르침을 명상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은 가르침도 알고 수행도 하는 것이다.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메기야의 경에서도 확인된다. 먼저 교학으로 체계를 다지고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부처님은 단지 학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했다. 또한 가르침을 가르친다든가 암송한다든가 사유하고 숙고로만 그쳐서는 안된다고 했다. 부처님은 홀로 숲이나 나무밑, 빈집, 동굴에 들어가서 수행하라고 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A5.73)라고 했다.

 

30분이라도 앉아 있는 습관을

 

부처님의 선정에 대한 가르침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다. 명상에서 광대한 지혜가 생기고 명상하지 않으면 광대한 지혜가 부서진다.”(Dhp.282)라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외동 아들 라훌라에게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을 피하라.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라고 말했다. 이는 부정관에 대한 것이다.

 

작년 1월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잠시 앉아 있을 틈도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특별하게 당부 했다. 그것은 그대들을 애민히 여겨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라고 했다. 30분이라도 앉아 있는 습관을 들여야 겠다.

 

 

2021-04-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