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감동없는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1. 12:38

감동없는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줌모임에서도 합송이 가능하다. 사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두 번째 경을 합송했다. 마이크를 켜고 독송하면 다른 사람이 독송하는 것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줌의 한계가 있다. 서로 운율이 맞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빠르고 어떤 사람은 느리다.

 

친교사의 조건

 

독송한 경은 청정한 삶을 감동적으로 살아 가려면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친교사의 경(upajjhāyasutta)’(A5.56)을 말한다. 친교사를 뜻하는 우빳자야(upajjhāya)는 무슨 뜻일까?

 

우빳자야를 빠알리 사전 PCED194에서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spiritual teacher or preceptor’라고 되어 있다. 각주를 보니 구족계를 받아 수행승이 된 자는 자신이 선택한 수행승 밑에서 5년간을 살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수행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번역에서는 친교사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은사스님에 해당될 것이다.

 

친교사도 조건이 있는 것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본의 각주를 보면친교사의 자격 조건에 대하여 친교사는 적어도 십년간 가르침과 계율을 공부한 수행승 장로이어야 한다.”(앙굿따리나까야 5199번 각주)라고 했다. 이는 율장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일 것이다.

 

누구나 친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적어도 십년 정도는 담마(經藏)와 위나야(律藏)를 공부한 수행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스승 밑에서 배워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에게 권태가 왔는데

 

부처님 당시에 어느 수행승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교사를 찾아가서 하소연했다. 공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존자여, 지금 제 몸은 권태롭고, 저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가르침도 제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해태와 혼침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감동도 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갑니다. 제게는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 있습니다.”(A5.56)

 

 

살다 보면 삶이 권태로울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짜증만 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승도 권태가 온 것 같다.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권태를 말한다. 더구나 가르침에 대한 의혹(dhammesu vicikicchā)’도 있다고 했다.

 

가르침에 대한 의혹

 

가르침에 대한 의혹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아마도 열반에 대한 것이라 본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방기사의 의혹으로도 알 수 있다.

 

방기사는 시인 수행승으로 알려져 있다. 테라가타를 보면 70연시가 있는데 대련시집이라고 한다. 테라가타는 시인 수행승 방기사는 대련시집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시인 수행승은 자신의 친교사가 죽었을 때 열반에 들었는지 의혹을 품었다. 이는 명백히 가르침에 대한 의혹인 것이다. 이는 우리의 친교사는 정말로 완전한 열반에 드신 것일까?”(Sn.2.12)라며 의혹을 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방기사는 의혹으로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부처님을 찾았다. 찾아가서 광대한 지혜를 갖춘 님이시여, 저희의 의혹을 끊어 주십시오.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는지 알려주십시오.”(Stn.346)라고 말했다.

 

한번 의혹이 들면 걷잡을 수 없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의처증이나 의부증 같은 것이다. 거의 망상 수준의 의혹이다. 이는 정신적 장애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정신적 장애에 대하여 과도하게 성장한 정신이자 약화되어 허약한 지혜이다.”(A5.51)라고 했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 의혹이 생겨난다. 방기사도 가르침에 대한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자신의 의혹을 해소해 달라고 간청한다. 부처님은 어떻게 의혹을 해소시켜 주었을까?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의심하는 방기사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이는 그는 이 세상에서 정신과 육신에 대한 갈애를 끊어버렸다. 오랜 세월 잠재하던 악마적 흐름을 끊어 버린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을 완전히 건너뛰었다.”(Stn.35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정신과 육신에 대한 갈애를 끊어 버림으로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갈애를 끊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과 죽음을 완전히 건너뛰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생사를 초월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을 말한다. 방기사의 스승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방기사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방기사는 가장 빼어난 선인이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저는 기뻐합니다. 제 물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속이지 않았습니다.”(Stn.355)라고 말했다.

 

다섯 가지를 소홀히 했을 때

 

의혹은 해소되어야 한다. 가르침에 대한 의혹과 권태에 빠진 수행승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부처님은 수행승의 친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줄 것을 말했다.

 

 

수행승이여, 감관의 문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양을 모르고, 깨어있음에 몰입할 줄 모르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하고, 초야와 후야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대한 명상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항상 그렀다.”(A5.56)

 

 

부처님은 다섯 가지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1)감관의 문을 수호하지 않는 것 (indriyesu aguttadvārassa), 2)식사에 알맞은 양을 모르는 것(bhojane amattaññuno), 3)깨어있음에 몰입할 줄 모르는 것(jāgariya ananuyuttassa), 4)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하는 것(avipassakassa kusalāna dhammāna), 그리고 5)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대한 명상수행을 소홀히 하는 것(bodhipakkhiyāna dhammāna bhāvanānuyoga ananuyuttassa)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에 대하여 소홀히 했을 때 권태가 찾아오고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생겨남을 말한다.

 

상베가(savega)에 대하여

 

수행승은 감동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감동도 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갑니.”라고 했다. 청정한 삶을 살긴 살지만 감동 없다면 아무런 의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태해지고 법에 대한 의심도 생겨날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감동 없는 삶에 대하여상베가로 설명했다. 전재성 선생은 상베가에 대하여 두려움을 포함하는 경이감, 외경, 경외감을 말합니다.”라고 했다.

 

상베가는 어떤 것일까? 빠알리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보니 상베가 (savega)에 대하여 ‘anxiety; agitation; religious emotion’라고 되어 있다. 특히 종교적 정서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외경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빠알리 사전에는 상베가가 들어간 경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D.III,214; A.I,43; II,33, 114; S.I,197; III,85; V,130, 133; It.30; Sn.935; J.I,138”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종교적 외경에 대한 것이다.

 

여러 개의 소개 경에서 “It.30”을 찾아보았다. 이는 이띠붓따까만족의 경에서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현명한 자는 경외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에 따르면 "두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많은 행복과 희열을 느끼며, 번뇌의 부숨을 위하여 근원적 노력을 한다.”(It.30)라고 했다. 여기서 두가지 원리에 대하여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경외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에 자극받아 이치에 맞게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혜에 의한 두려움āabhaya)

 

수행승이 진리에 대한 경외가 없다면 수행하기 힘들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되면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만 경외감을 갖게 된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사자의 경’(S22.78)에서 부처님이 천신들에게 설법했을 때도 나타났다.

 

천신들은 언제까지나 영원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경외감을 느꼈다. 이는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S22.7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천신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윤회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천신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상의 지혜가 생겨났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에 의한 두려움āabhaya)’이다.

 

지혜에 의한 감동āasavega)

 

가르침에 대한 경외감은 어떤 경우에 있게 될까? 이는 이띠붓따까 주석에서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란 태어남 등의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어지는 주석을 보면 태어남, 늙음, 질병, 죽음, 괴로운 곳으로 태어나는 것, 윤회에 뿌리박은 과거의 괴로움, 윤회에 뿌리가 되는 미래의 괴로움, 현재의 음식을 구함에 뿌리박은 괴로움이 경외의 토대가 되어 경외감을 일으키는 경우이다.”(ItA.115)라고 했다.

 

이띠붓따까 주석에 따르면 태어남 등의 경외의 토대를 조건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하는 삶에서 두려움과 경외가 일어남을 말한다. 특히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천신에게서 두려움과 경외가 일어났다. 그래서 천신들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라고 했다. 이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감동이 일어난다. 이는 두려움과 경외감에 따른 감동이다. 아라한이 되었다면 지혜에 의한 감동āasavega)’이 된다. 그러나 천신들은 단지 무상에 대한 지혜가 생겨났을 뿐이다. 영원히 살 것 같았으나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는 윤회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두려움은 감동으로 바뀐다. 부처님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면 지혜에 의한 감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행중 우울증에 걸렸을 때

 

수행승은 감동이 없는 청정한 삶을 살았다. 이는 권태를 유발하고 가르침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우울증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우울증이 걸리면 매사에 활력이 없다. 마치 정신적 감기에 걸리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치유방법으로 부처님은 1)감관의 문을 수호하는 것, 2)식사에 알맞은 양을 아는 것, 3)깨어있음에 철저하는 것, 4)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대하여 통찰하는 것, 그리고 5)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에 대한 명상수행을 하는 것을 제시했다.

 

수행승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았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은 감관의 문을 수호하는 것이다. 마치 성문의 수문장이 감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탐욕의 발생을 예로 들었다. 매혹적인 형상을 보았을 때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율여야 함을 말한다. 그러면서 앙굿따라니까야 2권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했다.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 했을 때

 

금요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을 주의 깊게 경청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빠알리 삼장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놓칠 수 없다. 앞서 언급된 상베가에 대한 것도 빠알리 사전을 찾아서 경전적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탐욕이 일어나는 원리가 앙굿따라니까야 2권에 있다고 했다. 찾아보니 탐욕의 경’(A2.122)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이 탐욕을 생겨나게 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인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다.” (A2.122)

 

 

부처님은 탐욕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아름다운 인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 즉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일 것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한다면 탐욕이 발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아요니소마나시까라(ayonisomanasikāra)라고 한다. 한자어로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이다. 이를 지혜롭지 않은 주의기울임이라고도 한다.

 

지혜롭지 않게 주의기울였을 때 탐욕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성냄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혐오스러운 인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이다.”(A2.123)라고 했다. 혐오스러운 대상에 지혜롭게 주의기울이지 않으면 분노가 일어남을 말한다.

 

탐욕과 분노는 대상과 관련이 있다. 대상이 매혹적일 때 탐욕이 일어나고, 대상이 혐오적일 때 분노가 일어난다. 이는 대상에 대하여 지혜롭게 주의기울이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수행승에게 권태가 일어나고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지혜로운 주의기울임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감동없는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아 간다. 살아 있으니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본능대로 사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혜롭게 살 것을 말씀했다. 특히 수행자의 삶이 그렇다.

 

수행자가 하루하루 본성대로 살아 간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등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산다면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수행자는 동물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보통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청정한 삶(brahmacariya)’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수행자가 청정한 삶을 살지만 감동이 없는 삶이라면 권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어서 정말 열반이 있을까?”라며 가르침을 의심하고 말 것이다. 앙굿따라니니까야 친교사의 경에 나오는 수행승이 그랬다.

 

감동이 없는 청정한 삶은 무기력한 것이다. 감동 있는 청정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감관의 문을 수호 등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은 현명한 주의기울임이다. 이를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 如理作意)라고 한다.

 

대상에 대한 지혜로운 주의기울임이 있을 때 탐욕과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여리작의했을 때 감각기관의 문은 수호된다. 자연스럽게 청정한 삶은 실현된다. 이는 감동이 있는 청정한 삶이다.

 

삶에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삶에 감동이 없으면 권태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는 경외로운 삶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경외(savega)가 일어난다. 놀라움으로 가득차서 감동이 있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에 경외가 일어났을 때 지혜의 경외도 일어난다. 경외가 있는 삶 이야말로 감동 있는 삶이다.

 

 

2021-04-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