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위한 공양, 코19 자비의 식당순례 15 고등어조림
갑자기 허기가 졌다. 점심시간이다. 오전 내내 글쓰기에 몰두했더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물론 금전적 이득이 없는 글쓰기이다. 의무적 글쓰기를 말한다.
이번 글쓰기는 여래십호에 대한 것이다. 오늘 오전에 쓴 것은 로까위두, 세간해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것을 근거로 썼다. 그러나 내용이 많아서 오전에 다 쓰지 못했다. 허기가 져서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토요일 점심을 무엇으로 먹어야 할까? 안양아트센터 맞은 편에 있는 생선구이집이 생각났다. 한번 가보고 싶은 집이다. 지하에 있다. 장사가 안될 것 같은 집이다. 일부로 그런 집을 찾아 간다. 그래야 진정한 코19 자비의 식당순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로 들어갔다. 예상한대로 손님이 없었다. 점심대목임에도 고작 세 사람 앉아 있었다. 토요일 점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점심시간에 이렇게 손님이 없다는 것은 심하다. 나중에 홀로 남게 되었다.
메뉴는 다양하다. 고등어 조립, 삼치구이, 삼치조립, 제육볶음, 동태탕, 청국장, 해물순두부 등 열 개가 넘는다. 서빙하는 남자 주인에게 빨리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다 된다고 말한다. 고등어 조림을 시켰다. 칠천원짜리이다.
식당에 손님이 없다 보니 홀로 먹기도 미안했다. 그러나 맛 있게 먹어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 먹다 보니 의외로 맛있었다. 고등어 조림이 입에 착 붙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얼큰 한 것이 막힌 속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입맛을 되살린 것이다.
음식을 욕망으로 먹기 쉽다. 며칠 전에 그랬다. 집에서 쇠고기 무우국을 만들어 먹었는데 과식했다. 두 그릇 먹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배의 한계용량을 초월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을 먹지 못했다. 파장은 컸다. 몇 날 더부룩한 속으로 보냈다. 욕망으로 먹은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음식의 적당량을 알라는 가르침이 도처에 나온다. 음식은 욕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것이다.’라고 깊이 성찰하여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A3.16)
잘 알면서도 지키지 못한다. 식사는 물론 음주도 그렇다. 과식하거나 과음했을 때 어떤 과보가 뒤따르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젓가락질하기에 바쁘다. 그래서일까 밥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어야 산다. 성인군자라 하여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끼니 때가 되면 똑같이 먹는다. 그러나 누가 먹느냐에 따라 고귀한 음식이 되기도 하고 천한 음식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매 끼니마다 먹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다. 이렇게 평생동안 먹는다. 밥 숟가락 놓는다는 말이 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 죽음이다. 죽을 때 까지 먹는다. 그렇다면 왜 먹는 것일까?
어떤 이는 배고프니까 먹는다고 말한다. 마치 화가 나니까 화를 낸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동물적 삶이다.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그러나 먹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삶이 ‘청정한 삶(Brahmacariya)’일까? 그것은 이어지는 구절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이 먹는 목적이 될 것이다.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불교인들은 어떤 목적으로 살아 가야 할까? 이에 대하여 자연다큐에서 본 새의 부화와 성장, 비상에 대한 이야기가 적절할 것 같다.
자연다큐를 보면, 어미새는 새끼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물어다 준다. 새끼새는 벌레와 같은 거친 먹이를 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마침내 비상하게 된다. 그런데 부화에서 비상까지 두 달 이내에 다 끝난다는 사실이다.
어미새와 새끼새는 한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비상이다.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도 주었음에도 비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날지도 못하는 새가 되었을 때 헛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매일 밥을 먹는다. 배고 고파서 먹기도 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밥을 먹었으면 성장을 하여 결실을 맺어야 한다.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야 밥값을 하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나는 출가하여
승리자의 가르침에 들어갔다.
출가는 나에게 헛되지 않았으니
허물없이 나는 음식을 든다. (Thag.789)
음식은 즐거운 것이다. 밥 먹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음식을 즐겨도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첫번째로는 도둑질한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두번째로는 빚진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세번째로는 유산의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네번째로는 자기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물론 승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
부처님 가르침 대로 살아 도와 과를 이루었다면 이는 부채없이 음식을 즐기는 것이다. 부처님 유산으로 먹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도와 과를 이루지 못한 자들은 빚으로 음식을 즐기는 것이 된다. 최악은 계행이 엉망인 자가 음식을 즐기는 것이다. 이를 도둑이 음식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최상은 자기음식을 즐기는 사람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은 청정한 삶으로 완성된다. 이와 같은 아라한에게 공양하면 큰 과보를 받는다. 아라한은 남에게 빌어먹지만 복전이기 때문에 자기음식을 즐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물없이 나는 음식을 든다.”(Thag.789)라고 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범부들은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또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것이다. 그가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못했을 때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마치 새끼새가 먹이를 먹고 폭발적으로 자라서 비상하는 것과 같다.
오늘 점심때 한끼 식사를 했다. 나 자신을 위한 공양이다. 비록 사먹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밥은 물론 조림찌게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조금씩 담겨 있는 반찬 네 가지도 다 먹었다. 식당주인을 생각해서 반찬을 남겨 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다 먹은 것이다.
계산할 때 “잘 먹었습니다.”라고 크게 말했다. 주인에게 힘이 되는 말이다. 언제 다시 이 식당에 와 볼지 알 수 없다. 코로나19기간 동안 다녀야 할 식당이 많이 있다. 맛있게 먹었다고 하여 다시 가서는 안된다. 고독한 식당순례자이다.
2021-03-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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