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늘 삼십분 앉아 보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4. 12:06

오늘 삼십분 앉아 보았는데

 

 

약속은 지켜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도 약속이다. 삼십분 앉아 있기로 했다. 오늘 오전 삼십분가량 앉았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삼십분 앉아 있기도 쉽지가 않다. 매일 앉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우스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앉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고역이다. 이전에 집중수행 할 때는 억지로라도 앉아 있었으나 나홀로 있을 때는 여의치 않다.

 

어떻게 해야 잘 앉는다고 볼 수 있을까? 두꺼운 방석을 반을 말아 엉덩이를 받혀 주었다. 다리는 반가부좌를 했다. 이전에는 평좌를 했었다. 평좌를 하면 다리 저림이 심한 것 같다. 반가부좌가 좋다는 말을 듣고 실행한 것이다.

 

 

눈은 감았다. 이뭐꼬와 같은 화두선 할 때는 눈을 반개하라고 하지만 마하시 전통에서는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호흡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에 집중하라고 한다. 배의 불러움과 꺼짐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호흡과 함께 배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호흡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가면서 보았다. 인위적 호흡은 하지 않는다. 단지 지켜 보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풍대를 본다고 말한다. 풍대는 움직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다. 한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된다. 호흡에만 집중하면 사마타가 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나 개념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을 호흡수행이라고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라고 한다. 호흡관찰수행이라는 뜻이다. 호흡관찰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상윳따니까야 베살리의 경을 보면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익히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들어,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S54.9)라고 했다. 이 말은 최고의 말이 아닐 수 없다.

 

호흡수행은 호흡새김에 의한 집중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S54.9)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경에서는 16단계 호흡을 소개하고 있다.

 

호흡수행을 하면 무엇보다 악하고 불건전한 현상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S54.9)라고 했다. 이것 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번뇌가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 말이라고 본다. 그래서일까 우다나 메기야의 경을 보면 호흡수행에 대하여 사유의 제거를 위해서 호흡수행을 닦아야 한다.”(Ud.34)라고 했다.

 

호흡수행을 하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든다.”라고 했다. 여기서 고요하고 승묘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구절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청정도론을 참고하라고 했다. 찾아보니 부정의 명상주제는 단지 꿰뚫음의 관점에서만 고요하고 승묘하지, 대상은 거칠고 혐오스러운 것이므로 대상의 관점에서는 고요하지도 않고 승묘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는 달리 어떠한 이유로든 고요하지 않은 것도 없고 승묘하지 않은 것도 없다.”(Vism.8.148)라고 했다.

 

청정도론에서는 호흡수행을 하면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든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해설을 해 놓았다. 이는 청정도론이 경전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논서도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호흡에 대한 새김, 즉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 出入息念)에 대한 설명에서 경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호흡수행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경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베살리의 경’(S54.9)이다. 왜 베살리의 경인가? 이는 부정관 수행을 하다 자살한 수행승들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부정관 수행을 강조했다. 시체가 썩어 가는 모습을 열 단계로 관찰하여 몸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고자 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정관 수행을 하던 수행승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를 일으켜 자살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들은 이 몸을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혐오스러워하여 자결하려 했다. 하루에 열 명의 수행승이 자결하고 하루에 스무 명의 수행승이 자결하고 하루에 서른 명의 수행승이 자결했다.”(S54.9)라고 되어 있다.

 

여러 가지 수행방법 중에서 부정관이 가장 으뜸 수행이다. 이는 부처님이 부정에 관해 찬탄하시고 부정에 관한 수행에 대하여 찬탄하셨다.”(S54.9)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정관 수행의 문제점이 발생하자 부처님은 이를 호흡관 수행으로 돌렸다. 상윳따니까야 베살리의 경은 부정관에서 호흡관으로 전환한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이 부정관에서 호흡관으로 바꾼 이유에 대하여 풀이해 놓았다. 경에서는 단지 고요하고 승묘한 감로의 지복에 든다.”(S54.9)라고 짤막하게 표현해 놓았으나 청정도론에서는 부정관의 문제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대상은 거칠고 혐오스러운 것이므로”(Vism.8.148)라는 표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시체를 대상으로 했을 때 혐오스런 모습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시체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시체를 대상으로 하여 부정관 수행을 했을 때 몸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아 더 이상 몸에 대해서 탐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상으로서 시체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이런 혐오를 이겨 내지 못하고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는데, 이는 범부에서부터 사향사과의 성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정관을 하여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사향사과의 성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들의 근본적인 불선한 업이 설익은 것이 익어 다양한 의도로 이 보름 동안 자의로나 타의로나 목숨이 끊어지는 경우가 발생했다.”(Srp.III.266)라고 한다.

 

자살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전 악행한 업이 익어서 생긴 것이다. 끔찍한 시체를 보고서 과거 전생에 저지른 악행이 무르익어서 자신의 몸을 혐오하여 자살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아무도 업이 익은 것을 막을 수 없었다.”(Srp.III.266)라고 했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 설령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과거 전생에 저지른 행위일지라도 업이 익으면 과보로 나타난다. 부정관 수행을 하다 자살한 수행승들도 업이 익어서 자살한 것이다. 혐오스러운 시체를 보았을 때 이것이 조건이 되어서 업이 익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정관 대신에 호흡관으로 전환시켰다. 그렇다고 부정관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다. 부정관은 여전히 있지만 자살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호흡관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십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눈을 감고 앉아 있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떠오른다. 이럴 때 법구경에서 마음에 대하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Dhp.35)것임을 실감한다. 또한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아서 마치 물고기처럼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34)라는 말이 실감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호흡을 따라가며 집중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일어났던 생각도 금방 사라진다. 눈을 뜨고 있다면 대상에 끄달려 갔을 것이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금방 호흡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혼침에 빠질 수 있다. 멍한 상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을 보면 빛에 대한 지각을 갖추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D2.65)라고 했다.

 

좌선하다가 졸립거나 혼침에 빠졌을 때 빛을 지각하라고 했다. 이는 마치 마음의 달을 하나 띄우라는 것과 같다. 마음속에 환하게 빛나는 달을 하나 띄었을 때 그 밝음으로 인하여 졸음이나 혼침이 싹 달아나게 될 것이다. 마음의 달을 하나 띄어야 한다. 이를 빛에 대한 지각(ālokasaññā)’이라고 하는데 한자어로 광명상(光明想)이라고 한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처음에는 앉아 있었으나 가면 갈수록 빈도가 줄어 들어 앉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런데 지난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합송한 경을 보니 부처님은 수행을 강조했다. 가르침을 학습하는 것도 좋지만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서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수행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수행은 집중수행 때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본래 홀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모여서 하면 서로 힘을 받아 좋긴 좋지만 궁극적으로는 혼자 해야 진리를 꿰뚫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교학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다. 교학과 수행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해야 한다. 하루에 삼십분만이라도 앉아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오늘이 그 첫째날이다.

 

 

2021-04-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