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고요를 즐기는 고독한 수행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8. 07:40

고요를 즐기는 고독한 수행자


전쟁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깊은 밤이다. 홀로 깨어 있다. 고요를 즐긴다. 그러나 고요도 나름이다. 단지 조용하다고 해서 고요가 아니다. 금방 깨질 것이라면 지혜없는 고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생멸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어떻게 아는 것인가? 무상, , 무아를 아는 것이다. 생멸하는 것은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집착할 필요가 없다.

시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으로 괴로워한다. 괴로움은 실체가 있는가?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운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즐거움도 느낌이다. 즐거운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결국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느낌도 괴롭고, 즐거운 느낌도 괴롭다. 느낌은 모두 괴로운 것이다. 일체가 괴로운 것이다.

느낌은 물거품같은 것이다. 비가 세차게 내릴 때 바닥을 치는 물거품같은 것이다. 물거품은 즉시 사라진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땅바닥을 치는 순간 사라진다. 그런데 빗물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차게 비가 내릴 때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거품을 내며 사라진다. 느낌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느낌에 목숨을 건다.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 쥐려 한다. 탐욕이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감각적 느낌에 탐닉해 있다면 죽어도 좋아!”라고 할 것이다. 싫은 느낌이면 어떠할까? 아마 죽어도 싫어!”라고 할 것이다.

느낌에 목숨 건다면 괴롭다. 느낌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좋은 느낌이든 싫은 느낌이든 집착하면 괴롭다. 결국 우리는 괴로운 존재이다.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 일시적이다. 단지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고성제를 설한 이유로 본다.

느낌은 생멸한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재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에는 조건이 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은 없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낌은 생멸한다. 좋은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고 싫은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한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괴롭다. 욕망을 부려보지만 갖지 못해서 괴롭다. 분노해 보지만 자신을 해치기 때문에 괴롭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면 괴롭지 않는 것일까?

불고불낙수가 있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중립적 느낌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평온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 깨질지 모른다. 불안정한 평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평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알아차림이 없는 평온은 금방 좋고 싫은 느낌이 된다.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마치 날씨와도 같은 것이다.

무지한 자의 평온은 짧다. 평온을 길게 하려면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은 괴로운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느낌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느낌은 찰나생찰나멸 한다. 생겨나는 즉시 사라진다.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다. 그래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찰나생찰나멸 한다는 것이다. 너무 빨리 생멸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눈과 귀로 끊임없이 대상을 접한다. 매혹적인 형상을 보았을 때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혐오스러운 대상을 보았을 때 싫은 느낌이 발생한다. 그러나 느낌은 발생하는 순간 즉시 소멸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좋은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고 싫은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한다. 심하면 목숨까지 건다. 이것은 집착이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더 괴로울 때가 있다. 싫어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눈을 감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청각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보기 싫다고 하여 눈을 감거나 듣기 싫다고 하여 귀를 막고 살 수 없다. 방법은 알아차리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알아차리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어떤 지혜인가? 생멸의 지혜이다. 무상, , 무아의 지혜이다. 이를 한문장으로 만들면 생겨난 것은 그 무엇이든지 사라지기 마련이다.”(S56.11)가 될 것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희망의 메시지와 같다. 왜 그런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생겨난 것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영원하기를 바란다. 몸은 무너져 죽을지라도 영혼은 영원하다고 믿는 것이다.

생멸한다고 하여 단멸하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자들은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건발생이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를 남긴다. 결과는 새로운 조건이 되어 발생된다. 연기하는 것이다.

나는 없다. 조건 발생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조건발생하기 때문에 무아이다. 영혼은 없다. 왜 없는가? 조건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개념이다. 언어로서 개념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언어적 개념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환생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재생이라면 맞다. 조건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온은 콸콸콸흐르는 냇물과도 같다.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같은 물처럼 보이지만 흘러가기 때문에 다른 물이 된다. 물이라는 명칭만 있을 뿐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같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온은 불꽃과도 같다. 소리 없이 타고 있지만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같은 불처럼 보인다.

오온은 찰나생찰나멸하며 찰찰찰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과도 같다. 또 오온은 찰나생찰나멸하며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오온은 찰나생찰나멸하며 동시에 상속된다. 조건발생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오온은 무아이다.

생겨나는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는 희망의 메세지이다. 조건발생하여 상속하기 때문에 조건발생하는 고리만 끊어 주면 고요에 이를 수 있다.

고요한 깊은 밤이다. 전쟁과도 같은 현실에서 고요를 맛보고 있다. 그러나 이 고요도 생활속에서는 여지없이 깨져 버린다.

적막을 고요라 할 수 없다. 외로움과 고독이 다른 것과 같다. 외로움은 타인을 의지처로 삼으려 하지만 고독은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다. 고독한 수행자는 고요를 즐긴다.


Anicc
ā sabbe sakhārā
upp
ādavayadhammino,
Uppajjitv
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S15.20)


2021-03-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