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꼭 안아주며 “그래, 괜찮아.” 토닥토닥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7. 07:22

꼭 안아주며 “그래, 괜찮아.” 토닥토닥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본래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자비가 있고, 자비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도 최종단계는 궁극의 진리를 본 사람이다. 사향사과에서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진리의 완성이자 깨달음의 완성이 된다. 동시에 자비 그 자체가 된다.

아라한은 탐욕을 부릴 수도 없고 화를 낼 수도 없다. 탐욕과 성냄의 뿌리가 뽑혀진 아라한에게 욕망과 분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의 자리에 관용이, 분노의 자리에 자애가 있다. , , 치가 소멸된 아라한은 그 자리에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아라한은 지혜로울 수밖에 없고, 아라한은 자애로울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이상적 인간상은 아라한이다.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사람이다. 불교인들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가 되려 하기 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한 이 세상에서는 두 명의 부처가 있을 수 없다. 세상에 태양이 하나 있는 것과 같다. 부처가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두 명의 부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법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렸을 때 어느 때인가 부처가 출현한다. 그때 발견한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발견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부처가 발견한 연기법으로 아라한이 된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깨달음의 내용이 동일함을 말한다. 이른바 깨달음의 보편성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남에게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깨달음이 된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나서 오비구를 찾아 갔다. 자신의 깨달음을 남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의사가 새로운 이론을 임상실험해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오비구가 깨달았을 때 이 세상에서 아라한은 여섯 명이다.”라고 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된 순간이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분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불교적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오온을 무상, , 무아로 보는 것이다. 이른바 삼법인의 지혜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오온인가?

 

부처님의 관심사는 괴로움에 있었다. 자신의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다. 그 괴로움은 크게 생, , , 사에 대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 출가했고 동시에 윤회를 종식하기 위해 출가했다. 이런 사실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했다. 지혜로운 자는 자비로울 수밖에 없고 자비로운 자는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지혜와 자비는 무상, , 무아의 지혜를 아는 자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 그러 한가? 오온이 생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내가 있다라는 자만이 떨어져 나갔을 때 무아가 되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일까?

살아 가면서 수많은 경계에 부딪친다. 부딪칠 때마다 처참하게 깨진다. 욕심내고 분노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눈 가리고 귀 막고 살 순 없다. 심산유곡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와 함께 살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수없이 경계에 부딪쳐 깨지다 보면 나름대로 삶의 지혜도 생긴다. 동시에 자비심도 생긴다. 깨닫는다고 하여 심산유곡에서 홀로 사는 것보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나을 수 있다. 그래서 도는 세상속에 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자비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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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천장사에 갔었다. 그때 오랜만에 만난 법우님들과 감격의 포옹을 했다. 따뜻한 마움으로 환대해 주는 법우님들로 인하여 마음은 충만되었다. 이렇게 안아 줄 수 있는 것이 자비의 마음이다.

자비의 마음과 관련하여 유튜브에서 이런 영상을 보았다. 무의식연구소 채널에서 본 것이다. 진행자는 상담자의 트라우마에 대해 말 했다. 특히 여자들은 어렸을 때 성추행 또는 성폭행 당했을 때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가 된다고 한다. 그때 일이 해결되지 못했을 때 콤플렉스로 남아 있어서 알게 모르게 영향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진행자는 시청자에게 물었다. 아이가 성추행이나 성폭행 당했을 때 부모로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두려움에 떨며 고백한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 어떤 부모는 화를 내며 상대방을 찾아가려 할 것이다. 또 어떤 부모는 비밀로 하라고 말할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 가장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꼭 안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꼭 안아 주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다. 놀란 아이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다. 또한 괜찮아.’라고 말했을 때 아이는 안정을 찾을 것이다.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한다.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말한다.

몇 해전의 일이다. 마가스님의 53선지식 순례를 따라 간 적 있다. 전국 각지에서 전세버스를 대절하여 어느 한 절에 집결하는 것이다. 순례의 하이라이트는 꼭 안아주기에 있었다. 스님들이 순례자를 한사람씩 포옹해 주는 것이다. 아마 자비실천 방법으로 행한 것 같다. 이런 프로가 있어서일까 순례자들이 무척 많았다.

 


외국 영화를 보면 포옹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이 만날 때 서로 포옹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정말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포옹하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나라는 어떠 한가?

사람들은 자비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 인색한 것 같다. 자식이 오랜 만에 집에 왔어도 왔어?”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포옹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났다면 포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옹하며 한마디 한다면 감격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자비의 마음이다. 부모는 항상 자식에게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낸다. 어린 아이가 성추행이나 성폭행 당했을 때 야단치거나 숨기기 보다는 안아주며 괜찮아.”라고 했을 때 아이는 안심한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과도 같다.

부처님을 사생자부(四生慈父)라고 한다. 부모로서 부처님을 말한다. 그런 부처님은 자애와 연민의 부처님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는 자애와 연민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탐욕이 소멸된 자리에 관용이, 성냄이 소멸된 자리에 자애가, 그리고 어리석음이 소멸된 자리에 지혜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비로울 수밖에 없다. 부처님같은 사람이다. 지혜가 계발되면 자비로워질 수밖에 없다. 왠만한 모욕이나 수모도 참고 견딘다. 무아의 성자에게는 자아개념이 없기 때문에 때리면 맞는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안아 줄 것이다. 안아주면서 그래, 괜찮아.”라고 말하며 토닥토닥할 것이다.


2021-04-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