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마음이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2. 3. 08:42

마음이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하고자


스마트폰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 밖에 눈이 오나 보다. 어제 저녁 늦게 일터에서 귀가할 때 눈이 간간히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지금 새벽 4시대이니 많이 쌓였을 것 같다. 지하에 주차해 놓기를 잘 했다.

마음보는 수행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보는 타심통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는가? 한마디로 노팅한 것을 왓칭하는 것이다.

노팅과 왓칭이라는 말은 2008 12월 달에 처음 들었다. 논현동에 있는 한국위빠사나 선원 갔었을 때이다. 지금은 한국명상원으로 바뀌었다. 2008년도라면 불교수행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때이다. 수행을 해 보고 싶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글쓰기가 3년째로 접어 들어 물이 오를 때였는데 수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갈 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다. 수계를 받은 도심포교당이 있었지만 기도를 강조했다. 원장스님은 늘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관음정근할 때 절을 했다.

삼사순례 때 관음정근이 30분 이상 이어졌다. 그때 108배 했었다. 지장도량에 순례가면 지장정근을 했는데 입으로는 연신 지장보살, 지장보살,..”하면서 동시에 절을 했다.

기도의 절정이 있다. 밤샘철야기도 하는 것이다. 금강회에서 주관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정근을 말한다. 매달 마지막째주 토요일 저녁에 열렸다. 저녁 10시에 시작하여 새벽 2시 정도에 끝나기 때문에 4시간가량 하는 것이다.

 


밤샘 기도를 하려면 먼저 식사를 해야 한다. 허기진 상태에서는 힘들다. 큰 소리로 몇 시간 독송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선원에서는 팥죽을 제공한다.

기도는 천수경 독송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로 시작된다.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기도가 시작된다.

천수경은 다 외웠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워야 했다. 15분 정도 걸리는 천수경에서 신묘장구대라니는 거의 절반에 해당된다.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전송과 후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기도를 하면 반드시 천수경 독송부터 시작한다. 마침내 108독이 끝나면 일쇄동방결도량”으로 시작되는 게송이 나온다. 사방찬 게송이 나오면 드디어 끝났구나!”라며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마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듯 청량한 느낌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기도는 천수경 후송으로 마무리된다.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언제 처음 해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2007년이다. 그때 우리 기수에서 법당봉사를 했었기 때문이다. 배식을 하고 설거지를 했는데 반년 했다. 그때 일을 블로그에 사진과 동영상과 함께 기록해 놓았다. 요즘도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에 참여하라고 문자가 온다.

 

 


봉사기간 동안 기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장처럼 큰 법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는데 기도가 시작될 때는 장엄했다.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다들 신심이 넘쳐 나는 것 같았다. 기도의 클라이막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8독 하는 것이다. 본래 7-8분 걸리는데 매우 빠른 속도로 독송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빨라져서 웅얼웅얼 거릴 정도였다. 일종의 몰입이라 볼 수 있다. 그것도 수백명이 함께 하니 집단몰입이라 볼 수 있다.

기도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근본문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타력적이고 유신론적이라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기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봉사기간 동안에만 참여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수행을 해 보고 싶었다. 스님들이 하는 참선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선원에서는 수행보다는 기도를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부분 절이 그럴 것이다. 이렇게 수행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때 현대불교신문사이트에서 기사하나를 보았다. 위빠사나수행처에 대한 기사였다. 논현동에 있는 한국위빠사나선원를 소개한 것이다.

2008
12월 한국위빠사나선원를 찾아 갔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열렸다. 법문과 행선, 좌선, 인터뷰 순으로 진행되었다. 묘원선생이 지도했다. 미얀마에서 7년 수행한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처음 위빠사나 선원에서 들은 것은 노팅과 왓칭이다. 묘원선생은 법문시간에 노팅과 왓칭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를 마음 보는 수행이라고 했다. 이날의 일을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노팅(noting)은 아는 마음이고 왓칭(watching)은 보는 마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대상과 접했을 때 자신의 마음을 알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보는 수행이라 하는데, 이를 사념처에서는 심념처라고 한다.

어떻게 노팅한 것을 왓칭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 가능할까? 내 마음 바깥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보는 것일까? 불교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나가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 유신론적 종교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몸과 마음은 정신-물질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정신-물질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온에서 생멸만 있을 뿐이다. 사념처에서는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로 알 수 있다.

마음도 생멸한다.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어떤 마음인가? 대부분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마치 엔트로피가 증대되어 무질서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마음을 닦는다라는 말보다는 제어한다라는 말이 더 적합할 듯하다. 본래 깨끗한 마음이 있어서 닦는다기 보다는 본래 불선한 마음이기 때문에 제어하는 것으로 본다.

가만 있으면 불선업을 짓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앉아만 있어도 죄를 짓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가만 있으면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인가? 팔정도 정사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ama), 악의(vy
āpāda), 폭력(hisā)에 대한 것이다. 이는 메기야경’(A9.3)에서도 확인된다. 새내기 수행자가 경치 좋은 한적한 곳에 홀로 있었을 때 이와 같은 세 가지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올라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젊은이의 머리 속에는 온통 성적 상상력뿐이라고 한다. 단 한시도 성적 상상력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단 젊은 사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양성으로 갈라져 있는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성적생각을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성적 상상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메기야가 사람이 없는 조용한 숲속에 있었음에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어 났다는 것은 이성을 직접 접하지 않아도 생각 속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지금 사람의 마음을 해부한다면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마도 성적 상상력으로 가득할 것이다. 특히 젊은 층으로 갈수록 심할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 있다. 왜 그런가? 성이 양성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먹을 것이 생각나듯이, 이성을 보면 끌리는 것은 마음 바탕에 성욕이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성의 인간은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만 있어도 죄를 짓는 것은 성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라고 하는데 빠알리어로 까마(kama)라고 한다. 인도 성에 관한 서적 '까마수뜨라'가 연상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의업으로 나타난다. 모두 불선업에 대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이 앉아만 있어도 죄를 짓는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죄를 짓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팔정도에서
욕망을 여읜 사유(nekkhammasa
kappo), 분노를 여윈 사유(avyāpādasakappo), 폭력을 여읜 사유(avihisāsakappo)를 하라고 했다. 이를 올바른 사유, 삼마상깝뽀라고 한다.

올바른 사유가 있으면 올바르지 않은 사유도 있다.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 폭력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 언어적으로 신체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다. 언어적으로는 거짓말, 사기, 거친 말, 험담으로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살생, 도둑질, 음행으로 나타난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의업이 되어 구업과 신업이 뒤따른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올바른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정사유가 정견과 함께 왜 지혜의 다발에 속하는지 이유가 된다.

마음보는 수행을 해 보고자 한다. 2008년 처음 접했던 노팅한 것을 왓칭한다.”라는 말을 떠 올린다. 아는 그마음을 또 아는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마음 바깥에 어떤 마음이 있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뒤의 마음이 앞의 마음을 하는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기 때문에 뒤의 마음은 앞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다.

 

왜 마음이 마음을 알아야 할까? 이는 집착을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노팅만 있고 왓칭이 없으면 내가 알아차렸다.”라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것이 집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알아차린 마음을 알아차린 마음이라고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이 왓칭이다. 모든 마음에 적용할 수 있다. 대념처경 심념처에서는 탐욕에 매인 마음을 탐욕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는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다.


지금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차리지 못하면 구업이나 신업을 짓게 된다.

사고는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격분했을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살인이 일어날 수 있다. 긴 고통과 불행의 시작이다. 사건은 온데간데 없고괴로움만 남아 있는 것이다. 행위는 순간에 발생하여 사라지지만 업으로 남아 있다. 살인업에 대한 과보를 받으면 괴롭게 살아간다. 이 생에서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고통받는다.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제3자가 보듯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분노의 마음을 분노의 마음이라고 보았을 때 더 이상 분노의 마음이 아니다. 분노의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면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서 더이상 분노의 마음이 아닌 것이 된다. 알아차린 마음만 있게 된다. 이것이 노팅(noting)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그 알아차린 마음마저 보아야 한다. 그 알아차린 마음을 알아차린 마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것이 왓칭(watching)이다.

노팅과 왓칭하면 불선업을 지을 수 없다. 가만 앉아 있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머리 속에 성욕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고 분노나 폭력의 마음이 발붙이지 못한다. 그래서 정사유를 하면 정어, 정업, 정명이 되기 때문에 계는 자동으로 지켜져서 구업과 신업을 짓지 않는다. 계를 지키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보호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 , 치 삼독과 같은 의업도 짓지 않게 된다. 정사유를 하면 삼업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십선업이 되어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수행으로 가능하다.


2021-02-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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