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멍때리기도 명상이라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21. 09:04

멍때리기도 명상이라는데


새벽시간을 사랑한다. 자는둥마는둥 하다 깨어 앉아 있으면 고요해서 좋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다. 아침 6시까지는 나의 시간이다. 하루 오전, 오후, 저녁 세 타임이 있다면, 나에게는 새벽타임이 하나 더 있다. 그런 새벽타임은 사유하기 좋은 시간이다.

새벽타임은 또한편으로 멍때리기 하기 좋은 시간이다.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다. 굳이 애써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사람들 입에서 멍때리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어떤 이는 경치좋은 카페에 가서 창밖을 바라보며 멍때리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대체 멍때리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멍때리기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긍정적 내용이 많다. 아무생각없이 멍하니 있는 것은 두뇌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뇌를 많이 쓰는 현대인들에게 뇌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멍때림 하는 것에 대하여 컴퓨터 디폴트모드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 초기화 상태를 말한다.

멍때리기를 일종의 명상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생각없이 멍하니 있는 것에 대하여 '무념무상'의 명상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몰라, 몰라라며 멍때리기 하라고 말한다.

 


멍때림 하기 보다는 사유를 즐긴다. 생각은 일어나는 것이지만 사유는 일으키는 것이다. 팔정도 삼마사마디에서는 위딱까(vitakka)라고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일으킨 생각을 종치는 것으로 비유한다. 의도적 행위에 해당된다. 모든 사마타명상은 이처럼 종치는 행위와 같은 위딱까, 일으킨 생각에서 부터 시작된다.

부처님에 대해 명상하는 불수념도 위딱까에서 부터 시작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대상을 계속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위짜라(vicārā)이다. 이를 숙고 또는 지속적 고찰이라고 말한다. 종이 계속 울리는 상태를 말한다.

위딱까와 위짜라는 초선정에 해당된다. 초선정 정형구를 보면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ā)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라고 되어 있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는 모두 위딱까와 위짜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에 사유하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다. 주제를 정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면 글로 표현한다. 스마트폰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세상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감한다.

공감없는 글이 있다. 에스엔에스(SNS)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진을 이용하여 신변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를 속된말로 표현하면 자랑질이다. 재가불자이건 출가불자이건 간에 사진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식은 자랑질이 되기 쉽다.

울림이 있어야 한다. 좀 더 고상한 말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는 공감이다. 공감 없는 글은 추천받기 힘들다. 사진을 설명하는 식의 글이 그렇다. 신변 이야기도 그렇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자신과 세상에 대한 물음, 질문, 의문의 글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유해야 한다.

사람들은 멍때리기를 말한다. 심지어 법사도 멍때리기를 말한다. 멍때리기 하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일종의 명상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부처님 가르침에 멍때리기 명상은 보이지 않는다. 사마타 명상주제 40가지에도 보이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에도 그런 것은 없다.

대상에 집중하거나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명상이다. 멍하니 아무생각없이 앉아 있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아무리 무념무상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붙여 주어도 멍청하게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늘 깨어 있으라고 했다. 이는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원리 중에 하나는 늘 깨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까?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이를 사띠 또는 알아차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잠 잘 때도 사띠와 함께 깨어남에 염두에 두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 몸과 마음은 도적의 소굴이 되기 쉽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지키지 않으면 도둑이 제집 드나드는 것처럼 활개치기 쉽다. 그래서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몸과 정신이라는 감각의 문을 수호해야 한다.

멍때림 한다는 것은 정신 줄 놓고 있다는 것과 같다. 무념무상이라 하지만 감각의 문을 수호하지 않으면 도적놈들의 소굴이 되기 쉽다. 그래서 늘 깨어 있으라고 했다. 이것이 명상이다. 부처님은 명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명상에서 광대한 지혜가 생기고 명상하지 않으면 광대한 지혜가 부서진다. 성장과 퇴락의 두 가지 길을 알아서 광대한 지혜가 성장하도록 거기에 자신을 확립하라.”(Dhp.282)

 


명상에서 지혜가 생겨난다고 했다. 누구나 명상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삼장에 통달해도 명상을 하지 않으면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지혜에 대하여 '광대한 지혜'라고 했다. 이를 냐나(ñāa)와 닷사나 (dassana)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적 사유와 이해로 얻어지는 지혜는 냐나()이고,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닷사나()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광대한 지혜는 명상체험으로 얻어진 닷사나를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송에 인연담이 있디. 삼장에 통달한 뽀틸라 장로가 칠세아라한에게 배운다는 내용이다. 칠세아라한은 존자여, 개미굴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굴로 도마뱀이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잡으려면 다른 구멍을 막고 여섯 번째 구멍은 놔두고 그 구멍으로 잡아야 합니다.”(DhpA.III.417-421) 라고 설명했다. 감각기관을 단속하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상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상하면 지혜가 생긴다. 이는 지혜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 라는 법구경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지혜인가?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온이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을 보고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명상이라 볼 수 있을까?

 

 

2021-01-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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