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26. 08:44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에


눈 떠보니 새벽 두 시, 이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잠을 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꿈에 시달려야 한다. 깨고 나면 피곤한 일이다. 아침 6시까지 4시간 남았다. 이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엄지에 맡겨 보기로 했다.

먼저 스탠드 불을 켰다. 천정 형광등 보다 낫다. 유년시절 시골 살 때 등잔불 추억도 있다. 눈도 보호 된다. 스마트폰 밝기도 50%로 조정했다. 다음으로 물을 한잔 마셨다. 결명자 등으로 끓여 놓은 물이다. 그냥 찬 물을 들이키는 것 보다 부드럽다. 이럴 땐 감로수가 따로 없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엄지를 친다. 한줄 쓰고 사유하고, 또 한줄 쓰고 사유한다. 시간은 철철 남아 있다. 이 고요함을 사랑한다. 고요라기 보다는 평온함이 나을 것 같다. 어느 것에도 방해 받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이다.

이 고요함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무료하거나 권태롭지 않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사유하고 숙고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를 글로 정리하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인생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한다.

자신의 머리로는 한계가 있다. 남의 머리를 빌려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외장하드와 접속해야 한다. 경전에 의지하는 것이다.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에 해법이 있다. 그러나 책은 사무실에 있다.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을 소환하는 수밖에 없다.

고요와 평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대상과 접촉하면 깨지게 되어 있다. 그로 인하여 호불호와 쾌불쾌가 생겨난다. 이럴 때는 항상 사띠(sati)하라고 말한다.

사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선업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행해 놓고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늦은 것이다.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사띠를 우리말로 뭐라고 불러야 할까?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영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번역한 말이다. 그러나 기억을 뜻하는 사띠와는 무관한 말이다. 대체 무엇을 기억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김진태 선생은 최근 자신의 저서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에서 한찰나 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억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제따와나선원의 일묵스님은 체험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과정에서 경험한 것을 말한다.

사띠는 선법이다. 이는 아비담마 분류법에 따른 것이다. 52가지 마음부수가 있는데 사띠는 아름다운 마음부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띠를 한다는 것은 마음을 선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선업을 짓게 된다.

대상에 주의기울이는 것도 사띠이다. 대상을 지켜보는 것이다. 여기에 의지작용은 없다. 호불호와 쾌불쾌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때 알아차림이 생겨난다. 즐거운 느낌은 즐겁다고 알고 괴로운 느낌은 괴롭다고 아는 것이다. 단지 알아차릴 뿐이다. 좋다고 하여 욕심내거나 싫다고 하여 성내지 않는다. 이렇게 알아차림 하기 때문에 사띠는 선법이다.

선법으로서의 사띠는 항상 삼빠자나와 함께 사용된다. ‘사띠마삼빠자노또는 삼빠자노사띠마라 하여 두 단어가 결합된 형태로 사용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을 보면 새김을 확립하여 알아차리며라고 번역했다. 먼저 대상을 파악하고 그 다음에 아는 것을 말한다.

크게 네 가지 대상이 있다. , 느낌, 마음, 법에 대한 것이다. 이를 신, , , 법 사념처라고 한다. 네 가지 사띠의 대상을 말한다. 몸에 대한 것을 보면 까예 까야누빳시위하라띠라고 한다. 이 말은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한다.”라는 뜻이다.

까야누빳시는 몸관찰을 뜻한다. 몸을 계속 지켜보는 것이다. 이는 한찰나 이전의 것을 지켜본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지켜보면 망상이 치고 들어올 틈이 없을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를 관찰하라고 한다. 호흡에 따른 복부의 부름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복부관찰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근면하게 새김을 확립하여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사띠하는데 있어서 근면함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위리야를 말한다. 우리말로 정진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삼마와야모(正精進)와 삼마사띠(正念)와 삼마사마디(正定)가 묶여 지는 것이다. 이를 팔정도에서는 정학의 다발로 분류한다.

사띠는 정진과 결합되었을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사띠를 유지하려면 노력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좌선해 보면 알 수 있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gk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위리야이다. 이렇게 위리야가 사띠와 결합되었을 때 고요가 찾아 온다.

사띠에 대한 갖가지 번역어가 있다. 마음챙김, 새김, 기억, 잊지 않음, 마음지킴, 주의기울임 등 다양하다. 모두 타당한 말이다. 이는 사띠의 뜻이 매우 광범위함을 말한다. 마치 담마라는 말이 법을 뜻하지만 진리, 가르침, 원리, 것 등 다양한 의미가 있는 것과 같다.

사띠가 수행용어로 사용될 때는 항상 삼빠자나와 결합되어서 사용된다. 그래서 사띠마삼빠자노또는 삼빠자노사띠마라는 정형구로 사용되는데 새김을 확립하여 알아차린다.”라는 뜻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찰나를 관찰하려면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이를 카니까사마디라 하여 순간집중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움직이는 대상으로 순간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면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사띠는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와 다른 것이다. , 느낌, 마음, 법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신체적 형성과 관련 있는 것이 호흡이다. 호흡은 생멸한다. 느낌도 생멸하고 마음도 생멸한다. 모든 현상은 생멸한다. 이렇게 오온의 생멸을 지켜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왜 하는 것일까? 생멸을 지켜보아서 어쩌자는 건가? 수행에는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깨달음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대체 무엇을 깨닫자는 것일까? 자신과 세상이 하나됨을 아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합일과 관련이 없다. 대상과 합일하는 것은 사마타수행이다. 개념과의 합일이다.

개념은 실재가 아니다. 언어적 사유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오온을 관찰하여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적으로 이해하며 아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체험이다. 실재를 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실재이다. 접촉에 따른 느낌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사띠수행이라고도 하고 알아차림 수행이라고도 한다.

무엇을 알아차림 하는가?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잘 관찰하면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관찰하는 것이다.

불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 그가 무상, , 무아를 말하면 그는 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합일을 말하면 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합일은 개념과의 합일이다. 사마타수행을 하면 개념과의 합일이 될 수 있다. 실재하지 않는 관념과의 합일을 말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실재를 볼 수 있다.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사띠와 삼빠자나를 함으로서 가능하다. 오온에서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무상이다. 무상이라하여 인생무상, 계절무상, 자연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범부의 무상과 수행자의 무상은 다른 것이다. 수행자는 오온에서 무상을 본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하는 무상을 본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아서 괴롭다.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조건이 바뀌면 사라져서 괴롭다. 누군가 일체개고라 하여 책상도 괴로워 합니까?”라고 물으면 곤란하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해 설했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 안에서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무상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또한 무아이다. 생과 멸만 있을 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무아라 하여 내가 없다라기 보다는 나의 실체가 없다라고 보아야 한다. 누군가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유아론에 기반한 질문이기 쉽다. 찰나생찰나멸하며 상속되기 때문에 무아이다. 이렇게 오온에서 찰나생찰나멸하며 상속되기 때문에 무상, , 무아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오온에서 무상, , 무아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적으로 아는 이해차원이 아니다. 실재를 봄으로 인하여 체득되는 지혜를 말한다. 언어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지혜이고 실재를 보는 것도 지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알고 보라.”고 했다. 이를 야타부따냐나닷사나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수행처에서는 늘 사띠하라고 말한다. 이 말은 늘 깨어 있어라는 말과 같다. '늘 알아차려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수행처를 벗어나서 일상에서 사띠하기가 쉽지 않다.

작업하면서 사띠할 수 없다. 운전중에 사띠할 수 없다. 일할 때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일상에서는 늘 사띠해야 한다. 그렇다고 좌선이나 행선하는 것처럼 면밀하게 관찰할 수 없다. 이럴 때는 사띠가 단독으로 쓰여 기억의 의미가 된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이럴 땐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며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고요한 새벽이다. 이제 일상이 시작되면 이 평온도 깨질 것이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불선업을 저질러야 할까? 알 수 없는 인생이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주변환경에 영향받는다. 선원에서 살지 않는 한 피해갈 수 없다. 세속에 살면 세속의 정견에 따라야 한다. 번뇌와 함께 하는 세속적 정견이 있다.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이 기억해야 한다.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2021-01-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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