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16. 13:10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닙비다, 위라가, 위뭇띠. 이를 염오, 이욕, 해탈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해탈이다. 자유를 말한다.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이다.

초기경전에서 닙비다(nibbidā), 위라가(virāga), 위뭇띠(vimutti)라는 말을 도처에서 접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을 보면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해탈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해탈하려면 먼저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것이 빠알리어로는 닙비다이고 한자어로는 염오이다. 이 말은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면 대자유를 얻을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대체 무엇을 싫어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호불호와 쾌불쾌로 살아간다. 한번 좋으면 죽도록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라싫어한다. 닙비다는 그런 싫어함이 아니다. 자신에 대해 싫어 하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자신을 싫어한다. 오취온적 존재로서의 자신에게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불쾌하다. 그 순간 마음은 불선법에 지배받는다. 이렇게 해서는 나만 손해이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불선업을 지었을 때 언젠가 과보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손해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에 대해 연민하면 180도 반전된다. 불선업이 선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때 흔히 수행처에서 하는 말이 지금 내마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마음을 보십시오.”라고 말한다. 마음이 마음을 보라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생겼을 때 그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 나에게 불쾌한 감정이 생겼네.”라고 아는 것이다. 이것이 1차적 앎이다. 그러면 거기서 딱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잘 멈추어지지 않는다.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에 되지 않는다. 여러 번 시도해야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 바깥에 별도의 마음이 있어서 마음을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흔히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마음보는 수행에서는 우리 몸과 마음 밖에 다른 마음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뒤의 마음이 앞의 마음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초기불교 강연을 듣다보면 하나의 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찰나생찰나멸에 대한 것이다. 찰나찰나 조건발생하여 상속됨을 말한다. 마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한찰나에는 한마음만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한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좋아하면서 동시에 싫어 하는 일은 없다. 웃으면서 동시에 우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누군가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한다면 시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비담마 논장이 있다. 마음의 지도와 같은 아비담마 논장을 보면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이다. 좋아함과 싫어함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좋아하다가도 조건이 바뀌면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조건이다. 조건의 다른 말은 연기이다.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는 조건지어져 발생함을 뜻한다. 빠띳짜(pa
icca)가 조건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도 말한다.

조건법으로서의 연기법은 부처님이 발견하신 법이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칙이다. 부처가 출현했다는 것은 연기법을 발견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이 조건지어져 발생하는 법칙을 말한다. 이 조건법에 따르면 한순간에 두 개의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한순간의 마음에 두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찰나생찰나멸할 때 뒤이어 일어나는 마음이 앞의 마음을 알 때 앞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 사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알아차렸을 때 불쾌한 감정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더 이상 불쾌한 마음이 아니다. 알아차림만 있는 마음이 된다. 불선법에서 선법으로 극적인 전환이다. 싫어하는 마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닙비다, 위라가, 위뭇띠라고 했을 것이다. 염오, 이욕, 해탈이다.

해탈하려면 먼저 오취온적 존재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한다. 나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오취온적 존재로서 나를 싫어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를 싫어 하는 마음이 없으면 해탈하기 힘들다. 왜 그런가?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몸과 이 마음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갈애에 기인한다. 갈애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 생겨난 것이다. 결국 대상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괴로움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느낌, 감정, 생각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닙비다, 위라가, 위뭇띠라고 했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해탈에 이를 것이라도 했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면 대자유를 얻는다.

 

 

2021-01-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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