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네가 존재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6. 07:30

네가 존재하는 이유


매일 맞는 새벽이다. 가장 편한 자세로 이 새벽에 사유를 즐긴다. 마음을 내부로 향한다.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대상에 마음을 빼앗긴다. 보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다. 마음을 안으로 향했을 때 샘솟는 생각을 사유한다.

요즘 지난 글을 다운 받고 있다. 어제는 블로그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카테고리에서 다운 받았다. 2014년 부터 쓰기 시작한 짤막한 글이다. 시와 수필이라 볼 수 있다. 글을 보니 패턴이 비슷하다. 봄에 대한 글을 보면 사진도 비슷하고, 글도 비슷하고, 느낌도 비슷하다.

일년 중에 사월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꽃이 피고 연두색의 신록이 시작될 때 환희한다. 살 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기쁨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난 글도 대개 이런 식이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꽃은 피고 진다. 연두색이 녹색으로 바뀌면 점차 대지는 뜨거워진다. 찬바람이 불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다. 마침내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을 때 또다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매년 똑 같은 패턴의 글을 발견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이가 노년을 향해 가고 있다. 마음은 항상 청춘이지만 나이는 그렇지 않다.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만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거울을 보면 현실을 실감한다. 나는 잘 살아온 것일까?

삶에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방향이 없으면 방황하기 쉽다. 목표가 정초(定礎)되어 있지 않으면 흔들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삶은 만족스럽지 않다. 방향없이 산 것 같다. 살아 있으니 산다고 본 것이었다. 존재하니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았다. 감각으로 산 것이다.

감각으로 살면 나의 삶을 살 수 없다. 외부 대상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을 때 나의 삶이 아니다. 그만큼 시간을 빼앗긴 것이다. 수명이 단축된 것이다.


하루를 적거나 많거나
헛되이 보내지 말라. 하룻밤이라도 낭비한다면
그 만큼 그의 목숨이 줄어든다.”(Thag.451)


테라가타 게송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마음을 외부 대상에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감각에 살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내부로 돌렸을 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은 삶이 정초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헛되이 보낸다면 그 만큼 목숨이 줄어든다고 했다. 감각에 의존하는 삶을 살면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설령 백년을 살았다고 해도 감각적 욕망으로 평생을 보냈다면 자기인생이 아니다.


계행을 어기고 삼매가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0)

지혜가 없고 삼매가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1)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2)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


사회에서는 나이 많은 것이 계급인 것 같다. 먼저 태어난 자가 형이 되고 나중에 난 자가 아우가 되는 것이다. 이런 구분법은 누구나 비슷비슷했을 때 가능하다. 누군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나이로 계급이 정해지지 않는다. 정신적 연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들었다. 알을 낳은 순서는 있어도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라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고, 내것이고,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유신견을 말한다. 자아의 단단한 껍질이 깨졌을 때 무아가 된다. 자신과 세상을 가르는 경계가 무너졌을 때 자유인이 된다.

글을 쓰다 보면 검색이 이루어진다. 요즘에는 블로그 검색을 한다. 블로그에 써 놓은 글을 찾아 내는 것이다. 스마트폰에도 블로그 내 검색기능이 있어서 키워드만 입력하면 쉽게 찾아 낼 수 있다.

블로그 내 검색하는 것은 블로그에 참고할 만한 문구가 많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가 필요한 문구를 인용하고자 할 때 과거 써 놓은 글을 활용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찾는 것보다 내부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른 것이다. 이는 블로그에 자료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전을 근거로 한 글이 수천 개 있기 때문에 자기 글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블로그 내 검색기능을 종종 활용한다.

블로그 내 검색하다 보니 만족할 만한 글을 발견했다. 원담스님 글이다. 원담스님의 수행일기를 읽고서 감명받아 블로그에 저장해 놓았던 것이다. 오늘 쓴 글과 분위기가 맞을 것 같아 다시한번 공유해 본다.


너의 존재를 세우는 것은 백지위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하얀 백지는 淸淨無碍청정무애하지만 한 점이 찍힘으로 공간이 긴장하면서 뒤틀린다. 점을 중심으로 공간이 휘어지면서 중력이 발생한다. 점이란 존재는 하얀 공간에게 짐이 된다.

존재가 자기를 유지존속하면서 자기를 주장할 때 존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 존재를 떠받혀주고 살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는 주변에 의존하면서 존속을 꾀한다. 존재는 세계의 짐이요, 타자에 의존됨이요, 다른 것들의 희생을 먹고 존속, 유지된다.

나는 내 존재를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 내 존재가 주변에 의존하면서 타자의 희생을 먹고 존속하는 데 드는 비용이 내 존재가 타자에 봉사하고 세계의 행복에 기여하는 효과보다 더 많다고 느껴질 때 내 존재는 해체되어 사라져야 한다. 나는 세계의 짐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내 존재가 세상의 짐이 되는지, 세상에 선물이 되는지 순간 순간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당연한 듯이 먹고 마시며 생존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왜 지금 너는 세계에서 양분을 섭취하면서 너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가? 너는 지금 바로 죽지 않고, 꼭 살아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죽음은 쉽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고,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목숨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하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바칠 것이 목숨 밖에 없으니 내놓는 것뿐이다. 장미꽃은 붉기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치고, 빗방울은 비를 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고 떨어진다. 인간의 목숨이 장미 한 송이나 빗방울 보다 나을 게 뭐 있는가?

목숨이란 필요할 때까지 쓰다가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버리는 것이다. 언제까지 필요할까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 지혜에 달려있다. 자기 목숨이 버리기에는 아깝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목숨이 떨어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너는 그런 생명의 순환 가운데 한 티끌일 뿐이다.

네가 사라진다 해도 해와 달은 변함없이 돌고 꽃은 피고 바람은 불 것이니 너는 깨끗이 떠나라. 세상이 너를 기억해주지도 않을 것이며, 네가 왔다간 자취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긴다는 게 우스운 짓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

세상은 네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네가 있음으로 오히려 잘 안 돌아갈 런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유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새삼스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 애초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해줄까를 물을 뿐,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지 않는다. 내 존재는 세상의 짐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선물로 살기를 바랄 뿐이다.”

(
원담스님, 섭세일기 2017년 늦여름-2, 2017-08-29)

 


언제 읽어 보아도 새롭다. 그것은 아마도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원담스님은 글로서 만난 블로그친구이다. 블로그 글이 인연이 되어서 진주선원 불자들과 함께 인도도 다녀왔다.

글을 보면 수행결과가 녹아 있는 것 같다. 마치 해야 할 일을 다한 수행자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 글 제목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아마 네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붙이면 적당할 것 같다.

삶의 정초가 되어 있는 자는 오로지 한방향으로 갈 것이다. 감각에 한눈 파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삶의 방향이 설정된 자는 오로지 앞을 향해 갈 뿐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침내 자신이 구축한 한세계를 파괴했을 때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백년을 사나 하루를 사나 똑같은 것이다. 다만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이다.


밤과 낮은 지나가고
목숨은 다함이 있네.
작은 시내에 물이 마르듯
사람의 목숨은 다해 버리네.” (S4.9)

수행승들이여, 사람의 목숨은 짧다.
저 피안은 도달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여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오래 산다고 해도
백년이나 그 남짓일 것이다.” (S4.9)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고
삶에 대한 애착도 나에게 없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이 집적의 몸을 버려 버리리라.”(Thag.20)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2021-04-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