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연기법을 알면 백전백승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8. 09:07
연기법을 알면 백전백승

자극받아 글을 쓸 때가 있다. 에스엔에스에서 본 글로 인하여 자극 받았다. 그것은 교리에 대한 것이다. 교리에 대한 무지의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백히 보여 주는 글을 보았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것이다.

글쓴이가 스님인지 재가자인지 알 수 없다. 페이스북임에도 실명을 쓰지 않고 얼굴도 감추고 있다. 만일 그가 스님이라면 수치이고 재가자라면 무지한 것이다. 불교의 기본교리조차 모르는 한심한 글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하나라면 기독교나 불교의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아쇼카선언이라는 것이 있었다.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이명박 정부시절 불교계에서 추진했던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선언문을 보면 열린진리관이 있었다. 진리는 하나인데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결국 기독교나 불교나 추구하는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인데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 가는 길은 여럿이라는 등산의 비유로도 설명한다.

종교평화선언은 아후 어떻게 되었을까? 흔히 장로정권이라고 말하는 이명박 정부시절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야심차게 추진했던 종교평화선언은 좌절되었다. 그때 당시 종정이었던 법전스님이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쇼카선언은 왜 추진된 것일까? 그것은 그때 당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장로 이명박이 정권을 잡은 것과 관련이 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시절 이미 서울시를 자신의 신에게 바친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불교계에서는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온 것이 종교평화선언이라 보여진다.

종교평화선언은 엄밀히 말하면 불교항복선언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위세에 눌려 불교를 스스로 바치려 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열린진리관을 보면 그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는 하나인데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면 기독교와 불교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 것이 된다. 기독교와 불교가 같은 것이라면 불자들은 멀리 산중에 절에 다닐 것이 아니라 동네 교회로 향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하나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소원을 잘 들어 준다고 하지만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만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 종교평화선언이 선포 되었더라면 1700년 역사의 한국불교는 끝장났을 것이다. 이명박에게는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추진한 것일까? 도법스님이다. 자승 총무원장 시절 제2인자 역할을 했던 때 화쟁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조계종 화쟁위에서 아쇼카선언을 추진했었다. 그때 당시 이름 있는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이 동원 되었다. 심지어 목사도 화쟁위 멤버였다. 그결과 나온 것이 종교평화선언이었고 가장 큰 논란이 된 것은 열린진리관이었다.

종교평화선언에 저항했다. 블로그에 글을 수십개 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열린진리관은 불교를 이명박에게 팔아 먹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평호선언은 불교항복선언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때 당시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려고 한다.

힘 없는 자의 무기는 무엇일까? 입이다. 힘 없는 자는 입밖에 없다. 말로서 설득하고 말로서 호소해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서는 글로서 호소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편의 글을 써서 아쇼카선언의 부당함을 고발했다. 이학종 선생도 반대 했었다. 미디어붓다 대표기자 시절 좌담회 참석과 기고문 등울 통해서 실상을 알렸다. 허정스님도 교계 신문을 통해서 저항했다. 이런 노력이 있어서일까 도법스님 등이 야심차게 추진했었던 종교평화선언은 좌절되었다.

대체 화쟁위에서는 어떻게 열린진리관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더구나 불교학자들도 참여 했고 명망있는 스님들도 참여했다. 단언하건데 불교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교리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기법에 대한 무지이다.

늦게 불교에 입문했다. 사십대 중반인 2004년에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써 정식으로 불자가 된 것이다. 이전에는 정서적 불자였다. 입문하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초기불교에 관심 갖게 되었다. 당연히 교리에도 관심가졌다. 2011년 아쇼카선언에 저항 했을 때는 니까야를 보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에 심취해 있었을 때이다. 그때 연기법을 이해했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아쇼카선언이 나올 수 없다. 진리는 하나라는 열린진리관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바로 이 가르침이 영원주의라는 상견과 허무주의라는 단견을 격파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문장이 부처님 당시 외도 스승들의 주장을 논파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연기법의 발생과 소멸로 설명할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과거 출현 했던 부처님들도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연기법은 부처가 발명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면 정법시대가 된다. 그러나 정법시대는 오래 가지 않는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린다.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법이 오래 지속 되려면 부처님 원음이 전승 되어야 하고, 팔정도 수행이 있어야 하고, 팔정도 수행으로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정법시대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 그래서 지금을 정법시대라고 한다.

조건 발생하는 연기법을 알면 상견과 단견은 발 붙이지 못한다. 왜 그런가? 먼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고 했다. 여기서 '발생을 관찰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조건발생을 말한다. 십이연기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있고"라고 했을 때 '조건으로(paccaya)'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연하여"라는 말도 사용한다.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조건발생한다고 하여 조건법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ticca samuppada)라고 한다. 줄여서 조건법이 된다.

부처님은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설했다. 조건 발생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비존재'와 같은 단견은 있을 수 없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에서 파생된 정신도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는 격파된다. 왜냐하면 계속 조건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다. 짧은 한구절에 허무주의가 격파된 것이다. 영원주의는 어떻게 격파되었을까? 역시 짧은 한구절로 가볍게 제압되었다. 이는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소멸은 무엇을 말할까?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발생이 있으면 당연히 소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처님의 연기법은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소멸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조건발생한 것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 손뼉치는 소리가 좋은 예가 된다. 번개불도 그렇다.

쇠망치를 치면 순간적으로 불꽃이 튄다. 불꽃이 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불꽃이 사라지는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밤하늘의 불꽃놀이도 그렇다. 폭죽이 터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터지고 나면 사라질 뿐이다. 모든 법이 다 그렇다.

모든 법은 조건 발생하지만 사라질 때는 그냥 사라진다. 그래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했다. 여기서 존재는 아트만과 같은 자아를 말한다. 어느것도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 짧은 한구절로 영원주의가 격파되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우리 몸과 마음은 찰나생찰나멸한다. 찰나생찰나멸하는 오온에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신도 역시 찰나생찰나멸한다.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상속된다. 조건발생하여 상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연기의 구조를 알면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열린진리관은 연기법의 무지에 따른다. 스님이나 재가자나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진리는 하나이다. 표현만 다를 뿐이다.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말에 넘어 간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의 진리나 불교의 진리는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진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진리가 하나라면 다른 것은 거짓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부처님의 연기법을 보면 허무주의나 영원주의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외도 스승들의 사상을 연기법으로 모조리 격파했다. 연기법으로 사상통일을 한 것이다. 그것이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짤막하게 표현 되어 있다.

외도사상 격파에 대한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어쩌면 불교는 외도사상과의 전쟁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디가니까야 1번 경에는 외도의 62가지 사견이 소개 되어 있다. 이어지는 2번 경에서는 외도 스승의 사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런 방식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고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딧티상윳따'라고 하여 별도의 주제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도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삼종외도설 등을 다루고 있고, 우다나에서는 눈먼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외도를 비판하고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이해하면 불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불교인들은 대체로 연기법에 무지한 것 같다. 대표적으로 2011년 추진되었던 종교평화선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연기법의 무지는 결국 불교의 쇠락으로 이어진다. 연기법을 모르니 종교간 진리는 같은 것이라 하여 열린진리관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기법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 동시에 외도 사상에 대한 교육도 병행해야 한다.

외도 스승의 견해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외도 사상을 이해 하면 불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연기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도 사상을 연구해서 상대방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라고.

종교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자신의 종교를 먼저 알아야 한다. 자신도 모르고 전쟁에 임할 수 없다. 다음으로 상대방 종교를 알아야 한다. 상대방을 모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이렇게 나의 종교를 알고 상대방의 종교를 안다면 종교전쟁에서 백전백승할 것이다. 불교에 연기법이 있다. 연기법을 알면 백전백승 할 수 있다.

2021-04-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