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드리듯이 자신에게 공양(供養)을, 코19 자비의 식당순례 18편 수제돈가스
종종“공양하셨습니까?”라는 말을 듣는다. 밥 먹었느냐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밥 먹는 것을 공양(供養)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이 세상에서 어느 종교도 밥 먹는 것을 공양한다고 말하는 종교는 없는 것 같다. 밥 먹는 것도 불공(佛供)드리듯이 하는 것이다.
오늘 점심공양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혼밥이다. 보통 집에 가서 먹는 경우가 많지만 밖에서 먹어야 할 때는 한식당만 가지 않는다. 골고루 차별없이 가고자 한다. 코로나19시기에 식당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할까? 점심시간이 되어서 안양아트센터(구 안양문예회관) 방향으로 가 보았다. 역세권에서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아트센터가 있어서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다. 돈가스집이 눈에 띄었다. 수제돈가스라고 한다.
코로나 시기에 한번 간 집은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돈가스는 이전에도 먹어 보았다. 식당이 다르기 때문에 먹어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혼자 앉을 수 있는 식탁이 있다는 것이다. 창측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게 일자로 배려해 놓은 식탁을 말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전부 만원이상이다. 수제돈가스이기 때문일까 다른 집보다는 비싼 편이다. 그러나 팔아 주기 위해서 들어 갔다. 가격은 문제되지 않는다. 돈가스정식을 시켰다. 일인분에 10,500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지난 4월 말부터 시작하여 5월 초순까지 일감이 없어서 놀다시피 했다. 일감 수주 기념으로 만원이 넘어감에도 시켰다.
요즘 식당은 자동화되어 있다. 주문도 자동으로 받는 곳이 많다. 식탁 앞에 있는 단말기를 클릭하면 주문 된다. 롯데리아나 이마트에서도 무인주문기에 의해서 주문을 받는다.
작은 식당에서도 무인주문 시스템을 도입한 것을 보니 앞서 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젊은 사람들이 운영한다. 밥 먹으로 온 사람들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머리가 허였게 센 초로의 사람은 보기 드물다.
고독한 미식가가 된 듯하다. 유튜브에서 본 고독한 미식가는 늘 홀로 식사한다. 같은 장소에 가는 경우는 없다. 늘 새로운 곳을 찾아 다닌다. 일종의 식도락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나는 식도락가일까?
밥 먹을 때마다 새로운 식당을 찾는다면 식도락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있다. 코로나19시기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이다. 단골만 가지 말고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가야 한다. 가서 맛있게 먹고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를 자비의 식당순례라고 명명한 바 있다.
돈가스가 나왔다. 만원 이상 되는 고급음식이다. 맛은 어떨까?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소스를 찍어 먹으니 씹는 맛이 난다. 우동도 곁들여 나왔다. 이렇게 본다면 두 가지가 복합된 것이다. 맛과 서비스에 있어서 대체로 만족했다.
일상다반사라고 한다. 밥 먹는 것은 일상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루 세 끼 먹고 산다. 그러나 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부자는 열끼, 백끼를 먹어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질적으로 다른 음식을 먹는다. 그러다 보니 맛에 대한 탐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맛집을 찾아서 맛집순례를 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밥상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 얻어먹는 입장에서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공양이든지받아 주어야 한다. 공덕이 되는 공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맛에 탐착하는 수행자가 있다.
한번 맛보면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그 맛을 못잊어서 다시 찾게 된다. 맛집을 전전하는 것도 맛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맛을 이겨 내야 한다. 그래서인지 초기경전에는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이 도처에 실려 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맛있는 것이든 거친 것이든
적은 양이든 많은 양이건
탐욕을 여의고 미혹을 여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었다.”(Thag.923)
빠사리야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식사할 때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 먹지 말하는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어야 함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왜 이렇게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을까? 그것은 감관수호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혀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이나 귀의 수호 못지 않게 혀도 수호해야 한다.
수행자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먹는 것을 즐긴다면 그는 진정한 수행자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 수행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먹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하루 세 끼 다 찾아 먹을 뿐만 아니라 간식도 먹고 야식도 먹는다.
수행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배불리 양껏 먹으며 더구나 하루 세 끼 먹는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다. 음식절제가 되어 있지 않은 자를 어찌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에 분량을 아는 님은 비천하지 않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Thag.683)라고 했다.
미각의 노예가 되기 쉽다. 출가한 스님들도 미각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스님은 먹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이 세상에 먹는 재미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 갈까? 그래서 “거칠더라도 만족하고 다른 맛을 탐하지 말라. 맛들에 탐착한다면, 마음은 선정을 즐기지 못한다.”(Thag.580)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맛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맛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음식에 대한 혐오적 지각의 수행(āhāre paṭikkūla bhāvanā)’을 말한다.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이다.
음식혐오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고기를 보면 ‘아들고기’ 대하듯 하라고 했다. 사막을 횡단하던 부부가 먹을 것이 떨어져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죽은 아기의 고기를 먹은 것을 말한다. 또한 입에 들어가 씹히는 음식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맛 있는 음식도 한번 입에 들어가면 개밥그릇에 있는 개의 토사물과 같다는 것이다.
음식대하기를 아들고기처럼 보고 개밥처럼 보아야 한다. 최악은 토한 음식이다. 그래서 “토해져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고 했다. 토한 음식을 삼킬 수 없다. 수행자라면 음식보기를 토사물로 보아야 한다.
오늘 하루 잘 먹은 음식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또한 목숨을 부지해 준다. 무엇보다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해서 몸을 지탱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먹는 행위야말로 신성한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공양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마치 부처님 전에 불공드리듯이 자신에게 음식공양하는 것이다.
2021-05-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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