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교가 기독교에 밀리는 것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8. 09:32

불교가 기독교에 밀리는 것에 대하여

 

 

불교는 왜 기독교에 밀리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김정빈선생은 기독교의 복음주의로 보았다. 세속적인 것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출세간적인 것을 중시하는 불교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정빈선생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최근 김정빈선생의 유튜브 동영상을 몇 편 보았다. 유튜브에서 김정빈선생의 채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연속으로 본 것이다. 소설가로서 보기보다는 수행자로서 김정빈선생을 보고자 한 것이다.

 

김정빈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접한 바 있다. 1990년대 초반 함께 미얀마에 가서 수행한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1989년 거해스님으로부터 위빠사나를 배운 일단의 수행자들이 미얀마로 건너간 것이다.

 

수행자로서 김정빈선생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원고를 보지 않고서도 말이 술술 나올 정도이면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에는 힘이 실려 있다. 누구나 들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교가 기독교에 밀린 것에 대하여 기독교 복음주의로 설명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본다.

 

김정빈선생은 자신을 소개할 때 구도자라고 했다. 그리고 불제자라고 했다. 자신은 깨달은 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로서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말한 것은 자신의 견해일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말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점은 매우 솔직하고 정직하다.

 

니까야를 백프로 믿을 수 없다고

 

김정빈선생이 말한 몇 가지 중에 약간 이의가 제기될만한 사항도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백프로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니까야가 부처님의 친설인 것은 맞기는 하지만 일부는 후대 전승과정에서 삽입된 흔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부처님이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옆구리 출산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맛지마니까야 아쌀라야나의 경을 보면 어머니는 보살을 서서 출산하였다.”(M123.19)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경의 어디에도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니까야가 아닌 다른 경전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처님의 옆구리출산설은 사성계급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니까야 도처에서 브라만교의 사성계급을 비판하고 있다. 브라만교 사제들도 머리가 아닌 자궁으로 출산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빈선생이 한 말 중에서 깔라마의 경을 인용한 것이 있다. 부처님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의심해보라.”라는 식으로 말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부처님이 자신이 한말에 대하여 내 말도 틀릴 수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은 한마디로넌센스이다.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삼귀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깔라마의 경에서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A3.65)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나의 스승이라는 말은 외도의 스승을 지칭한다. 이를 부처님도 포함하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부처님이 자신이 말해 놓고 나의 말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실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깔라마의 경에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A3.65)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성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외도의 성전이다. 바라문교의 세 가지 베다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불경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넌센스이다. 부처님은 법귀의하라고 했는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불교가 기독교에 밀리는 것에 대하여

 

김정빈선생은 불교가 기독교에 밀리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의 복음주의로 보았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기독교의 복음주의를 도입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인과법으로 설명했다.

 

불교의 교리는 매우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는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다름 아닌 인과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법칙에 근거하여 가르침이 성립되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 가는 것처럼 정교하다. 이는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연기, 사성제, 팔정도의 가르침을 보면 체계적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열반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출세간적 것에 해당된다. 세간에서는 열반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복음주의를 채택한 것은 세속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과법을 무시한 가르침이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김정빈선생은 바이블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꼴찌가 첫째가 된다든가,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런 가르침은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출세간적인 부처님 가르침

 

불교가 기독교에 밀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정빈선생 지적대로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르침이 적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교는 출세간적 가르침 위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출세간적인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독백식으로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S6.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세간에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부처님은 출세간적 가르침을 펼쳤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어렵고 미묘한 진리”(S6.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임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탐욕으로 살 때 부처님은 무탐을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출세간적이다. 탐욕으로 사는 세상에 적용하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세간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니까야를 보면 기독교의 복음 보다 더욱 더 위대한 가르침이 많다.

 

부처님의 세간적 가르침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다. 십이연기, 사성제, 팔정도와 같은 근본 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빠일리니까야를 읽어 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뿐만 아니라 계율의 가르침도 있고, 자비실천의 가르침도 있고, 수행의 가르침도 있고, 평등의 가르침도 있고, 현실직시의 가르침도 있고, 우정의 가르침 등도 있어서 실로 다양한 가르침이 있다. 이는 출세간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세간적 가르침도 매우 풍부하다는 말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어느 것 하나 인과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인과를 무시하는 기독교의 복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을 설했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은 일종의 세간적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출세간적 가르침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번뇌가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업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그래서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와 같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저하게 인과법에 따른 것이다.

 

김정빈선생에 따르면 한국불교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복음주의를 채택하자고 했다. 타종교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반은 인과법이라는 확고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반은 인과법이 무시된 기독교의 복음주의와 같은 가르침을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이는 김정빈선생이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김정빈선생은 소설도 쓰고 있다. 이는 예술의 범주에 들어 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예술행위하는 것에 대하여 금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탈과 열반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고 문학을 한다는 것은 집착이 따르기 때문에 해탈에 방해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큰 줄기는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번뇌를 소멸하는 출세간적 가르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세간에서 번뇌의 삶을 살고 있다. 번뇌의 삶이란 다름 아닌 탐욕의 삶이다.

 

세간에서 탐욕 없이 살 수 없다. 돈을 버는 것도 탐욕이 개입된 것이고, 예술행위하는 것도 탐욕이 개입된 것이다. 불교가 출세간적 목적만 지향한다면 불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과의 법칙을 무시한 기독교 복음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기독교와 비교하여 현실에서 영향력은 비교 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등 봉사를 한 것은 복음주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과법을 무시한 것이다.

 

여기 장애인이 있다. 장애인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장애가 왜 생겼을까? 인과법을 강조하는 불교에서는 전생에 지은 업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니까야 도초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의 시련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장애인이 죽으면 가장 먼저 천국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는 인과법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에게는 기독교가 복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가 강세를 보이는 요인중의 하나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인과법이다. 인과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라고 해서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없다. 철저하게 행위에 따른다. 천상에 태어날 만한 선업공덕을 지었다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뿐나여, 어두운 행위에는 어두운 결과가 따릅니다. 뿐나여, 밝은 행위에는 밝은 결과가 따릅니다.”(M57.8)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업의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세간적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애를 닦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된다

 

부처님은 세간적인 가르침도 펼치셨다. 이는 업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업의 가르침을 적용한다고 해서 복음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과의 법칙에 근거하여 선업선과와 악업악과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을 펼치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혹독한 인과의 가르침만 말씀 하지 않으셨다. 세간에서 가혹한 인과의 법칙만 적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수호경이라고 볼 수 있는 멧따경(자애경)에서도 볼 수 있다.

 

자애경을 보면 삽베삿따 바완뚜 수킼땃따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Stn.147)라고 바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일체 세계에 대하여 높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적의없이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Stn.150)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자애에 대한 가르침은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른다. 그래서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바쳐 구하듯,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Stn.149)라고 발원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복음이 아닐까?

 

부처님도 복음을 설했다. 이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하느님도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에서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았다.”(A7.6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애를 닦은 수행자는 천상에 태어나 하느님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거기서 그는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였다.”(A7.6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애를 닦은 과보로 색계천상에 태어나 하느님(brahma)이 되었는데, 자애를 닦았기 때문에 자애의 하느님이 된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랑의 하느님이 된 것이다.

 

부처님은 자애를 닦으면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아닐까? 자애수행을 한 과보로 색계천상에서 겁단위의 수명을 가진 하느님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윤회해야 한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김정빈선생은 불교가 기독교에 밀리는 안타까운 마음에 기독교의 장점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것에 대하여 꼴찌가 첫째가 되고,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고, 장애인이 천국에 가는 등 인과법을 초월한 복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불교의 세간적 가르침에다 기독교의 복음주의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불교가 출세간만 강조했을 때 탐욕을 소멸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간적 삶을 탐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출세간적 삶이 맞지 않음을 말한다.

 

김정빈선생의 말도 타당하다. 그렇다고 하여 욕망을 바탕으로 하고 인과법을 무시한 복음주의를 도입했을 때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될까? 기독교 따라하기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만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부처님의 세간적, 출세간적 가르침 자체가 복음이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고 했다. 이러한 태도야 말로 가장 공정하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행하고, 가난하고, 장애가 있고, 소외된 자라고 해서 그들을 동정으로 본다면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먼저 천국에 보낸 다는 것은 인과법에도 어긋난다.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아무리 훌륭해도 욕망에 기반하고 인과법을 무시하는 것이라면 성립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복음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부터 다른 종교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좋다 고하여 도입한다면 이는 불교의 정체성 상실과 같다.

 

불교에는 불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이 출세간적인 것이든, 세간적인 것이든 합리에 바탕을 둔다.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관계와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는 연기법은 본질을 중시하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그래서 원한 맺힌 자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내고, 불행하고 가난에 처한 자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내야한다.

 

우리는 윤회하는 중생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면 우리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S15.11)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자애의 마음을 닦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욕망으로 살며 인과법을 무시하는 기독교의 복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복음이다.

 

 

2021-06-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