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中傷)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10. 11:08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中傷)도

 

 

세상에서 가장 소모적인 논쟁은 아마 종교간 논쟁일 것이다. 종교논쟁은 정치논쟁 못지않다. 정치논쟁하는 사람을 보면 다른나라 사람들처럼 보인다. 종교논쟁은 더 심하다. 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모임에서 피해야 할 화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정치와 종교에 대한 것이다. 최소한 세 명 이상 모임에서 정치와 종교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편이 다른 편을 비난했을 때 분위기는 썰렁해진다. 정치와 종교논쟁으로 인하여 상처받았다면 밥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최근 B법우로터 하소연을 들었다. 어떤 불자에게 테라와다불교를 비난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한 불교로서 대승불교와 티벳불교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B법우는 대승불교와 티벳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테라와다불교를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마치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개탄했다.

 

종교간의 갈등이라 하여 반드시 타종교간의 갈등만을 말하지 않는다. 같은 종교내에서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은 타종교간의 갈등보다도 더 치열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초기불교를 좋아한다.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니까야 읽기를 좋아하고,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대승에서 시작했지만 몇 년 가지 않아 자연스럽게 갈아탄 이유에 해당된다.

 

대승에서 초기불교, 즉 테라와다불교로 갈아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모두 초기불교 경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까야에 실려 있는 말씀이야말로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믿게 되었다.

 

니까야에 대하여 부처님 친설이라고 말하면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테라와다와 반대편에 서 있는 불교인들 중에 일부가 그렇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레파토리가 있는 것 같다. 늘 듣는 말은 니까야가 부처님의 친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대 문자로 기록되면서 삽입되고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해보지 않은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수행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수행을 비난한다. 니까야도 다르지 않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비난한다. 해보지도 않고 비난만 일삼았을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난하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우호적이 되기도 하고 적대적이 되기도 하다. H선생이 불교평론에 발표한 위빠사나는 초기불교 수행법인가라는 제목의 글도 그렇다.

 

H선생의 글은 오래 전에 읽어 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쓴 것이라고 보여진다. 자신에게 놓여 진 자리가 어떤 자리이냐에 따라 글의 성격도 달라진다. H선생은 다만 확실한 것은 위빠사나만이 초기불교의 명상은 아니라는 점이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했다. 미얀마발 위빠사나명상수행법은 근대 이후 것이며 미얀마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H선생이 현재 처한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K선생의 신대승론

 

요즘 K선생의 유튜브를 보고 있다. K선생은 80년대 어느 도인에 대한 소설을 써서 유명해졌다. 소설가로서 K선생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K선생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유튜브를 보면 볼수록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K선생은 1989년 남산에 있는 대원정사에서 거해스님으로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처음으로 배웠다고 한다. 거해스님으로부터 배우고 난 다음 1993년에 미얀마로 떠났다고 한다. 

 

K선생은 스스로 위빠사나 1세대라고 했다. 그만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K선생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대승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래서 현시대에 맞는 불교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신대승이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 복음주의를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K선생에 따르면 대승운동은 기독교복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복음에 비하면 반정도만 완성된 것이라고 했다. 나머지 반은 자신이 완성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용수의 중론을 기반으로 한 중도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K선생은 초기불교를 비판한다.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완성된 것 또는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반쯤 완성된 중도에 의한 복음을 추가하고 여기에다 예술과 과학까지 접목하여 현시대에 맞는 불교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K선생은 자신이 추구하는 신대승을 위하여 이전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 것을 비판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론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고 심지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완성된 것이라는 구업을 짓고 있다.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을 때

 

그 사람을 알려면 그가 처한 위치를 보면 된다. 그가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그가 대승불교에 있다면 초기불교는 소승불교가 되고 부파불교가 된다. 그리고 니까야는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후대 편집 내지 조작되었다고 의심하게 된다. 이는 초기불교 입장에서 선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승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 대승경전은 창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L교수가 있다. 그는 중론에 바탕을 두어 니까야를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빠알리 논장을 부정한다. 특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부정한다. 왜 그럴까? 중론에 바탕을 둔 자신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장과 주석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어야 알아주는 것 같다. 경전에 근거해서 말하면 덜 떨어진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테라와다불교와 정반대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철저하게 니까야에 근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누가 말하든지 내용은 같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는 경전을 근거로 말하기 보다는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견해를 말했을 때 다른 견해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니까야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심지어 부정하기도 한다. 신통이나 초월적인 이야기는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현대과학의 성과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가르침은 배제한다. 이런 이유로 신통이나 초월적인 이야기를 배제하는지 모른다. 심지어 윤회도 믿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신통, 초월적 이야기, 내생, 윤회이야기로 가득한 니까야를 믿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주변을 보고자 한다. 자신의 이익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승의 입장에 있다면 테라와다불교는 인정되지 않고, 테라와다불교의 입장에 있다면 대승불교는 인정되지 않는다. 티벳불교의 입장이라면 대승불교와 테라와다불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입장인가?

 

경전에 매몰된 사람

 

최근 최진석 선생의 책 나홀로 읽는 도덕경을 다 읽었다. 원문 부분은 빼고 해설부분은 다 읽은 것이다. 책에서 마치 나에게 말하는 것 같은 내용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경전에 매몰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경전을 숭배해서 그 경전을 근거로 스스로 권력화되는 거에요. 그래서 자신이 숭배하는 그 경전으로 세상을 재단하려 하죠. 이것 자체가 대단히 폭력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나홀로 읽는 도덕경, 164)

 

 

가장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대목이 있다. 혹시 내가 이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빠알리니까야를 근거로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니까야에 너무 매몰되어서 니까야 외에는 책으로도 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최진석선생은 이념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종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 빠지면 모두 적으로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불자들과 평화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한번만 읽은 사람은 불자들을 쉽게 적대시합니다.”(130)라고 했다. 기독교만 그럴까? 불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과도 잘 지내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적대시합니다.”(130)라고 했다.

 

매일 니까야를 근거로 글을 쓰고 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1-2년도 아니다. 10년도 넘었다. 그동안 축적된 글만 해도 수천개 된다.

 

니까야를 다 읽어 본 것은 아니다. 한수레나 되고 책장 가득 되는 니까야는 평생 보아도 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그럼에도 자주 보는 경이 있다. 그런 경우 노랑형광메모리펜칠이 되어 있다. 10년 이상 매일 보다 보니 이제 손때가 묻었고, 어떤 경전은 너덜너덜해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한번만 본 것은 아니다. 나는 경전에 매몰된 사람일까?

 

사디스트적 가학을 즐기는 자들

 

종종 종교 논쟁하는 경우가 있다. 타종교와 논쟁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불교내에서 논쟁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치열하다 못해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 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고자 한다. 그렇다고 상대방은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신념은 더욱 더 확고해지는 것 같다. 종교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 같다.

 

종교이데올로기이건 정치이데올로기이건 이데올로기에 빠지면 결과가 좋지 않다. 이에 대하여 최진석 선생은 책에서 가치론으로 빠지면 특정한 이념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죠. 기준은 구분합니다. 구분하면 배제하고 억압하는 일이 일어나고요. 그러면 사회는 분열되고 갈등속으로 빠지죠.”(75)라고 말했다.

 

페이스북을 보면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진영논리에 빠진 사람이 그렇다. 그는 하나의 타겟을 정한다. 하나의 괴물을 상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괴물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는다. 심하면 욕설까지 한다. 마치 분노를 즐기는 것과 같다. 분노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오로지 진영논리에 빠져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을 때 사악한 것이다. 마치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사디스트(Sadist)적 가학이다. 그러나 분노에는 독이 따른다. 그래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는 꿀이 있는 분노”(S1.71)라고 했다.

 

흔히 탐, , 치를 삼독이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탐, , 치의 뿌리가 있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노를 때로 즐긴다는 것이다. 분노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다른 진영의 사람에게는 분노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치 사디스트처럼 가학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냄의 뿌리에서 독이 나온다. 그 독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 독으로 인하여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나까야를 인생의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접해 보지 못했다. 접했다고 하더라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전을 백번 읽으면 남의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 자세를 갖는다는 말에 위안을 삼는다.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中傷)

 

불교에서 가장 고층경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숫따니빠따에 논쟁과 관련된 가르침이 있다. 어느 질문자가 부처님에게 투쟁과 논쟁은 어디서 일어나는 물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 것인지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좋아하는 대상에서 일어난다고 말하고서는 투쟁과 논쟁에는 인색이 따르고,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이 따릅니다.”(Stn.863)라고 했다. 논쟁을 하면 욕설이 난무하고 중상모략이 생겨남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경이로운 것으로 가득하다. 모두 합리적 가르침이다. 니까야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면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도 여러 번 읽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견해를 가지고 다투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남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고 야비하며 지혜가 뒤떨어지게 됩니다.

모두 이러한 견해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어리석고 지혜가 뒤떨어진 것입니다.”(Stn.879)

 

그러나 만약 자기의 견해로 인해 깨끗해지고,

완전히 청정한 지혜를 가진 자,

현명한 자, 슬기로운 자가 된다면,

그들의 견해는 그처럼 똑같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결코 지혜가 뒤떨어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Stn.880)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까닭에,

나는 그것을 두고 ‘이것은 진리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견해를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어리석은 자라고 취급하는 것입니다.(Stn.881)

 

 

부처님 가르침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긴다. 나의 의견이 소중하면 남의 의견도 소중한 것이다. 당연히 나의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자신만의 견해를 고집했을 때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현명한 자는 자신의 견해만을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는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독단에 입각해서 자신을 평가한다면, 다시 그는 세상에서 논쟁하게 됩니다.”(Stn.894)라고 했다.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中傷)도 생겨난다.

 

분노를 죽여야

 

사람들은 다양한 견해와 다양한 신념과 다양한 취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정치와종교에 대해서 논쟁한다. 그래서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M72.3, Ud.66, D9.49)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논쟁이 심하면 욕설을 하고 중상모략을 한다. 최종적으로는 폭력적으로 된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한 이념이나 종교에 빠지면 기준을 정하고, 구분하게 되고, 배제하게 되고, 억압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폭력이 발생한다. 그래서 최진석선생은 이념의 노예가 되는 현상에 대하여기준-구분-배제-억압-폭력”(89)의 순으로 전개된다고 했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 이념의 노예에 빠진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가학을 즐기는 것 같다.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 맞은 자를 때리는 식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다.

 

이데올로기에 매몰되면 폭력이 된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기준을 정하고, 구분하고, 배제하는 현상을 논문에서도 볼 수 있고, 법문에서도 들을 수 있고,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혹시 나도 이념과 종교에 지나치게 매몰된 것은 아닐까?

 

 

분노를 끊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사람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S1.71)

 

 

2021-06-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