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불재에서 5.18묘역까지는 40여분 걸렸다. 빗줄기는 거셌다. 7월 3일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들어 맞았다. 이날 7월 2일은 하루종일 비가 왔다.
비를 뚫고 묘역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광주에 온 이상 들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 때문이다. 이는 올해 들어 책 몇 권 읽은 것에 크게 영향받았다.
5.18과 관련된 책 세 권을 읽었다. 소설로는 ‘광주 아리랑’ 1권과 2권을 읽었다. 정찬주 작가가 보내 준 것이다. 밑줄 치며 정독했다. 그리고 독후기를 여러편 작성했다. 다음으로 ‘녹두서점의 오월’을 읽었다. 김상윤 선생이 보내 준 것이다. 저자는 세 명이다. 김싱윤 선생과 처 정현애 선생, 그리고 동생 김상집 선생이 쓴 것이다. 한 서점을 중심으로하여 세 사람 눈에서 본 광주에 대한 글이다. 마지막으로 ‘윤상원 평전’이다. 이계표 선생이 보내 준 것이다. 저자는 김상집 선생이다. 시민군으로 활동한 바 있는 김상집 선생이 윤싱원 열사의 행적을 추적해 가며 쓴 글이다.
세 권의 책에 대해 모두 독후기를 남겼다. 독후기를 쓰다 보면 인용을 하게 된다. 정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밑줄 치며 읽는 이유가 된다. 재미 있다고 하여 하루 밤 만에 다 읽어 버리면 남는 것이 없다. 독후기를 쓰다 보면 두 번, 세 번 읽는 것이 된다.
나는 왜 이렇게 광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한홍구 선생의 근현대사에 대한 유튜브를 본 것이 영향이 크다. 5.18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대단히 감명받았다. 특히 마지막날 도청에서의 결사항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듣고 5.18은 위대한 민중혁명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한홍구 선생의 음성을 녹취해서 후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광주시민은 위대했다. 누군가 “광주시민은 정의로웠다.”라거나, “광주시민들은 용감했다.”라고 말 할 수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광주시민이 위대한 이유는 한마디로 보살정신에 있다고 본다. 특히 마지막날 도청에서의 결사항전은 보살정신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비 오는 날 5.18묘역에 도착했다. 비가 세 차게 내려서 인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넓은 대지에 잘 가꾸어 진 묘역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서 안내를 받았다. 중년을 지나 노년에 가까운 여자 안내자가 나왔다. 혹시 찾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정황을 알려 주면 된다고 했다. 아마도 사연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과 기록서를 읽고서 관련 인물을 참배하러 왔다고 말했다.
누구를 참배해야 할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김동수 열사였다. 작년과 재작년 대불련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가해서 참배한 바 있다. 올해의 경우 코로나로 인하여 행사가 축소되어 전세버스가 출발하지 못해서 참배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생각난 사람은 소설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박병규 열사이다. 동국대 1학년이었을 때 휴교로 인하여 광주 집에 왔었는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시민군이 되어서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다음으로 윤상원 열사의 묘를 찾고자 했다. 윤상원 열사 역시 도청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참배하고자 하는 묘역이 공통적으로 도청에서 죽은 자들 위주가 되었다.
5.18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상식적 수준에서 알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러나 5.18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눈이 생겼다. 그것은 5.18의 역사성에 대한 것이다. 한홍구 선생의 유튜브 강의가 결정적이다. 이후는 확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광주시민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날에 있었다고 본다. 도청에서의 결사항전이 없었다면 광주도 없었다고 본다. 그저 한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격하되었을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폭도로 몰렸을 것이다. 광주시민을 구해 낸 것은 도청에서 마지막 결전의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있게 한 것은 도청에서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중에 인적 없는 묘역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단체 참배와는 다른 맛이다. 여유를 가지고 이곳저곳 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것은 ‘아아 光州여!’라는 시가 있는 벽면이다. 이 시는 잘 알려져 있다. 김준태 시인이 80년 6월 2일 아침에 쓴 것이다.
시가 새겨 있는 벽면에는 빗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흐느끼며 통곡하는 듯한 시에 눈물 흘리듯이 빗물이 흘러내린 것이다. 시에서 일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찢겨진 산하를 구비쳐 넘어가는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아마도 시인은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다. 시에서는 하느님, 십자가, 부활이라는 말이 나온다. 시의 말미에는 “몇 백 번을 죽고도 몇 백 번을 부활하는”이라는 문구도 있다. 이 시를 보고서 불교의 보살사상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는다. 이번 생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음을 믿는다. 죽어서도 다음 생이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업이 남아 있는 한 끊임없이 생을 반복한다. 이를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중에서 깨달은 중생이 있다. 이를 보디삿뜨바, 한역으로 보리살타라고 한다. 줄여서 보살이다. 요즘은 절에 다니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지만 보살은 위대한 원력을 가진 자를 뜻한다. 어떤 원력인가? 입보리행론에 실려 있는 산티데바의 게송이 잘 말해준다.
“이 세상이 남아있고
중생들이 남아 있는 한,
저도 계속남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몰아내게 하옵소서!”
샨티데바의 게송을 보면 중생구제 의지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대승보살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게송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지옥문이 닫힐 때까지 한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 서원과도 같다. 보살은 커다란 원력을 가진 위대한 영웅을 말한다.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은 별이 되었다. 기독교식으로는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되었고, 불교식으로는 보살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두 부활했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새로 태어난 것이다. 기억하고 추모하는 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5.18묘역에서 색다른 것을 보았다. 그것은 묘비 옆에 있는 동판에 대한 것이다. 제목을 보니 ‘27일 새벽, 도청의 최후를 지킨 15인의 전사들’이라고 되어 있다. 도청에서 마지막 날 결사항전 하다 죽은 15명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15인의 묘역에 특별히 부착되어 있다. 이것이 다른 묘역과는 차별이 된다.
15인의 전사들은 누구일까? 김동수 열사도 있고 윤상원 열사도 보인다. 고교생도 있고 재수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다. 대학생 중에는 소설 ‘광주 아리랑’에서 보았던 박병규 열사도 보인다. 마지막 날에 도청에서 결사항전하다 죽은 자들이다. 십자가를 스스로 진 자들이고 스스로 보살이 된 자들이다.
동판 취지문을 보았다. 취지문 중에 “그리고 40년도 더 지나”라는 문구 눈에 띈다. 아마 올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작년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 김동수 열사 40주년 추모제에 대한 후기를 남겼다. 블로그에서 찾아보았는데 15인 동판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 만든 것이 틀림없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가정해 본다. 그때 그당시에 도청을 사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홍구 선생 말대로 87년 6.10 항쟁도 없었고, 2016년 광화문 촛불항쟁도 없었을 것이다. 도청을 사수했기에 되찾아 올 수 있었다. 도청을 순순히 내주었더라면 되찾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빼앗긴 것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날 도청에서 결사항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스님들이 있다. 스님들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엄밀히 말하면 부처님 유산으로 먹고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감히 광주시민이 남긴 유산으로 먹고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날 도청에서 결사항전한 자들의 정신으로 먹고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광주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 주었다. 이는 도청에서 결사항전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도청이라는 건물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뻔히 죽을 줄 알고 들어간 것은 먼저 죽은 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의에 맞서서 정의에 숭고한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청에서 결사항전한 시민군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와 대동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과실을 따 먹을 수 있는 것도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대동세상은 멀었다. 민주주의와 대동세상이 완성되는 날,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세상이 아닐까?
모든 것이 무상하다. 사람들의 생각도 무상하다. 지금 5.18이 이렇게 위대한 민중혁명으로서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언제 바뀔지 모른다. 왜 그런가? 현재가 바뀌면 과거의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해 내야 하는 이유가 된다.
2021-07-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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