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남아 있는 한
의식할 때 실아 있음을 알게 된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환될 때 비로서 내가 여기에 있게 됨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깨었을 때 비로소 바로 지금 여기에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내가 나임을 의식하지 못할 때 나라고 볼 수 있을까? 동물이나 어린 아기에게는 내가 없다. 먹고 배설하는 생리적 작용만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도 있을 것이다. 육체적 고통은 있을지 언정 정신적 괴로움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동물이나 아기에게는 고통은 있지만 번뇌는 없다. 자극하면 아픔을 느끼지만 정신적 고뇌로 연결되지 않는다. 자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자아를 의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언어적 개념이 있음을 말한다. 나라는 개념이 확립되었을 때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여기서 이것은 오온을 말한다.
오온을 나의 것으로 여겼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괴로움이 발생하고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것이다.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것이다.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고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오온을 나의 것으로 보는 것은 갈애 때문이다. 오온을 나로 여기는 것은 자만에 기인한다. 오온을 나의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유신견에 의한 것이다. 공통적으로 ‘내가 있다’라는 유신견(有身見)에 기반한다.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보는 유신견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동물이나 아기가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오온에 대해 집착하기 때문에 괴롭다.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난다.
얼굴에 여드름이 났다면 이로 인해 걱정이 생겨난다. 얼굴을 나의 것이라고 보아 나의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얼굴이 생명이다. 얼굴 하나 밖에 내 세울 것이 없는 사람은 얼굴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얼굴관리에 힘쓴다.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는 것도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굴 하나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얼굴이 삶의 전체와 같다. 그런 사람에게 얼굴에 뾰로지라도 났다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하게 여기는 사람에게서 번뇌가 일어난다.
얼굴에 검버섯이 있다. 일종의 얼굴 곰팡이 같은 것이다. 까끌까끌한 것이 마치 암덩어리 같다. 왜 나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는 것일까? 노화되어서 그런 것일까? 거울을 보면 몹시 신경 쓰인다. 피부과에 가서 치료를 받아 보고 싶다. TV에서 보는 배우의 얼굴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얼굴을 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난다.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몸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뼈가 가늘다. 그러다 보니 살이 없다. 옷을 입어도 볼 품이 없다. 어느 정도 살이 있어야 옷도 맞고 보기에도 좋다.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다 보니 보잘것 없어 보인다. 노출의 계절인 여름만 되면 외출이 꺼려질 정도이다. 신체를 나의 것이라고 보는 유신견 때문이다.
에스엔에스에서 자신의 얼굴을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북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얼굴을 숨긴다. 프로필은 예외이다. 페이스북 정책이기 때문에 실명과 얼굴은 공개해야 한다. 그럼에도 종종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셀카로 찍은 것이다. 대개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얼굴에 자신 있어서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만족에 해당된다.
매일 거울을 본다. 볼 때 마다 마음에 들어 한다. 스스로 ‘이 만하면 됐다’라는 안도감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주 보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생긴 이래 늘 보아 오던 얼굴이다. 나이 들어 쭈글쭈글 해졌지만 그래도 안심하는 것은 나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얼굴과 신체를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한 번뇌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얼굴에 여드름, 뾰로지, 검버섯이 나면 신경 쓰인다.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마음도 영향받는다. 색이 이럴 진데 하물며 수, 상, 행, 식은 어떠할까?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이는 느낌(受)과 지각(想)이 관련 있다. 호감 갖는 것은 즐거운 느낌과 함께 하나의 상(想: saññ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 준 사람에게는 좋은 이미지가 있다. 반면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이름을 보는 순간 불쾌하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는 느낌과 지각에 따른 것이다. 느낌과 지각을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느낌과 지각만 그런 것일까? 탐, 진, 치와 같은 불선법과 무탐, 무진, 무치와 같은 선법도 나의 것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변덕이 죽 끓듯 하다.
어떻게 해야 유신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아야 한다. 갈애와 자만과 자아 때문에 유신견이 생겨난다. 자신의 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유신견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들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난다. 동시에 번뇌도 일어난다. 나는 유신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있는 한 유신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않는 한 유신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1)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려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1)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2)매사의 의심(vicikicca), 3)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 (sīlabbata)을 말한다. 이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개체가 있다는 견해, 즉 유신견을 타파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려면 가장 먼저 유신견을 부수어야 한다.
게송에서 네 가지 악한운명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를 말한다.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라한을 살해하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고,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을 말한다.
유신견을 부순 사람은 자아를 부순 사람이다. 의식하며 분별하고 살고 있지만 몸과 마음에 대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대해진다.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한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로 알 수 있다. 사람에 대해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대한 다면 지혜 있는 사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유신견을 부수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야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사람에 따라 쾌불쾌가 일어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가 남아 있는 한.
2021-07-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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