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숲속 저수지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28. 11:33

숲속 저수지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법구경 60번 게송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왜 윤회는 아득할까? 주석을 참고하지 않으면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지혜로운 자에게 윤회는 없다. 있어도 몇 생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가 있다. 어리석은 자는 윤회하는 줄도 모르고 산다. 태어나 보니 강아지일수도 있고 돼지새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가 아득한 것은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석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유익한 것을 모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없고, 윤회를 끝내는 서른일곱 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길을 모른다.”(DhpA.II.12)라고 했다.

누구나 인생길을 가고 있다. 누구는 고단하고 험난한 길을 간다. 또 누군가는 탄탄대로의 길을 간다. 어느 길을 가든 죽음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설령 그가 죽음은 죽음으로서 끝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 생각일 뿐이다. 엄연히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는 다음 생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한 윤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생에서 최대한 즐기며 살다 가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유물론적 사고방식이다. 옛날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매일 인생길을 가고 있다. 오늘도 인생길을 간다. 오늘은 서울대공원에 갔다. 동물원 둘레길을 가 보고자 한 것이다. 마치 인생길 가듯이 꼭대기 저수지까지 가 보고자 했다.

날씨가 뜨겁다. 한여름 이른 오후 시간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강행한 것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늘이다. 아름들이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땡볕도 문제없다.

무엇이든지 무상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둘레길은 정문을 통해서 가야 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무료 개방되었다. 그대신 동물원에서 둘레길로는 진입할 수 없다. 왜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

 


과천 서울대공원 출입한지 20년이 넘었다. 사시사철 찾는 곳이다. 서울대공원을 훤히 알고 있다. 둘레길을 무료 개방한 것은 노인들 때문으로 본다.

노인들은 동물원 무료 입장이다. 65세만 되면 프리패스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물원이 노인천국이 되었다.

노인들은 주로 둘레길을 이용한다. 둘레길을 무료 개방해 놓았으니 동물원에 들어갈 일이 없다. 동물원에는 자연스럽게 젊은 사람들과 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서울대공원가면 동물원 둘레길을 간다. 산책하기에 딱 좋다. 무료 개방 되었으니 나이 든 사람들이 이용한다. 둘레길 한바퀴 도는데 4.5키로미터로 1시간 반 걸린다.

둘레길을 걸었다. 나무가 하늘을 가려서 덥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숲 길을 걸으면 상쾌하다. 목적지는 저수지이다.

동물원 끝자락에 저수지가 있다. 예전에는 '조절저수지'라고 했다. 임시로 지은 이름처럼 보인다. 요즘에는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대공원 숲속 저수지'라고 한다.

 


길을 가는데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목적지가 없다면 정처 없는 길이 될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나왔는데 목적지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동차를 타면 네비게이션을 켜는데 이는 목적지가 있음을 말한다.

동물원 둘레길 목적지는 저수지이다. 마치 산에 가면 절로 향하는 것과 같다. 둘레길을 가면 최종 목적지는 저수지가 된다.

 

저수지는 볼 만하다. 마치 천지 같은 느낌이다. 마치 숨겨진 비경 같다. 대공원 찾는 사람들이 저수지까지 와 본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대공원을 오래 다녀 본 사람들은 안다. 산에 가면 절로 향하듯이, 동물원 둘레길 가면 저수지로 향한다.

 


저수지를 보면 궁극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가고 물에는 진초록의 산이 비친다. 때묻지 않은 자연을 보면 마음도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 같다. 마치 나그네가 열반의 평원에 이른 듯하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S22.84)

풍요로운 평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커다란 우거진 숲이란 무명을 말하는 것이다. 커다란 깊은 늪지대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험준한 절벽이란 분노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평원이란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S22.8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왼길을 버리고 바른 길로 가라고 했다. 팔사도를 버리고 팔정도길로 가야함을 말한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때로 험난한 길도 가야 한다. 우거진 숲, 늪지대, 절벽도 있다. 무명, 감각적 쾌락의 욕망, 분노와 절망을 상징한다.

인생길에서도 우거진 숲, 늪지대, 절벽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무명단계에서 머물 수 있고,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다 끝날 수 있다. 분노와 절망으로 평생 보낼 수 있다.

도중에 그만 둘 수 없다. 온갖 난관을 뚫고 한단계한단계 올라 섰을 때 마침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경에서는 풍요로운 평원이라고 했다. 열반을 평원으로 비유한 것이다.

 


숲속 저수지에 이르렀다. 비록 짧은 거리이긴 하지만 둘레길 걸은 보람을 느낀다. 저수지가 열반처럼 보인다. 인생길도 이렇게 쉬웠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노년에 이르렀을 때 슬픔만 남는다. 그러나 가르침을 아는 자에게 열반은 가까이 있다. 풍요로운 평원 같은 곳이다. 숲속 저수지 같은 곳이다.

천상을 말하지만 천상보다 열반이다. 천상의 존재는 윤회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하는 한 어느 세계에 떨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이만한 구원의 메세지가 있을까?

2021-06-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