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동시에 근심과 걱정도
역사는 반복되는가? 아들이 주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약간 배신감을 느꼈다. 소액이라고 하지만 주식은 탐욕이고 투기에 해당된다.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임을 강력히 말 했음에도 먹혀 들어 가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에는 소액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기 마련이다. 소액으로 주식투자 하지만 나중에 거액투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빚을 내서 한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몰빵해 보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며 몰빵해 보지만 통장잔고만 줄어들 뿐이다. 가진 것을 모두 털어먹었을 때 그제서야 자리를 뜰 것이다. 남는 것은 허탈감에 따른 정신적 공허함뿐이다.
주식을 그만 둔지 15년 되었다. 2006년까지 주식을 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했다. 재미삼아 마치 오락하듯이 200-300만원으로 시작한 것이다.
주식은 탐욕의 산물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열 배가 되는 금액을 하게 되었다. 홈트레이딩 시스템 프로그램을 깔아 놓고 단타매매한 것이다. 점점 대담해져서 빚을 내서 초단타매매 하게 되었다.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마치 목숨을 걸듯이 주식에 올인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주식을 떠나게 된 것은 통장잔고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주식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노름판에서 판돈이 없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1999년 부터 2006년까지 7년 동안 탐욕의 시기를 살았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주식을 했다. 업무용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아 놓고 몰래 하기도 했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을 미치게 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탐욕이다.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주식놀음에 해가 지는 줄 몰랐다. 일확천금이라는 허황된 욕심 때문이다. 머리 속에는 온통 주식에 대한 것뿐이었다. 차트에 일희일비 했다. 그날 날씨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주가에 따라 희비가 교차되었다.
비트코인에 올인 하는 젊은 사람들
유튜브에서 비트코인과 관련된 영상을 보았다.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팬데믹 머니’를 말한다. 평균 연령 31세 젊은이 몇 명이 방에서 전업투자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전에는 주식에 올인 했었는데 시대가 바뀌어서일까 비트코인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젊은 투기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놀랍다. 하루에도 몇 억을 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최대 100억을 벌었다는 말을 했다. 물론 위험도 크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에 올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상적 삶이 아니다. 24시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시켜 먹고 책상 옆에서 쪽잠을 잔다. 큰 것 한방을 노리며 골방에서 모니터만 바라 보는 삶이다.
그들의 정신상태는 어떠할까? 아마 정신이 황폐화되어 있을 것이다. 오로지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삶을 살았을 때 정서는 매말라 가고 탐욕만 남아서 충동적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작년 코로나 공포가 밀려왔을 때
작년 코로나 공포가 밀려 왔을 때 주식시장은 곤두박질 쳤다. 주가지수 2천이 무너졌을 때 절호의 찬스라고 보았다. 주식에서 손 뗀지 오래 되었지만 감각은 남아 있었다.
여유 돈을 삼성전자에 투자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은행에 넣어 두는 것보다 몇 배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했다. 이제까지 지켜 왔던 원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더구나 마음공부하고 수행한다는 불자가 아닌가? 또한 인터넷에 글을 쓰는 블로거이기도 하다.
주식을 그만 둔 것은 통장잔고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이후 주식과 손절했다. 주식근처에도 가지 않은 삶을 살게 된 계기는 불교적 삶을 살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 계기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다.
매일매일 의무적으로 글쓰기를 하다보니 점점 탐욕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세월을 10년 이상 지속하다 보니 주식이나 부동산 등 불로소득을 야기하는 투기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고 더 나아가 죄악시하게 되었다.
탐욕이 왜 죄악일까? 어떤 이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배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욕망이 생기면 욕망을 발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논리리면 성냄에도 적용할 수 있다.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함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동물적 삶이다. 감정대로 사는 것이고 본능대로 사는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삶이다.
불교에서는 탐욕과 성냄을 죄악으로 본다. 이는 천수경 십악참회 게송에서 ‘탐애중죄금일참회’와 ‘진애중죄금일참회’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도 탐욕과 성냄은 십대 죄악에 해당된다. 십악행에서 살생, 도둑질, 거짓말 등과 함께 탐욕과 성냄은 동급의 죄악이 된다.
소유와 동시에 근심과 걱정도
어느 날 바라문 장자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장자는 “세존이신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어떠한 뭇 삶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까?”(M41)라며 물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한다면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한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천수경 십악참회에도 언급되어 있는 십악행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탐욕에 대한 것을 보면 “그는 ‘아,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나의 것이면 정말 좋겠다.’라고 다른 사람의 부와 재산을 탐합니다.”(M41)라고 했다. 분노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그는 ‘이 뭇 삶들은 살해되고 피살되고 도살되고 파멸되어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고 해칠 의도를 갖습니다.”라고 했다.
탐욕과 분노의 꼭지는 달콤한 꿀맛과도 같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의 뿌리에서는 독이 발산된다. 탐욕과 분노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것이 되고 동시에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욕망을 긍정하며 분노를 당연시하는 사회풍조가 있다. 감정은 발산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욕망을 참아서는 안되고 분노는 발산되어야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죄악이다. 그것도 중죄를 짓는 것이다.
악행은 참회하지 않으면 쌓이고 쌓인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는 “이와 같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을 원인으로 어떤 뭇 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M4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주식도 죄악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투자를 목적으로 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인 투자는 권유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주식을 죄악시하여 투자를 기피한다면 자본주의체제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주식을 투자목적으로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부동산도 투자목적이라면 죄악이 될 수 없다. 설령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겼을지라도 투자목적이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자와 투기의 개념은 오락가락한다. 마치 비판과 비난의 경계선이 모호한 것과 같다. 분명한 사실은 투자이든 투기이든 욕망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다.
투자가 투기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비판한다고 하는 것이 비난으로 변질되는 것과 같다. 이익추구를 위한 욕망이 개입되었을 때 탐욕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자본의 논리대로 굴러 가게 되어 있다.
여기 여유돈이 있다. 돈이 있으면 돈을 굴릴 궁리를 한다. 이익이 가장 높은 것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소유로 나타난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소유함으로 인하여 자산이 불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와 동시에 근심과 걱정도 시작된다.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꼬살라국에 한 바라문이 있었다. 바라문은 14마리의 황소를 잃어버렸다. 바라문이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소들이 밭에서 도망간 것이다. 바라문은 황소들을 찾기 위해서 숲으로 들어 갔다. 그곳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부처님을 발견했다.
부처님은 숲에서 가부좌를 한 채 몸을 곧게 세우고 주의를 기울이며 사띠를 확립하고 앉아 계셨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보고서 “이 수행자에게는 없으니 열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S7.10)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바라문은 자신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14마리의 황소를 잃어 버렸다. 소유함으로 인하여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었다. 그래서 바라문에게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열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S7.10)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부처님은 무소유의 행복을 말씀하셨다.
많은 것을 소유한 바라문은 소유로 인하여 근심과 걱정으로 바람 잘날 없다. 바라문이 보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수행자가 행복하게 보였다. 수행자 역시 무소유에 대한 행복을 말하고 있다. 바라문은 소유에 대하여 수행자의 무소유와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이 수행자에게는 없으니
열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한 잎의 참깨나 두 잎의 참깨
밭에서 참깨가 썩어감이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텅 빈 창고 앞에서
열렬히 춤추는 쥐들이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일곱 달이 지나면 금이 가서
깨어지는 마룻바닥이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한 아들이나 두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잠든 자를 발로 깨우는
붉은 종기들이 쏘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이른 아침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S7.10)
수행자에게는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소유로 인하여 근심과 걱정도 없다. 반면 많은 것을 소유한 자는 소유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는 일이고 미래에도 있게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소유하면 불행하고 무소유하면 행복하다. 소유가 불행인 것은 소유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소유는 탐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매혹적으로 보아 갖고자 했을 때 동시에 번뇌도 소유하게 된다. 황소를 소유했다면 번뇌도 소유한 것이 된다. 자식을 갖게 되었다면 그만큼 번뇌도 소유하게 된다.
소유한 것 자체가 번뇌가 된다. 그런데 더 큰 번뇌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소유하려다가 빚을 지게 되었을 때이다.
빚으로 인한 번뇌는 최악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가진 것이 없는 수행자에게는 빚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이른 아침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 오!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S7.10)라고 노래한 것이다.
도박에서 잃은 것보다 더 큰 패배는
주식을 손절한지 오래 되었다. 통장잔고가 바닥 나서 그만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점과 일치하기도 하다.
지금은 주식에 관심이 없다. 소유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작은 이익을 위하여 인생을 올인하다시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설령 이익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 판에 있다 보면 다 잃게 되어 있다. 도박의 원리와 다름없다. 부처님은 도박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가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곳, 지옥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커다란 패배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의 단계가 완전히 성숙하면 이와 같다.”(M129.34)
도박판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야 자리를 뜬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이는 악처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악처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최대의 패배라고 했다.
도박을 하면 왜 악업이 될까? 이는 부처님이 “장자여, 그대의 정신능력들은 그대 자신의 마음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대의 정신능력들은 혼란되었다.”(M8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도박을 하는 자들은 마음이 황폐화되어 있다. 도덕적으로 삼가는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악행으로 되어서 결국 십악행이 된다.
십악행을 하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곳,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그러나 지옥에 태어나기 전에 현생에서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소유함으로 인하여 근심과 걱정, 더 나아가 빚을 짐으로 인한 괴로움을 겪었을 때 지옥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탐욕을 제어할 수 없어서
주식투자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투자가 투기로 변질되었을 때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드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부추기는 주식시장에서 탐욕을 제어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해서 망한다. 설령 장기투자로 묻어 둔다고 해도 늘 마음은 그쪽에 가 있다. 주가 등락을 보면서 일희일비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에 해당된다. 소유함으로 인한 번뇌이다.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14마리 황소와 많은 참깨와 일곱 명의 딸을 소유한 바라문의 근심에서도 알 수 있다. 소유가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이 된 것이다.
소유가 괴로움이라면 무소유는 행복이 된다. 수행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다. 그래서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소유가 반드시 물질적 무소유에 대한 것 만을 말하지 않는다.
소유라 하여 물질적 무소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유로 인하여 정신적 번뇌가 있다면 이것도 소유에 해당된다. 소유에는 물질적 소유도 있고 정신적 소유도 있는 것이다.
재산이 있고 자식이 있다면 소유한 것이 된다. 그런데 물질적 소유는 필연적으로 번뇌가 따른다는 것이다. 주식을 샀을 때 주가의 등락에 따라 희비하는 것도 번뇌가 된다. 집을 사 놓고 집값이 떨어지면 근심하게 되어 번뇌가 된다. 물질적 소유가 정신적 소유도 되는 것이다.
“두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이고”
부처님은 무소유의 삶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소유를 하긴 하되 번뇌를 소유하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
“디가자누여, 수호를 갖춤이란 무엇입니까? 디가자누여, 세상에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두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이고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지니고, ‘이 재물은 왕도 빼앗을 수 없고, 도둑도 빼앗을 수 없고, 불도 태울 수 없고, 물도 휩쓸 수 없고, 악의적인 상속자가 빼앗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수호하고 그것들을 보존합니다. 디가자누여, 수호를 갖춤이란 이와 같습니다.”(A8.54)
네 가지 여법한 삶이 있다. 부지런 함을 갖춤, 수호를 갖춤, 선한 벗을 갖춤, 올바른 생활을 갖춤을 말한다. 이중에서 수호를 갖춘 삶은 위와 같다.
돈은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이 아니라 두 팔의 힘과 이마의 땀으로 번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했다. 노동으로 번 돈이 가치 있는 것임을 말한다.
부모마음을 알아줄까?
아들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나 다름없다. 월급 생활자로 살아서는 평생 아파트 한채 장만하기 힘들다. 부모세대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주식을 하고 비트코인을 하는지 모른다.
주식은 국가에서 공인한 도박장과 같은 것이다. 비트코인은 공인된 사설도박장과 같은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서 주식과 비트코인에 올인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젊은 세대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탐욕은 악행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소유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팔뚝의 힘으로 이마의 땀으로 정당한 원리로 번 것이 가치 있는 것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또한 젊은 세대에게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을 추구해야 함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아들은 과연 이런 부모마음을 알아줄까?
2021-06-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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