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서 공공재 활용으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한낮에는 돌아다니기가 힘들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일요일 집에 있을 수만은 없다. 하지 전날이다. 더위가 한풀꺽인 오후 4시 반에 집을 나섰다. 목표는 비봉산이다.
왜 비봉산이라 했을까? 유래를 알 수 없다. 남들이 그렇게 불러서 알고 있다. 저 산이 언제 비봉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없다. 팻말에 쓰여 있어서 그런 줄 알고 있다.
비봉산은 작은 산이다. 관악산에 속해 있는 산이다. 관악산이 남쪽으로 굽이쳐 내려오다가 삼성산을 만들고 그 아래에 비봉산을 만든 것이다.
관악산은 큰 산이다. 서울 남쪽에 있는 산으로 마치 허파와도 같다. 서울과 수도권 천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숨통을 튀어 주는 듯한 생명의 산이다.
관악산은 평지돌출형이다. 한강 이남에 우뚝 솟아 있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산맥과 연결되지 않았다. 산맥이 없어서 고립된 산이다. 그러나 산은 크고 깊다. 어디서 보아도 보이기 때문에 한강 이남 사람들에게는 랜드마크나 다름없다.
관악산 줄기가 안양 비산사거리까지 뻗어 있다. 관악산이 삼성산, 비봉산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비산사거리에서 맥을 멈춘다. 그곳에서 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비봉산은 이제 동네 산이나 다름없다.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먼저 관악대로 북단에 있는 래미안 아파트단지를 통과해야 한다. 잘 가꾸어진 단지를 보면 최상의 주거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단지 북단 끝자락에서 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숲속에 들어서면 기분이 달라진다. 이를 극적인 변화라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세속에 물든 마음이었으나 갑자기 출세간의 마음으로 바뀐 것 같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날까? 이는 숲이 주는 생명력에 있을 것이다.
아름들이 나무가 있는 숲길이다. 여름 햇볕이 강렬해도 숲길에 들어서면 햇볕이 차단되어 걸을만하다. 이런 숲길은 많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런 숲길이 있는지 몰랐다. 지역에서 오래 살았지만 바로 코 앞에 이런 숲길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리적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 도시에 살면 대체로 각박해지는 것 같다. 반면 풍광 좋은 곳에 살면 넉넉해지는 것 같다. 보이는 것은 빌딩뿐인 도시에서 불과 10여분 만에 숲길을 걷는 것은 행운이다.
숲길은 평탄하다. 완만한 구릉을 타고 가다 보면 관악산 둘레길에 합류한다. 목적지는 비봉산 자락에 있는 너럭바위이다. 마치 항공모함처럼 큰 바위이다. 그래서 ‘항공모함바위’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항공모함바위는 얼마나 클까? 보폭으로 70여보 되니 길이가 30미터가량 된다. 폭은 최장 10보이니 7미터가량 된다. 백명가량 쉴 수 있는 큰 바위이다.
큰 너럭바위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북쪽 바로 아래에는 안양예술공원계곡이다. 저 너머에는 관악산 꼭대기가 아스라히 보인다. 첩첩산중이다. 마치 강원도 깊은 산을 보는 듯하다. 산은 높고 골은 깊다. 아파트단지로 포위된 관악산임에도 일단 들어 가면 별천지가 된다.
온통 초록의 세상이다. 6월의 초록은 5월과는 다르다. 좀더 성숙한 모습이다. 5월이 연두빛이라면 6월은 진한 초록빛이다.
초록은 생명이다. 산에는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풀한포기에서도 생명을 본다. 나무는 말할 나위도 없다. 초록의 산은 생명 그자체가 된다. 생명 속에 있으니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산 아래 도시를 내려다본다. 백색의 아파트단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파트단지에서 욕망을 본다. 인간의 탐욕이 경이로운 인공구조물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다 가질 수 없다.
TV에서 집 자랑하는 프로를 종종 본다. 마치 집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집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집이 좋아 집에만 있는 것 같다.
집이 크면 집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갖춘 집에서 사는 사람은 집이 이 세상 전부와도 같다. 그래서인지 집에서만 사는 것 같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집이 좋아도 자연만 못하다. 자연이 내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때 내것이나 다름없다. 너럭바위에 누워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흘러 가는 구름을 보았을 때 소유개념은 사라진다.
책을 많이 가졌어도 도서관보다 많을 수 없다. 책을 반드시 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을 활용하면 내것이나 다름없다. 별장이 있어도 전국에 별장을 가질 수 없다. 별장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전국에 있는 콘도나 휴양림을 이용하면 내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소유를 바란다. 그러나 소유하는 순간 한정되어 버린다. 그림같은 집을 소유하는 순간 집에 갇혀 버린다. 별장을 소유하는 순간 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공공재를 활용하면 소유하지 않아도 내것처럼 쓸 수 있다. 별장이 없어도 전국에 있는 콘도나 펜션이라는 공공재를 활용한다면 내것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소유자라도 공공재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소유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산에 가면 가진 자가 부럽지 않다. 소유라는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이 내것이 된다.
“집없는 자에게 어울리고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별들의 보석이 펼쳐지고
달빛이 비추어 빛나니.
노천에 지내는 수행승은
사슴 같은 마음으로
해태와 혼침을 몰아내니
수행락을 누리며 앉는다.
머지않아 그는 발견하리
멀리 여읨의 쾌미를!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라면,
노천에서 지냄을 기뻐해야 하리라.”(Vism.2.63)
청정도론 두타행에 있는 게송이다. 숲속에서 무소유로 사는 수행자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수행자가 자연과 일체가 되었을 때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진묵대사의 오도송이 있다. 일부를 보면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게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라고 되어 있다. 무소유의 진수를 보는 것 같다.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하늘에는 별들의 보석이 펼쳐지고 달빛이 비추어 빛나니.”구절과 비슷하다.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있는 정원이 있다. 관악산에서 보는 기암괴석과 소나무에 미치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공공재 활용으로 시대가 점치 바뀌어 가는 것 같다.
65세이상 노인들을 위해 전철 무료탑승 혜택을 주는 것도 공공재활용을 위한 것이다. 책 살 돈이 없어도 도서관에 가면 책을 볼 수 있다. 자가용이 없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별장이 없으면 콘도나 펜션에 가면 된다.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공공재를 활용하면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멋진 집이 부럽긴 하지만 그런 집을 활용하면 된다. 아무리 그림 같은 집이라도 일년 365일 좋을 수 없다.
아무리 맛 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식상한다. 작고 허름한 곳에 살아도 집밖의 것을 내것처럼 이용하면 내것이나 다름없다. 비봉산 항공모함바위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보았다.
2021-06-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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