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했는데
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불가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때로 불교를 잘 표현하는 말로 본다. 왜 그런가? 연기를 표현하는 말로 보기 때문이다.
얼마전의 일이다. 스님에게 보시하고자 했다. 물품 보시를 말한다.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스님은 신도들이 이것 저것 가져온다고 했다.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스님의 태도에 실망했다. 큰스님의 명성에 비해서 의외로 소심한 면을 보였기 때문이다. 보시 거부를 당하자 언젠가 한번 찾아 뵙겠다고 했다. 우리 불교집안에서 늘 회자되는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스님은 요즘 코로나 기간임을 언급하면서 관청의 지침을 어길 수 없다고 했다.
이래저래 거절당했다. 스님은 왜 보시도 거부하고 만남도 거부했을까? 차별하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게 생각되었다. 아마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종종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쓰는데 비난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했다. 이는 차별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런 논리라면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할 것이다. 이익이 되지 않은 사람도 찾아오면 만나 주어야 할 것이다.
만남을 거부하는 것은 편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한면만 보기 때문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일부를 보고서 판단하려 하는 것 같다.
지혜로운 자라면 만남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찾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 자비의 마음으로 섭수해야 한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 사람에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자비훌륭한 대화방법이다. 때로 침묵도 대화가 될 수 있다.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말은 자비의 마음이기도 하다. 원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은 귀찮고 짜증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비의 마음을 낸다면 180도 달라진다. 자비로운 자는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부처님은 만남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외도라도 만나기를 원하면 만나 주었다. 자이나교도 삿짜까가 대론을 요청했을 때 기꺼이 만나 주었다. 교리토론에 응해 준 것이다. 결국 교만한 삿짜까를 굴복시켰다.
부처님은 누구든지 만나 주었다.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토론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토론을 했다. 밤중에는 천신도 만났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만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도 만났다.
유행자 수밧다는 부처님 만나기를 간청했다. 진리에 대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직전이라 기력이 없었다. 이에 아난다는 “쑤닷다여, 여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세존께서는 피곤하십니다.”(D16.119)라고 말하며 막았다. 이런 실갱이를 듣고 있었던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만해라, 쑤밧다를 막지말라. 쑤밧다가 여래를 친견하는 것을 허락하라.”(D16.119)라고 말하며 친견을 허락했다.
부처님은 유행자 수밧다에게 궁금한 것을 알려 주었다. 부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팔정도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없다면, 거기에는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두 번째 수행자도 없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도 없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없다.”(D16.121)고 말씀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팔정도가 없으면 사향사과와 열반도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외도 유행자라도 만남을 원하면 열반의 그 순간까지 만나서 가르침을 주셨다. 이렇게 본다면 절 집안에서 “오는 사람 막지 말라.”라는 말은 부처님이 원조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사람을 만나서 말을 섞는다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것 같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일하고 있는데 사람이 찾아오면 난감하다. 당장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 전에 회사 다닐 때 그랬다.
영업담당이 만나자고 했을 때 피곤한 일이다. 그에게는 개발담당자를 만나서 부품을 소개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이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개발담당자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얼굴한번 보자고 하는 것이다.
영업담당은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빨리 끝내고 하던 일을 계속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빨리 보낼지 궁리만 하게 된다. 커피 한잔 대접하고 빨리 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영업담당은 만남을 위해 한시간 이상 달려왔을 것이다. 한번의 만남을 위해 반나절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손님처럼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일을 하고 있는 도중에 왔다면 빨리 보낼 생각만 하게 된다. 대화도 건성건성 하게 된다. 그래도 만남을 거절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가는 사람도 막지 말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는 사람은 붙잡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가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굳이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아서는 안됨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하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밤이건 낮이건 그 숲속에서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M17)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고 했다.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날 밤이라도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라면 계속 남아있으라고 했다. 특히 의지할 만한 스승이 있어서 지혜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좋으며, 쫓겨날지라도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된다.” (M17)라고 했다.
떠나는 사람을 왜 잡아서는 안돨까? 이를 연기법적으로 볼 수 있다. 인연이 다 되어서 떠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붙잡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인지 모른다. 붙잡아서 함께 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가고자 한다면 가게 놓아주어야 한다.
살아 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만남이 선연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악연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선연이 되고 나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악연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만남은 연기법적인 것이 된다.
연기법은 관계와 관계에 대한 것이다. 만남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관계를 맺으면 영향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리석은 자를 피하라고 했다. 악하고 불건전한 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만남자체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내가 모르는 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를 사귀지는 않지만 항상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나를 찾아온 사람은 반갑게 맞이해 주어야 한다. 하던 일을 당장 중단하고 기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대했을까?
2021-06-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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