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블로그 권력이 되었나?
평온한 아침이다. 일요일임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터로 달려 간다. 일터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차분하다. 절구질하여 절구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자판을 두두리며 하루일과를 또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다.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페이스북을 열어 본다. 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반가운 이름을 보면
새로운 알림을 본다. 이어서 어제 올린 글에 대하여 공감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본다.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있다. 반가운 이름을 보면 인정받은 듯한 느낌이다.
글이 무척 길다. 어제 쓴 글도 A4로 네 장 되는 긴 길이의 글이다. 이런 긴 글을 누가 읽어 줄까?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에스엔에스(SNS)에서는 패스 될 것이다. 사진이나 구호를 외치는 듯한 짤막한 글을 선호할 것이다. 글이 길어서인지 안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내 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글을 쓰면 블로그와 동시에 페이스북에 올린다. 이처럼 동시에 올린 것은 4년 되었다. 2017년 하반기부터 페이스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체카톡방에 올릴 때도 있다. 여러 성격의 카톡방이 있는데 성격을 감안하여 올린다.
글을 올리면 대부분 침묵한다.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나중에 만남의 기회를 가졌을 때 넌지시 물어본다. 반응은 두 가지이다. 한 부류는 길어서 읽어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한 부류는 끝까지 다 읽는다고 말한다. 후자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글을 쓰다 보니 글의 생산자가 되었다. 이런 것은 15년전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작가나 기자 등 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보통사람도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글의 소비자에서 글의 생산자가 된 것이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매일 의무적으로 한 개 이상 쓰고 있다. 십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이는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 회사생활 하다가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쓰게 된 것이다. 블로그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세월이 15년 되다 보니 글이 인터넷에 많이 깔리게 되었다.
블로그 통계를 보니
블로그 통계를 보았다. 누적 방문자수는 755만명이다. 요즘 하루평균 1,000명에서 1,300사이이다.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 아무래도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영향이 큰 것 같다. 이런 매체가 본격화되기 이전, 즉 2010년 전후가 아마도 블로그 전성시대였던 것 같다.
그동안 올린 글을 카운트 해 보았다. 카테고리별로 진흙속의연꽃 2,584, 담마의 거울 1,116, 니까야번역비교 204, 율장의 가르침 57, 니까야강독 99, 나에게 떠나는 여행 458, 국내성지순례기 207, 외국성지순례기 115, 불교명상음악 301, 수행기 169, 봉사기 17, 독후기 47, 수행자를 찾아서 10, 영화드라마후기 121, 강연회 57, 테라와다불교활동 38, 한국불교백년대계 181, 재가불교활동 129개의 글이 있다. 모두 직접 작성한 것이다. 합해 보니 5,904개의 글이다.
2006년 이후 15년 동안 거의 6천개의 글을 썼다. 지금도 맹렬히 쓰고 있는 중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아마 죽는 날까지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회사 다닐 때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글쓰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인간은 환경의 동물처럼 보인다. 환경이 그 사람의 오늘날 모습을 만드는 것 같다. 글 이라고는 기안서 작성하는 것 밖에 몰랐던 자가 어느 날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의무적으로 숙제하듯이 올린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마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북미 베스트셀러 작가 어니 젤린스키의 ‘일하지 않는 즐거움’을 읽었다. 책 타이틀이 마음에 들어 산 것이다.
책에는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특히 일 중독자가 되지 말라는 말에 공감했다. 일에 파묻혀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일하던 30대 후반 시절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충격이었다.
저자는 해고당하고 나서부터 자신의 진정한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해고당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글쓰기였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서 “나도 작가처럼 살 수는 없을까?”라며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말이 씨가 되는 것일까? 2005년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다. 더 이상 엔지니어로서 가치가 상실했을 때, 그리고 더 이상 리더로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퇴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회사를 20년 다녔다. 갑자기 집에 있게 되자 할 일이 없었다. 취직도 되지 않았다. 원서를 내 보았지만 나이가 많아서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육체노동을 할 수도 없었다. 몸이 가늘어서 노동하기에는 조건이 맞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작은 사무실을 임대했다. 냉낭방도 되지 않는 작은 일인사무실을 마치 직장처럼 이용한 것이다.
텅 빈 사무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인터넷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인터넷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거의 일년이 지났을 때 어느 날 “나도 글을 한번 써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 블로그에 쓴 글은 2006년 6월 22일에 작성된 ‘[중국 광동성 동관시에서] – 광동어’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때 당시 어느 벤처회사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중국 동관시에 비즈니스출장 간 것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글쓰기가 일상이 되었다. 엔지니어출신으로 이전에 글이라는 것을 써 본적이 없었음에도 이렇게 매일 쓰게 된 것은 일인사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환경이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글쓰기 꿈이 실현된 것이다.
나는 파워블로거일까?
글을 매일 쓰다 보니 조회수가 증가했다. 해가 갈수록 누적조회수가 증가하여 이제 7백55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아직까지 이 조회수를 능가하는 블로그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불교계 신문에 칼럼을 쓰면 담당 기자는 ‘파워블로거’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파워블로거일까?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음에도 모임에 가면 파워블로거라고 소개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파워(Power)의 의미는 무엇일까?
파워자가 붙는 말이 많다. 파워엘리트라고 했을 때 이는 권력자를 뜻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파워는 권력을 상징한다. 마치 군사권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권력에는 군사권력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으면 역시 권력자를 붙여 준다. 문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다면 문화권력이라고 한다.
권력에는 기술권력도 있다. 기술도 권력화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벤처업계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드웨어엔지니와 소프트엔지니어는 기술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장이라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오늘날 파워라는 말은 권력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글도 권력이 될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권력이 될 수 있을까?
블로그에 글쓰기 하는 것은 권력이 될 수 없다. 파워블로그라고 하지만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영향력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영향력 있는 블로그가 될 것이다.
쓰다 보니 점점 비판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니 점점 비판적으로 되는 것 같다. 이는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 모른다. 몰랐던 것을 알았을 때 비판적인 글쓰기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계 블로그이다 보니 불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순과 위선과 거짓에 대하여 종종 글을 쓴다. 이런 글은 누구에겐가는 불편하고 불쾌할 것이다. 경장과 율장에 근거하여 잘못을 지적했을 때 비판적인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당사자들의 경우 싫어 할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큰스님과 갈등이 있었다. 비판적인 댓글을 단 것이 발단이 되었다. 자비의 마음으로 섭수해 주기를 바랐으나 끝내 포용하지 않았다. 스님의 입장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더구나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스님은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보이지 않은 것을 보니 차단한 것 같다.
불교계에 대한 비판 글을 종종 쓰고 있다. 초기불교 가르침에 근거하여 조목조목 비판했을 때 확실시 공감한 사람의 숫자가 적다. 이틀전에 올린 ‘견월망지(見月忘指)는 담마에 대한 무지’에 대한 글도 이에 해당된다. 이 글에 대하여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댓글도 있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했다. 좀 아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아는 채 하다 보면 비판적 글쓰기가 되기 쉽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적 글쓰기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다는 것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했을 때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경전을 보면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넓고도 깊은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팔만사천법문이 있는 빠알리 삼장을 접하면 나의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하다 보면 종종 세상과 다투는 듯한 때가 있다. 한국불교현실과 부처님의 가르침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지적하는 글을 종종 쓴다. 이는 일종의 비판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비판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어서 글로써 항거하고 글로써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마치 싸우는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 같다.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S22.94)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했을까? 이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탐, 진, 치의 세상에서 무탐, 무진, 무치의 세상으로 가려 하니 마치 세상과 싸우는 듯한 모습으로 비추어짐을 말한다.
부처님은 세상과 싸운 적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 것이다. 부처님이 진리를 설했을 때 세상사람들의 흐름과는 반대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닙니다.”라고 반대로 말한다. 이렇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했을 때 세상사람들 입장에서는 싸움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세상사람들은 마치 자신들과 싸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는 역류도의 어려움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라고 말했다.
글로 인하여 또다른 불평등이
요즘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평등사회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작가나 기자, 학자 등 일부 소수자만이 글을 생산할 수 있었다. 나머지 대부분 사람들은 글의 소비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가 접어 들면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됨에 따라 불평등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글로 인하여 또다른 불평등이 초래되었다. 그것은 글의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글을 생산하는 자는 권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 글을 소비하는 자는 권력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 시대에 새로운 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인터넷권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나는 권력자일까?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니 글의 생산자가 되었다. 글의 생산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글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권력자에 해당된다.
인터넷은 빈부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평등세상을 구현해 주었다. 언론을 무관의 제왕이라 하여 메이저 신문의 기사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글쓰기에 있어서는 평등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기만 할 뿐 글을 쓰지 않는다면 새로운 계급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었으면 글을 써야 한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글쓰는 자에게 종속당한다. 인터넷의 평등시대에 또 다른 불평등이 초래되는 것이다. 글의 생산자와 글의 소비자에 사이에 주종관계 내지는 권력관계가 형성됨을 말한다.
보통사람도 글을 쓰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인터넷과 정보통신 발달에 따른 것이다. 이제 읽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써야 한다. 글의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글의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어야 진정한 인터넷 평등세상이 된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은 성찰의 의미가 있다. 매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썼을 때 정신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권력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묻는다. “나는 블로그 권력이 되었나?”라고.
2021-06-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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