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중년이 되지 않으려면
에어컨 덕분에 열대의 밤을 잘 잤다. 불과 3년전까지만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무엇보다 지구온난화에 일조하는 것이 아닌지 죄스러웠다.
2018년 여름은 끔찍했다. 무려 한달가량 열대의 밤이 지속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지구환경도 좋지만 삶의 질도 생각해야 했다.
매년 여름만 되면 열대의 밤이 두려웠다.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서 버텼는데 한겨울 추위보다 더 힘들었다. 그래보았자 2주라고 생각했다. 2주만 보내면 에어컨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에어컨 없이 살았다. 무더위가 시작되면 창문을 열어 놓고 잤다. 대부분 창문이 닫혀 있음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바람이 불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뜨거운 공기만 유입됐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더운 여름이 더욱 더 덥게 느껴졌다.
마침내 2019년 여름 처음으로 에어컨을 설치했다. 이제 에어컨 3년차이다. 아무리 열대의 밤이 오래 지속된다고 해도 안심이다. 또 한편으로 미안했다. 에어컨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했고 지구온난화에 일조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열대야가 시작되면 잠을 못 이룬다. 물 묻힌 수건을 몸에 감고 자기도 했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으니 삶의 질도 좋지 않았다. 하루빨리 열대의 밤이 지나가기 만을 학수고대했다. 비가 오기를 기대하고 바람이 불기를 기대했다. 태풍이 오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랬던 내가 열대야에 굴복했다.
열대야에 굴복한 나는 패배자일까? 남들 거의 대부분 에어컨 생활을 하는데 나만 창문 열어 놓고 그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지구온난화가 중요하다고 해도 삶의 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사고 싶지 않았던 것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은 겨울답게 보내고 여름은 여름답게 보내야 한다. 추위가 싫다고 하여 남쪽나라에서 한철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여름에는 서늘한 나라를 찾아 북쪽으로 떠날 것이다. 이렇게 편리만을 찾아 산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날 코로나가 창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편리만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겨울을 겨울답게 보내지 않고 여름을 여름답게 보내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냈을 때 면역력은 약화될 것이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온다. 또 가을이 오면 겨울이 온다. 사시사철 춘하추동은 순서가 있다. 인생도 춘하추동이 있다. 봄은 유년기이고, 여름은 청년기이고, 가을은 중년기이고, 겨울은 노년기이다.
봄에서 가을로 갈 수 없다. 유년기에서 중년기로 갈 수 없다. 여름을 거쳐야 가을이 된다. 뜨거운 여름을 견디어 내야 결실의 계절을 맞는다. 여름과 같은 청년기를 거치지 않고 가을과 같은 중년기를 맞이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중년이 되어도 어린애와 같을 것이다. 철없는 중년이 되기 쉽다.
혹독한 시련을 겪은 자에게 힘이 생겨난다. 더 큰 시련이 와도 이겨낼 만한 능력이 생긴다. 뜨거운 여름과 같은 청년기를 보낸 사람은 중년이 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아래 잘 여문 벼와 같다.
중년기나 노년기 때 바람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청년기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봄에서 곧바로 가을로 넘어 가는 것과 같다. 뜨거운 여름을 거치지 않으면 여물지 않듯이, 청년기의 고뇌를 겪지 않은 중년은 철없는 아이와도 같다.
열대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에어컨을 설치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한여름 뜨거운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고행자처럼 살았었다. 여름에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열대야에 항복했다. 남들 하는 것처럼 따라한 것이다. 마치 봄에서 여름을 거치지 않고 가을로 가는 것 같다. 유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치지 않고 중년기로 가는 것 같다. 이는 법도를 어기는 것이다.
계절이 뒤죽박죽 된다면 어떻게 될까? 멸망의 징조일 것이다. 삶의 시기가 뒤죽박죽 된다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 머지 않은 것이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고 여름은 여름다워야 한다. 청년은 청년다워야 하고 중년은 중년다워야 한다.
조금 덥다고 하여 에어컨을 켜서는 안된다. 선풍기로 버틸 수 있다. 부채질해도 좋다. 여름은 여름답게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열대야에 항복했다.
오늘 에어컨 덕분에 잠을 잘 잤다. 미안하고 죄스럽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것일까?
2021-07-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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