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워크 작업을 해 놓고 보니
작품이 완성되었다. 삼일동안 밤낮으로 작업한 것이다. 왜 작품이라 하는가? 업계에서는 아트워크(Artwork)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트워크 작업을 해 놓고 보니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비록 캐드로 작업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기판설계도 일종의 창작품이다. 이 세상에 오로지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공산품이 아니다. 설계자의 의도가 실린 것이다.
키워드광고용 홈페이지가 있다. 메뉴가 몇개 안되는 심플한 것이다. 미사여구로 가득하다. 회사소개에서 “온갖 공을 다들여서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 듯이 설계에 임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눈길을 끌기 위해서 아트워크를 예술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작품 만들듯이 정과 성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패턴 하나 형성하는 것도 미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부품배치도 균형이 맞아야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 내가 만족하면 고객도 만족한다.
30년 이상 아트워크 작업해 왔다. 이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나는 현역이다. 사업자에게 있어서 정년은 없다. 아마 늙어서 죽는 날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것 같다. 농부가 농사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작가가 작품활동을 중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 일은 업이 되는 것일까? 다음 생을 결정할 정도로 강력한 조건이 되는 것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다음생의 조건이 되는 네 가지 업이 있다. 순서대로 보면 무거운 업(garuka kamma: 重業), 죽음직전의 업(yadāsanna kamma: 近業), 습관적인 업(bahula kamma: 多業), 명시되지 않은 업(kaṭatta kamma: 已作業)이다. 여기서 무거운 업(重業)은 결정적이다. 살인업 같은 것이다. 의도를 가지고 살인 했을 때 다음 생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지옥과 같은 악처에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다. 오무간업이 이에 해당된다.
무간죄를 지으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한우주기, 즉 일겁이 지나도 구제 되지 못하는 무거운 업이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 했다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다. 아라한을 죽이는 것과 부처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과 승가를 분열케 하는 것도 해당된다. 이를 오무간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115번 경(M115)에 따르면 하나가 더 있다. 사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갖는 것 등의 고정적 견해를 가졌을 때 무간업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육무간업이라고 한다.
업이 무거우면 과보도 무겁다. 자신이 행한 행위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그런데 무거운 업에는 반드시 무간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업과 관련된 중업도 있다. 네 가지 색계선정과 네 가지 무색계 선정이 그것이다. 삼매를 체험 했다는 것은 내생을 결정지을 정도로 강력함을 말한다. 어느 정도일까? 임종직전에 알 수 있다.
임종순간이 중요하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나는데 그 표상을 조건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음 생의 첫마음을 말한다. 한존재를 결정짓는 마음이다.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고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도중에 바뀌는 일은 없다. 죽음 순간까지 유지된다. 죽어서나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삶을 살면서 일생동안 갖가지 업을 짓는다. 일하는 것도 업을 짓는 행위에 해당된다. 똑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습관적인 업이라 볼 수 있다. 도둑질을 습관적으로 하면 다음 생에도 도둑놈이 되기 쉽다. 이 생에서 가수로 살았다면 다음 생에도 노래 부르는 자로 살아가기 쉽다. 회로기판설계를 평생했다면 다음 생에도 이와 유사한 일에 종사하게 될까?
습관적인 업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데 3순위가 된다. 무거운 업과 죽음 직전의 업에 못 미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표상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죽음 직전의 업이 습관업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담마의 견해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습관업이 우선한다고 했다.
습관업은 규칙적으로 행한 업을 말한다. 한번 행한 것을 기억하는 것도 습관업이 된다는 것이다. 행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약한 업이 된다. 이를 명시되지 않은 업이라고 한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강렬하다. 어렸을 적 경험이 기억에 남는 것은 습관업의 범주에 해당된다. 인생을 살면서 파란곡절을 겪었다면 역시 습관업이 된다. 기억에 남아 계속 떠올리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도 있을 것이다. 성지순례 가서 기쁨이 있었다면 영원히 간직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임종순간에는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야 한다. 떠 오른 표상이 내생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 좋은 습관은 내생의 결정적 조건이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삼매를 체험하는 것이다. 삼매체험은 어떤 선업보다도 강렬할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수행공덕이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은 선업공덕에 해당된다. 습관업으로서 다음생을 결정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수행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수행공덕은 보시나 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거운 업이기 때문이다. 이를 소떼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밤새 축사에 있던 소는 아침이 되면 방목된다. 이때 일등으로 나가는 소가 있다. 소중에서 우두머리가 이에 해당된다. 우두머리 소가 나가면 나머지 소는 따라 나간다. 여기서 우두머리 소와 같은 것이 무거운 업이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일순위가 되는 업이다. 부모를 살해하는 등 무간업을 지은 자가 이에 해당된다. 또한 네 가지 색계선정이나 네 가지 무색계 선정을 경험한 자도 해당된다.
방목장 축사에서는 모든 소가 빨리 나가려고 할 것이다. 리더가 되는 소가 가장 빨리 나간다. 무거운 업을 지은 자와 같다. 리더 소가 없을 때는 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소가 가장 빨리 나간다. 죽음 직전 업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죽음 직전 업은 사실상 습관업과 같다는 것이다.
습관업은 행위를 기억하는 업이다. 행위를 기억하면 습관업이 된다. 행위를 했음에도 깨끗이 잊어버린다면 습관업이 되지 않는다. 이를 '명시되지 않는 업'이라고 한다. 잠재의식에는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습관업이 있다. 늘 기억나는 업이 이에 해당된다. 계산서를 발행 했는데 결재 하지 않았다면 기억에 남는다. 업으로서 남는 것이다. 그사람은 깨끗이 잊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간직하고 있다. 잊어 버리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러나 결재 되면 깨끗이 잊어버린다.
미결된 것은 기억에 남는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악행이 된다. 자신의 악업이 되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원망도 남아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습관업이 된다. 돈을 떼 먹고 달아났을 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모를 죽인 원수는 잊어버릴 수 있으나 내 돈 떼 먹고 달아난 자는 평생 기억한다. 습관업이 되어 서로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은 습관업을 짓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다음 생에도 그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행한 것을 기억하는 한 습관이 되어서 임종순간 표상으로 떠오른다면 다음 생을 결정할 조건이 된다. 그러나 어떤 표상이 떠오를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선업공덕을 많이 쌓으라고 말한다.
임종순간이 중요하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습관업에 따라 다음생이 결정된다. 수많은 습관업 중에 어떤 표상이 떠오를지 알 수 없다. 선업도 될 수 있고 악업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선정체험과 같은 무거운 업을 지으면 일순위가 된다. 마치 리더가 되는 소가 일순위로 축사를 빠져 나가는 것과 같다.
보시와 지계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장된 것은 아니다. 선정체험을 하지 않는한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 알 수 없다.
보시와 지계공덕을 지었어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설령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다음 생은 보장되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열반을 체험하여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악처의 문을 영원히 닫게 됨을 말한다.
매일매일 습관업을 짓고 있다. 일하는 것도 습관업에 해당된다. 그런데 일은 선업보다 악업이 더 많은 것 같다. 왜 그런가? 욕망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재와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계산서를 발행했다. 거의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미결된 것은 기억에 남아 있다. 계속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습관업이 된다. 그 사람의 원망에 대한 감정도 남아 있다. 사업을 오래 하면 할수록 좋지 않은 기억도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일만 해서 살 수 없다. 일을 하면 습관업을 쌓을 수밖에 없다. 선업도 악업도 아닌 중립적 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행위를 하는 한 불선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이다. 가장 좋은 것은 수행하는 삶이다.
삼일동안 밤낮으로 작업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시간 지나면 깨끗이 잊혀 질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니다. 명시되지 않은 업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현생의 직업이 다음 생의 직업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다만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다음 생에서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일하는 것만으로 살 수 없다. 일은 생계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업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직과 업 두 가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글을 써서 자아실현해야 한다. 여기서 일은 직(職)이 되고 글쓰기는 업(業)이 된다. 가장 좋은 업은 수행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좋지만 수행하는 업에 미치지 못한다. 수행이야말로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나는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
2021-07-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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